"'슬로우 푸드'같은 의학을 꿈꾸며…"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환자는 응급실에만 있지 않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일년이 넘게 일주일에 한번 이나 두 번씩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환자분에게 늘 묻는 질문입니다. 그럼 이 분은 그 동안 생겼던 증상의 변화나 생활하면서 불편했던 점들을 이야기하고, 저는 몸 상태를 살피면서 식사나 수면과 같은 일상적인 부분과 증상과 유관한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들을 체크합니다.

심신의 상황도 많이 안정되었고 본인 표현으로 10에 8~9정도는 좋아졌다고 하는데, 처음 내원했을 때는 여러 증상이 중첩되어 있는 복잡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환자분들이 그렇듯 이 분도 단번에 불편한 점들이 사라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병도 오래 되었고 그 동안 받은 치료들을 통해 증상이 복잡하게 엉켜서 이것을 풀어내자면 시간도 필요하고 본인의 노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설명 드렸고, 다행이 환자분이 잘 이해해서 진료를 해 올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병을 가진 분들 중에는 잠시 치료를 받다가 변화가 없으면 다른 곳에 가서 치료를 받기를 반복해서, 병은 병대로 낫지 않고 증상은 도리어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의 호전은 물론이고 의사에게도 환자와 병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 기간을 참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의사는 자꾸만 강하고 표면의 증상을 잠재우는 치료법을 쓰게 되고, 환자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못하게 자꾸만 또 다른 요법과 의사를 찾아 방황하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몸과 마음의 바탕이 충분히 회복할 힘이 있는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온 병은 드러난 것만 치료하면 낫지만, 지치고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자란 병은 드러난 증상은 물론 몸과 마음을 함께 회복시켜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의사와 환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병증보다 사람과 그 삶에서 치유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 환자가 응급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수술실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연합뉴스

진료를 하다보면 치료의 기술보다 느리지만 환자의 내면으로부터 채워가는 치유의 기법이 더 효과적인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그럴 때는 우리 시대의 의학이 병을 없애는데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사람을 놓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중환자실, 수혈, 항생제 등 현대의학은 무척 중요하다. 그 '의료 모델'이 없었다면 랩맨 씨는 치명적인 간질환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랩맨 씨가 완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라구나 혼다의 길(道), 힐데가르트의 길(道), 그리고 시간의 손길, 사소한 것들, 잘 먹기 선생, 잘 쉬기 선생, 잘 웃기 선생 같은 근대이전의 의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랩맨 씨의 삶을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서는 돈 테일러 씨가 필요했다. 그가 일깨워준 삶의 의미와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 신의 호텔, 빅토리아 스위트 지음, 김성훈 옮김, 와이즈베리
병을 고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응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해내고, 중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현대의학의 놀라운 성과입니다. 하지만 환자가 응급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수술실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더 많은 환자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얻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아마도 사람을 기계와 물질적 존재로 환원시켜 들여다보는 의학의 방식은 앞으로 점점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그럴수록 영혼을 가진 사람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겠지요. 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어느 한 가지 방식이 아닌 이 두 가지 관점이 잘 만나는 곳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앞으로의 의학이 슬로우 푸드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과 병 모두를 치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행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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