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모독과 테러, 정치적 이용의 악순환

[김재명의 월드포커스] 제2, 제3의 프랑스 테러 막으려면…

오늘날 지구촌 어느 곳에서든 날마다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 국가 사이의 전쟁, 내전, 테러 등으로 지구촌은 유혈의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테러 위협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떤다. 테러 가능성 탓에 비행기 일정이 취소되고 은행과 대사관이 문을 닫기도 한다. 테러리즘은 어느덧 21세기 국제 정치의 화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모습이다.

지난 1월 7일 프랑스 시사 주간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 공격을 받아 편집장을 비롯해 12명이 숨진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경관과 민간인 합쳐 5명이 추가로 희생당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추모행렬에 동참한 사람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비난하면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목청 높이 외쳤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아쉬운 점이 있다. 테러를 맹렬히 비판하고 희생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위기에 눌려서일까, 왜 그런 비극적인 유혈사태가 벌어졌는지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기독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자 전 세계 인구의 25%쯤이 신자인 이슬람교를 모독한 행위는 과연 옳았던가.

기독교는 신성한 존재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 등 수많은 예술작품이 만들어졌다. 기독교에서 '형상을 입은 신'(인간이 된 신, 성육신)이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이 허용된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선 절대 금기로 여겨진다. 이슬람 문화권의 어느 예술작품도 신성한 종교적 존재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샤를리 에브도>처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슬람 종교의 금기를 깨뜨리고 무시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2001년 9.11 테러 뒤 미국의 공격으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직후 수도 카불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불의 호텔 구내서점에 들어가니 진열된 영어책들의 표지가 좀 이상했다. 표지에 나온 사람의 얼굴에 스티커가 붙여 가려져 있는 게 아닌가. 서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슬람종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얼굴을 스티커로 가렸다는 것이다.

'잘못된 일'을 '잘못된 방식'으로 대응

이슬람교의 기준으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예수의 얼굴처럼 함부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프랑스 시사 주간 <샤를리 에브도>는 그런 금기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선을 훌쩍 넘어선 도발적인 표현으로 무슬림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무함마드가 엉덩이를 드러내고 포르노 영화를 찍는듯한 모습을 만평으로 낸 것은 도를 넘어섰다고밖에 달리 보기 어렵다.

<샤를리 에브도> 편집진을 공격한 프랑스 무슬림 형제는 그들의 행위를 ‘정당한 응징’이라 여기고 극단적인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그들의 동기야 어떠하든 '테러'임에는 분명하다. 테러는 정치학사전에 따르면 '정치적 동기를 지닌 폭력'이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종교적 동기도 정치적 동기에 포함된다. 결국 <샤를리 에브도>의 비극은 '잘못된 일'(이슬람 신성모독)을 저지른 사람들을 '잘못된 방식'(극한 폭력)으로 대응한 사건이다.

파리행진에 나선 이스라엘 총리

1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 34개국 지도자들과 160만 명의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테러를 규탄하는 대규모 행진을 했다. 시위대는 "우리가 샤를리(테러를 당한 시사주간지)다"라고 쓴 손팻말과 언론과 표현 자유를 상징하는 펜을 흔들어댔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등이 팔짱을 끼고 함께 행진에 나섰다.

그런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그들과 함께 파리 행진에 나선 것은 매우 어색해 보인다. 이스라엘 강경파 지도자로서 그동안 숱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어온 이스라엘 국가테러 왕초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가 아니었던가. 파리 테러사건을 비판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외칠 자격이 그에겐 없다.

▲ 1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 반대 집회에 참석해 팔짱을 끼고 행진하는 각국 정상들. 왼쪽부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말리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도날드 투스크 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수반 ⓒAP=연합뉴스

네타냐후와 함께 파리 행진에 참여했던 이집트, 알제리,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의 친미 독재국가들 대표들도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고 질타했지만, 네타냐후가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샤를리 에브도> 참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프랑스 인구의 7.5%(460만 명)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을 차별하자는 정책을 내걸어온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속내를 감추고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다. 반무슬림 정책을 내걸어온 영국의 독립당, 독일의 페기다 등도 마찬가지로 이 참극을 호기 삼아 지지기반을 넓힐 태세이다.

정체성 고민하는 '유라비아' 무슬림들

현재 유럽 땅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통계에 따라 들쑥날쑥하지만, 유럽연합(EU) 인구의 5%가 이슬람교를 믿는 것으로 알려진다. 유럽의 무슬림들에게 유럽 땅은 '유라비아'(Eurabia)다. 몸만 유럽에 있을 뿐 의식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에서다. 많은 이들이 어릴 때 유럽으로 건너왔거나 유럽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스스로를 유럽 사회 구성원이라고 여기기는커녕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산다.

유럽의 무슬림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럽의 기독교 문화에 거부감을 품고 있다. 기독교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그들은 안방 TV 화면에 비치는 무슬림 형제들(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체첸 등)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그런 감정은 유럽 곳곳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과격 조직과 지하드(jihad, 성스런 전쟁)를 외치는 웹사이트를 통해 반미-반서구 감정으로 증폭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수전 손택, "함께 미련해지지 말자"
미국과 유럽의 언론들은 1.7 프랑스 테러를 2001년 9.11 테러에 견주며 날마다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발행부수가 6만 부였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500만 부를 찍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테러사건을 비난하고 죽은 이들을 동정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씁쓸하다. 테러사건의 결과만 강조될 뿐 동기는 가려져 버렸다.

2001년 9.11 테러 뒤 미국엔 애국주의 바람이 불었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그런 분위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들어갔다. 전쟁 반대의 목소리는 9.11테러를 비난하는 아우성에 묻혀 거의 들리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이라 할 수전 손택(2004년 작고)이 "9·11 테러 참사에 대해 함께 슬퍼하지만, 그렇다고 부시와 한통속으로 미련해지지는 말자"는 내용을 담은 글을 발표한 것은 용기 있는 지식인다운 행동이었다.

그녀는 주간지 <뉴요커>(New Yorker)에 기고한 글에서 9·11 테러 뒤 "부시 쪽의 전쟁 동원 캠페인은 대중을 어린이 취급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손택은 9·11 테러가, 부시가 주장하듯이, 문명이나 자유 또는 자유세계에 대한 '비겁한' 공격이 아니라, 특정 동맹국(이스라엘)과 관련한 특별한 행동(친이스라엘 정책) 때문에 자칭 초강대국인 미국이 당한 공격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테러의 동기 헤아려야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전쟁 이론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다른 (물리적) 수단들을 동원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으로 정의 내렸다. 테러도 마찬가지다. 테러라는 폭력적인 현상은 그 행위자들의 열정과 분노라는 정치적 동기에 비롯되었다. 미국의 테러 연구자 브루스 호프만은 "테러리즘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래부터 정치적"이라 정의했다.

하지만 테러 사건을 보도하는 서구의 언론들은 몇 명이 죽고 다쳤다는 끔찍한 사건 개요에만 집착할 뿐, 테러리스트의 좌절과 분노에 대해선 눈길을 두지 않는다. 테러 사건은 있지만 동기는 가려진 채다.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테러' 사건만 보도될 뿐, 21세기 깡패국가 이스라엘이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절망과 좌절감에 빠뜨린 사실에 대해선 눈을 감는다.

테러라는 이름의 정치적 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무엇이 테러리스트들로 하여금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었는가를 헤아리지 않으면 테러는 끝이 없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의 동기를 헤아려 문제점을 풀려 하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크다. 9.11비극을 슬퍼하되 바보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손택을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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