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가 없었으면 경제 발전도 없다? 위험한 착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2> 경제 개발, 열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박정희 독재로 경제가 발전해 민주화가 가능하게 됐다는 주장은 개발 독재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지난번에 지적했다. 개발 독재론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개발 독재론은 1990년대에 들어서 세를 얻기 시작했다. 태국 등 동남아 학자에 더해 싱가포르 정치인도 여기 가담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를 말한다. 리콴유는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와 더불어 개발 독재를 옹호한 대표적인 아시아 정치가다. '편집자') 개발 독재론은 일본인들의 주장을 약간 변형해서 받아들인 것인데, 종속론과 달리 개발 독재론을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은 '내가 누구의 개발 독재론을 받아들였다'는 전거를 달지 않는 게 특징이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굉장한 경제 발전을 하자,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백인이나 황인들 일부에서 유교 자본주의론, 또는 토지 개혁 같은 문제가 제기됐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 시기에 또 하나 등장한 것이 개발 독재론이다.

원래 이 논리는 독재를 경제 발전에 필요한 것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개발 독재론자들도 이 점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게 아주 심각한 지점이다. '한편으로 박정희 경제 또는 박정희를 비판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그걸 긍정적으로 보는 또는 보게 만드는 것 아니냐. 대단히 애매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었다.

허점투성이 개발 독재론의 위험성

프레시안 : 독재가 경제 발전에 필요하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 독재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경제 성장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간 국가도 많지 않나.

서중석 : 개발 독재론은 한국하고 대만 등 몇 나라에만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중남미나 아랍 이런 데는 전혀 상황이 달라서, 아무리 독재를 해도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군부 독재 때문에 경제가 망했다. 그래서 종속론에서는 이런 개발 독재 이야기가 안 나온다. 종속론 주장과 상관없이, 칠레의 경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집권기(1973∼1990)에 좀 성장한 때가 있다. 이 지역의 군부 독재자 중 아주 드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당시 학자들은 이것을 개발 독재론으로 설명하지 않더라. 신자유주의라든가 다른 요인으로 설명한다. (1973년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스'(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파의 대부이던 밀턴 프리드먼이 키워낸 칠레 경제학자들)를 중용했다. '시카고 보이스'는 신자유주의 원리를 앞세워 칠레 경제의 틀을 급속하게 바꿨다. '편집자')

개발 독재론자들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에 대해서도 왜 이런 나라들에서만 경제 발전이 이뤄졌는가, 이런 나라들이 왜 성공했는가를 정확히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난 이 나라들의 경우도 그렇게 성공으로만 보지는 않지만, 하여튼 개발 독재론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필요한 부분만 이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개발 독재론이 한때 인기를 끌었는데, 이건 자국의 뒤를 따라오려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같은 지역 주민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지역에서 이뤄진 경제 발전을 적당히 설명하는 데 개발 독재론이 유효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래서 난 한 자리에서 일본인한테 '그러면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일본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말이냐'라고 반문해봤다. 기분 나빠하더라.

사실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태국 등의 외국인 학자들은 한국 상황을 잘 모른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유신 체제 이전의 한국 사회와 유신 체제 시기의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에서 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나.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유신 체제 이전 시기에 한국에서 경제 발전이 많이 됐다는 것 등 다른 여러 상황도 잘 모른다. 또 대만이 중화학 공업 시기로 들어가는 1972년경부터 장경국(장징궈)이 세를 얻으면서, 점진적이지만 독재가 완화되고 양안 문제 같은 것도 풀어나간 것들에 대해서도 눈감는다. 다시 말해 외국의 개발 독재론자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몇 가지만 인용하는 식이다.

문제는 한국 학자들이다. 유신 독재를 인정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이끌어가기 위해 '유신 체제와 그 이전의 정치가 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더라도 다 개발 독재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식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인의 99퍼센트가 유신 쿠데타 이후와 그 이전의 정치는 다르다고 보고 있는데도, 그런 주장을 편다. 또 개발 독재 얘기를 하려면 전두환 정권의 개발 독재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부분은 빼놓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더라.

개발 독재를 초기에 주장한 사람들을 보면 이 시기를 연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유신 경제건 그 이전의 한국 경제건 전두환 경제건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 사항을 가지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막연하게 이해하는 사람들한테는 아주 쉽게 써먹을 수 있는 그런 논리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1930년대와 해방 직후 백남운과 다른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학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박정희 신화에서 벗어나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사진은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 현수막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백남운의 고난, 그리고 민족 문제와 계급 노선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식민 사관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단군 신화에 대해 일본인들은 '그건 날조한 것'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해버렸지만, 백남운은 단군 신화의 역사적 성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일본의 유명한 학자들이 주장하던 정체성론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 시기에 이식 자본주의가 한국 경제를 어떻게 굴곡지게 하고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가를, 아울러 식민지 자본주의, 요새 말로 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이것을 백남운은 철저히 비판했다.

그런데 이청원을 비롯한 다른 한국인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학자들은 당시 풍미하던 아시아적 생산 양식, 특히 아시아적 정체론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보니까 실질적으로 식민 사관을 수용하게 되고, 특히 정체성론을 오히려 뒷받침해주는 주장을 많이 했다. 일본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사실상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을 보여줬다. 그런 점에서 타율 사관에서도 벗어나지 못했고 타율 사관을 오히려 보강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런 이청원 식의 역사 해석, 경제 해석에서 당시 식자층이 헤어나지 못한 데 있다. 백남운의 최대 장점은 우리 역사에 관한 아주 구체적인 자료를 풍부하게, 그리고 정치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연희전문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위당 정인보의 도움도 받았다. 그런데 이청원의 책을 두 권 다 읽어보면 이건 2류급 사료만 사용했다. 일본인 학자들이 이미 사용한 것을 또 사용했다. 그런데도 당시를 풍미한 건 이청원 쪽이었다.

프레시안 : 일제 강점기에 백남운이 다른 한국인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학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점을 이야기했다. 해방 후에는 어땠나.

서중석 : 해방 후 한국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미소공위에서 통일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 하는 그야말로 기로에 놓여 있을 때 백남운은 유명한 '조선 민족의 진로'(1946년 4월)를 발표한다. 민족 해방을 위해 자산 계급의 일부와 전 무산 계급이 해내, 해외를 막론하고 동맹 관계를 맺었는데, 그것을 연장해서 민족 혁명, 곧 통일 독립 국가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백남운은 이 글에서 역설했다. 일부 유산 계급의 혁명성, 다시 말해 통일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평가해준 것이다. 여운형의 좌우 합작 논리를 이론적으로,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그러자 그 시기 급진적 지식인들이 일제히 백남운을 공격했다. 아주 지독한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내가 보기에 백남운이 훨씬 논리성, 현실성을 띠고 있었는데, 당시 지식인 사회를 풍미한 것은 급진적 계급 논리였다. 그 앞에서 백남운은 힘을 가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나쁜 사람, 마르크스주의의 배반자 비슷하게 몰려버렸다.

일제 시기인 1930년대에 극좌 노선으로 계급 노선 또는 계급주의가 풍미하게 된다. 그 당시 이광수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다. 조국을 팔아먹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그렇게 했다. 심지어 이매망량(魑魅魍魎)이라고까지 표현했더라. 사전에서 이매망량의 뜻을 찾아보면 온갖 도깨비라고 돼 있는데, 이광수가 그렇게 표현했다. 사실 1920년대에도, 1930년대에도 이광수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는 밤에 하는 짓이 다르고 낮에 하는 짓이 달랐던 이광수야말로 이매망량, 도깨비였는데 그런 이광수는 그렇게 민족, 민족 하면서 마치 정말 민족을 위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민족을 소련 제국주의한테 넘긴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두들겨 맞은 것이다. 그 당시에 누가 더 설득력이 있었겠느냐 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나.

해방 직후에도 계급 노선이 한때 풍미했다. 이런 계급 노선을 강하게 들고나오기 이전에 사회주의자들은 원리·원칙에 사로잡혀 민족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탁 통치 문제가 제기됐을 때 그야말로 원칙론만 주장하다가 된통 당했다. 그런데도 다시 계급 노선을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이승만, 한민당, 친일파 이쪽이 자기들이야말로 민족 진영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민족을 팔아먹는 자들'이라고 또 비판하는 일이 벌어진다.

'민족'을 버려야 진보가 산다? '민족'에 담긴 역사성 기억해야

프레시안 : 새로운 사회를 꿈꾼 이들에게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의 관계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참으로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현명한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아쉬운 순간도 적지 않았다.

서중석 : 역사를 되돌아볼 때 여러 가지로 생각나는 것이 참 많다. 그와 관련해, 약간 다른 문제가 끼어 있기는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진보 세력이 자신을 쇄신하지 못하고 화석화돼가던 지식, 사회구성체론이 제일 대표적인데 어쨌건 그런 것에 묶여 있던 시기에 대해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래서 운동권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무기력하다고 할까 체념 상태 비슷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 또 1990년대 중후반 퇴화해가던 NL 일부 학생 운동권에서 진부한 방식으로 민족을 막 외치고 있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조류들이었다. 이제 미셀 푸코가 칼 마르크스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가독점자본주의 대신 규율이라는 언어 같은 것이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럽에서처럼 새로운 비판 세력 역할을 한 게 아니다. 일본에서처럼 진보 세력을 피폐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결과적으로 뉴라이트에 유리한 정황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이러한 조류들의 선봉에 선 사람들을 보면 한국사 전공자가 없었다. 사실 한국 전근대사 전공자도 잘 모르는 한국 근현대사를 이 사람들이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주로 서양사, 서양 철학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었다.

프레시안 : 그러한 지적 조류가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가.

서중석 : 이러한 조류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산물이자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민족이라는 말을 기피하게끔 만들었다. '쇼비니즘(국수주의)', '상상의 공동체', '민족은 만들어진 말이다', 이런 식으로 비판했다. 나중에 가서는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동요했고, 그러면서 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동조자를 얻는 현상이 일어났다. 수십 년 동안 '민족 고대', '민족 연대', '민족 성대' 같은 식으로 한때 민족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 있지 않았나. 그런데 그것에 대한 역풍이 몰아쳐서 이제는 민족이라는 말 사용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민족, 혁명, 사회주의, 민중 등의 거대 담론을 회피하고 가볍게 살려는 소시민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영향을 크게 끼쳤고, 계급주의로 무장한 PD 학자나 운동권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이라는 말을 집요하게 비판했던 것도 한몫했다. 민족은 근대의 산물로, 이 말은 3.1운동을 통해서 그리고 3.1운동 이후 대중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나. 그래서 해외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도 동포, 겨레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고, 의지할 것 없던 한국인들의 마음의 고향이 됐다. 그래서 이 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은 한국인에게 영원한 것으로, 이건 이광수도 그렇게 주장했는데, 그렇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독립 운동, 민족 해방 투쟁에 반드시 따라다녔던 소중한 말이었고 민중, 인민과 동일시됐고 당하는 자, 억압받는 자, 서민을 가리키기도 했고 아리랑이라든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 상징하는 백의민족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1990년대 후반 이후 휘둘리게 된 것이다.

분단 시대에 이승만, 박정희, 친일파를 비판하는 데 '민족'이라는 어휘처럼 유효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민족의 최대 비극인 분단을 자신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하고, 민중을 억압했으며, 두 사람 모두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냉전 논리를 폈다. 그뿐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은 군국주의 만주 인맥과 깊숙한 관계를 맺으며 친일 정책을 추진했고, 유신 체제는 군국주의 파시즘과 직결된 쇼와 유신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한 이승만, 박정희를 비판하는 데 민족은 적절한 용어가 될 수 있다.

단재 신채호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이유

▲ 단재 신채호.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경제 개발에 관한 이야기 마당을 닫을 때가 됐다.

서중석 : 단재 신채호, 이분은 남한과 북한에서 함께 존경받는 아주 드문 분으로 난 언제나 이분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단재 신채호는 일찍이 왜 한국에서는 조선의 공자, 조선의 석가, 조선의 예수가 되지 못하고 공자의 조선, 석가의 조선, 예수의 조선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동화(同化)의 비극을 이야기했는데 난 그게 한말, 일제 초기에만 한국인을 절절히 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역사에 딱 들어맞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문명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것이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문명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오히려 일본이나 서양에 동화돼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그쪽으로 빠져버리는 일이, 예컨대 한말 친일 개화파의 경우처럼 너무나 극적으로 많이 나타나지 않았나. 그래서 신채호는 우리 조선을 위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조선을 위해 자유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구두선처럼 하면서 사실은 자기를 상실해버리는 상태를 비판했다.

나는 경제 전문가, 경제학자 이분들한테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를 제발 좀 많이 연구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한다. 박정희 신드롬을 극복하고 해체할 때만이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문제, 문화와 인간 문제, 한반도 평화와 남북 관계에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현대사 연구가 제대로 안됐던 것은 극우 반공 권력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1960년대건 1970년대건 감옥 갈 각오를 하고 우리 근현대사를 연구했더라면, 그리고 진보 세력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와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조류나 뉴라이트, 수구 냉전 세력에 더 생동감 있고 역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경우 우리 미래는 훨씬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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