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미 동맹' 타령할 때가 아닙니다!

[유라시아 견문] 유라시아의 길

2015년 새 연재 '유라시아 견문'이 3월 10일 닻을 올립니다. 그 동안 '동아시아를 묻다'를 통해서 한반도, 동아시아, 세계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시각을 보여줬던 유라시아 연구자 이병한 박사(연세대학교 동양사학과)가 앞으로 3년 일정으로 유라시아 곳곳을 직접 누비며 세계사 격변의 현장을 독자에게 전합니다. '유라시아 견문'은 매주 화요일, 독자를 찾아갑니다.

동아시아

지난 1년 호떠이에서 살았다. 하노이(河內)는 강과 호수로 둘러싸인 물의 도시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호수가 호떠이다. 덕분에 아침은 근사했다. 물안개 위로 떠오르는 일출이 일품이었다. 산책하며 자문했다. 어쩌다 이곳까지 왔나. 답은 자명했다. 동아시아였다. 동아시아론에 감화되어 베트남까지 이른 것이다.

호떠이(Ho Tay)는 호서(湖西)이다. 우리식으로는 서호(西湖)이다. 비단 하노이의 서편에 자리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서호는 그 자체로 역사적, 문학적 은유이다. 중국의 항저우(杭州)에는 바다와 같은 서호가 자리한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만큼 커다란 호수이다. 시심(詩心)을 절로 일으키는 강남 문화의 처소이다. 수원성 근방에 서호가 자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자 군주 정조의 정신세계에도 서호가 있었다. 동아시아의 공통 유산인 것이다.

과연 호떠이를 걷노라면 중화 세계의 흔적이 역력하다. 최고 명문 고등학교의 이름은 베트남 최초의 유학자 쭈반안(Chu Van An)에서 따왔다. '베트남의 정도전'에 빗댈 수 있는 레 왕조의 개국공신 응우옌짜이(Nguyen Trai)가 석양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는 자리도 기리고 있다. 천년사(千年寺)를 비롯한 사원과 서원도 여럿이다. 천년 고도의 기품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베트남은 중화 세계의 가장자리이면서 동북아와 동남아가 만나고 갈리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유럽이 부쩍 가까웠다. 조선이나 대만(타이완)과 달리 제국 일본의 영향이 미미했다. 'Hanoi'라는 명칭부터가 프랑스 통치의 산물이다. 본래는 탕롱(昇龍)이었다. 용이 날아오르는 곳이었다. 그 상징성을 지워버렸다. 지리적 특징을 딴 범범한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한자가 사라지고 알파벳을 '국어(Quoc Ngu)'로 사용하게 된 기원도 프랑스에 있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오페라 극장은 파리풍이 여실하다. 오늘의 국가도서관은 100년 전 인도차이나대학이었다.

그런데 西歐(서구)만도 아니었다. 東歐(동구)도 멀지 않았다. 당장 내가 살던 집의 지척에는 러시아어, 즉, 키릴 문자로 간판을 새긴 작은 호텔이 있었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던 해 문을 열었다. 이웃한 우크라이나 식당의 흑맥주 맛도 손색이 없었다. 주인장은 1980년대 공업 기술을 전수하러 파견 나온 사람이었다. 하노이 처녀와 정분이 나서 눌러앉은 것이다.

시청은 모스크바 풍이었으며, 레닌 공원의 동상도 철거되지 않았다. 그만큼 베트남은 러시아와 동유럽은 물론 오늘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도 깊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노이는 東方(동방) 천년과 동서구 백년의 유산이 어울린 독특한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혼종적이고 잡종적인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다.

나는 이곳에서 (북)베트남과 북조선의 연결망을 복원하는 작업을 했더랬다. 허나 문헌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쉬운 대로 김일성 종합대학 등 여러 곳에서 유학했던 분들의 말씀을 청해 들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너희들은 타국에서 배우고 익혀 조국의 전후 건설을 준비하라는 호치민의 뜻을 따랐던 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평양의 대동강에서 몽골 유학생과 중소 논쟁을 주제로 언쟁을 하다가 주먹다짐까지 벌였다는 일화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퍼뜩 떠오른 것은 연암의 <열하일기>였다. 아하, 필담으로 향유했던 중화 세계의 문예 공화국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로구나. 커녕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었다.

냉전기 저들은 서로의 국가를 방문하고 유학하며 중국말로, 조선말로, 몽골말로, 월남말로 소통하고 있었다. '죽의 장막'에 갇혀 있던 쪽은 이편이었지 저편이 아니었다. 저편은 중화 세계 너머 제3세계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 더 중요하게는 新/舊(신/구)의 단절이 아니라 古/今(고/금)의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라는 이름 아래, 혹은 비동맹 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좁게는 중화 세계의 연결망이, 더 넓게는 유라시아적 교류망이 재건되고 있었다. 멀리는 혜초가, 가깝게는 연암이 밟았던 길이 더욱 넓어지고 촘촘해졌던 것이다. 그래야만 북조선 문단의 일인자, 한설야의 이름을 딴 대로가 타슈켄트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고로 탈냉전 또한 동서 냉전의 종식으로만 치부하고 마는 것은 모자람이 크다. 냉전 이후의 실상이란 동서 냉전에 저항했던 운동, 탈냉전 운동의 확대와 심화라고 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재결합과 재통합이 더욱 확산되고 깊어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귀환' 또한 '유라시아의 귀환'의 일부였다.

아니 동아시아에 한정되어 있던 발상 자체가 한반도의 남쪽에 묶여 있던 냉전기와 그 세대의 경험적 한계의 소산이다. 과연 한국에서 동아시아론이 발진하고 있을 때, 탈북자들은 중국을 지나 동남아와 동유럽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냉전기에 다져진 유라시아의 길이 탈북한 조선인들의 생명선이 되어주었다.

대아시아

동아시아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는 발상이 유별난 것은 아니지 싶다. 작년 말, 일본에서는 <몽, 대아시아(夢, 大アジア)>라는 신생 잡지가 창간되었다. 일본과 아시아를 재차 고민하는 듯하여 반갑기 그지없었다. 하토야마 민주당 정부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조락하고, 아베 정권의 퇴행적인 전후 체제 탈각 작업을 착잡하게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민간의 대안적 지역 구상에 솔깃했던 것이다.

출범 장소부터 흥미로웠다.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이다. 규슈의 날씨는 열도보다 반도에 더 가깝다. 대마도를 지나 해류를 타면 한걸음에 닫는다. 그만큼 아시아의 바닷길과 오랫동안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으로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이기도 했다.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 노릇을 했다.

불행히도 이들은 후자를 잇고 있었다. 현양사(玄洋社)의 후예를 자처했다. 올해는 마침 을미년이다. 을미사변 120주년이다.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 현양사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공사였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또한 현양사 출신이었다. 일순 기대가 꺾이고 불안이 엄습했다. 과연 민권보다는 국권, 국권보다는 천황을 중시하는 헌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었다. 아베 정권을 능가하는 민간 우익이었다.

그들은 재차 아시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창했다. 후쿠오카가 아시아 독립 운동의 거점 도시였음을 환기시켰다. 순 거짓말은 아니다. 쑨원(孫文)과 신해혁명을 지원했었다. 그러나 본심은 달리 있었다. 대청제국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분리 독립한 지방성들을 제국 일본의 품으로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조공국들 또한 그런 식으로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獨立(독립)'이라는 화두가 다시금 불온하다. 중화 세계를 해체하고 제국 일본을 관철시켰던 선도적인 구호가 재차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강요된 홀로서기는 自立(자립)과 自主(자주), 自治(자치)를 허용치 않았다. 자칭 '국제회의'에 불러들인 이들의 면모에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왕년의 조선, 대만, 만주를 대신하여 이제는 티베트, 내몽골, 위구르, 미얀마(버마), 태국(타이)에 공을 들였다. 명명도 불손하다. 내몽골은 남몽골로, 위구르는 동투르키스탄으로 고쳐 불렀다. 이쯤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분화와 와해를 지원하는 외곽 단체 노릇을 하겠다는 뜻이다. 아찔하고, 아연했다.

발기문에서는 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주의와 확장주의'를 우려하고 있었다. 중국의 굴기를 겨냥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대아시아몽 또한 中國夢(중국몽)에 맞선 대항 담론일 터이다. 중국의 타자화가 여전하다. 20세기 초기에는 반봉건의 이름으로, 20세기 후반에는 반공의 이름으로 중국과 일백년 적대했다.

이제는 반패권의 이름으로 중국을 봉쇄하는 대아시아를 건설하겠단다. 안타깝다. 안쓰럽다. 가능하지도 않고, 가당치도 않다. '一帶一路(일대일로)'를 축으로 유라시아를 종과 횡으로 엮어가고 있는 작금의 실상에 비추어 보자면, 반중 연합에 기초한 대아시아 구상이란 몽상이자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반서구 아시아 연대에서 반중국 아시아 연대로의 전환이야말로 지난 100년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서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中國(중국)이 다시 축이 되고 있다. 세계 체제의 '재균형'이다. 국제 질서의 '민주화이다. 비정상의 정상화이며, 신창타이(新常態), 뉴 노멀(New Normal) 시대이다.

▲ 새천년 부활을 꿈꾸는 초원길과 바닷길은 20세기 침묵을 강요당했던 유라시아가 세계사 격변의 현장으로 떠오르는 신호다. ⓒgnovisjournal.org

유라시아

중국은 이미 동아시아를 넘어섰다. 동아시아로는 더 이상 중국을 담아낼 수 없다. 동남부 연안 중심의 개혁 개방이 기존의 세계 체제에 편입, 편승하는 적응 과정이었다면, 서부 대개발과 일대일로는 새로운 세계 체제의 개조와 재편을 꾀하는 극복 과업이다. 태평양에서 유라시아로 축이 옮아간다.

20세기형 지정학과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도 낡고 진부해진다. 국가주의는 문명권별 지역 질서를 해체하고 나라별로 쪼개어 분리 통치하는 방편이었다. 지정학은 한 몸으로 운동하던 유라시아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 등으로 분화시켜 지배하는 歐美(구미)의 전략이었다. 결국 '거대한 체스판'의 卒(졸)이 되었다.

하여 새천년 초원길과 바닷길의 복원은 100년간 끊어지고 막혔던 동서의 혈로를 다시 뚫어 물류와 문류(文流)를 재가동시키는 유라시아의 再活(재활) 운동이다. 국경(Border)이 통로(Gateway)가 된다. 지리는 재발견되고, 지도는 다시 그려진다. 21세기의 大勢(대세)이고, 메가트렌드(Mega-Trend)이다.

따라서 작금의 모순과 균열을 미중간의 패권 경쟁으로 오독해서는 심히 곤란하다. 이러한 인식을 줄기차게 발신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밝히고 따지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실상은 대세와 반동(反動)의 갈등이다. 유라시아의 (재)통합을 지향하는 운동과 20세기형 분열과 분단을 지속하려는 세력 간의 길항이다.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를 건설하려는 세력과 유럽-아프리카, 유럽-아메리카형 세계 체제의 지속을 도모하는 세력 간의 '문명의 충돌'이라고도 하겠다.

세계 체제 갱신은 세계사 재인식과 동시적으로 수행될 것이다. 서구 중심주의를 중국 중심주의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럽적 가치에 동아시아의 전통을 맞세우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구미적 근대성이나 아시아적 가치론이나 자족적이고 자폐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서구를 배타하지도 흠모하지도 않는다. 근대를 폄하하지도, 과장하지도 않는다.

사물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뿐이다. 유럽을 유라시아의 서단으로 지방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을 바르게 불러주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 근대와 전근대의 분단 체제를 허물고 유라시아적 맥락으로 東西古今(동서고금)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유럽의 자만도 아시아의 불만도 해소하는 大同(대동) 세계의 방편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우리 또한 과거사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과 고려, 발해와 신라, 고구려, 백제, 고조선을 재인식하고 재발견해야 한다.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 전부가 아니었다. 봉건과 정체(停滯)도 아니었다. 고대니 중세도 허튼 소리였다. 영겁을 회귀하는 시간의 망망대해에서 '진보(progress)'는 근대인의 부질없는 망념이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근본적으로 평등하다. 반만년의 역사야말로 새 천년의 자산이다. 한반도의 분단 체제 극복 또한 左右(좌우)와 南北(남북)이 공히 앓고 있는 고/금 간의 분단을 해소하는 작업과 필히 연동될 것이다.

앞으로 3년간 유라시아의 (재)통합 현장을 見聞(견문)하려고 한다. 보고 들은 얘기들을 쓰고 옮길 것이다. 주축은 일대일로이다. 하지만 大路(대로)에만 편중되지도 않을 것이다. 주변의 샛길에도 눈길을 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에 도취되었듯, 중국몽에 현혹되지도 않을 것이다. 직시하고 직문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미래파의 선언, 신상품이 아니다. 때늦은 자각이며, 뼈아픈 후회이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옛 사람의 글을 다시 읽고, 옛 사람들이 오갔던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먼지 쌓인 고(古)지도를 청사진으로 삼을 것이다. 한반도 동남단, 경주의 석굴암은 西域(서역)과 페르시아로 이어졌던 누천년 유라시아 연결망을 묵묵히 증언해주고 있다. '유라시아 견문'이 식민과 분단으로 망실해버린 유라시아적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해방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내 나름의 통일 사업이고 실력 양성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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