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승자는 자본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레시안 books] 도널드 서순 <사회주의 100년>

살다보면 간혹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6년 전 다름 아닌 이 '프레시안' 사이트에 실은 제프 일리,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유강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8)의 서평(바로 가기)에서 나는 이 책과 쌍을 이룰 만한 책 한 권을 언급한 적이 있다. 도널드 서순(Donald Sassoon)의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I.B.Tauris, 1996)라는 책이었다.

소개는 하면서도 이 책이 우리말로 옮겨지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영어본이 700여 쪽인 일리의 유럽 좌파사가 번역된 것만도 한국 출판 현실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한데 서순의 책은 그보다 더 두꺼워서 무려 1000여 쪽에 달했다. 더구나 일리의 책이 이미 나온 마당에 또 다른 유럽 좌파사의 국역본이 나오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이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서순의 책이 <사회주의 100년>(황소걸음, 2014년 8월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오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각각 1000여 쪽에 이르는 상권, 하권으로 나뉘어 그 두께나 가격 모두 상당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제 한국 독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이 명저를 읽을 수 있게 됐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일단 이런 '대사업', 그것도 품만 많이 들고 수익은 보잘것없을 게 빤한 일에 선뜻 나선 출판사에 감사의 인사부터 전해야 하겠다.

이미 'The Left'를 읽고도 <사회주의 100년>을 또 봐야 할 이유

ⓒ황소걸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놀랍고 또 반가운 김에 이를 SNS로 알렸다. 그러자 몇 분이 이렇게 물어왔다. "저 두꺼운 'The Left'를 어렵사리 사서 읽었는데, 서순의 책을 굳이 더 볼 필요가 있나?" 이에 대해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돈 안 될 책을 내준 출판사가 고마워서만은 아니었다. 이미 'The Left'를 읽고도 서순의 책을 또 봐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었다.

제목은 <사회주의 100년>이지만, 부제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듯이 이 책이 다루는 시공간은 한정돼 있다. 'The Left'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아니라 '유럽'의 사회주의 역사만을 다룬다. 아니, 동유럽까지 포괄하는 일리의 책과는 달리, 더 좁게 '서'유럽만을 다룬다. 시대도 'The Left'가 19세기 이후의 역사를 포괄하는 데 반해 이 책은 철저히 20세기에 집중한다. 그것도 그 전반부보다는 후반부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동시대사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는 것이다.

시공간 범위에서만 초점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국역본 부제에 잘 드러나듯이, 서순은 사회주의 운동의 여러 주체들 중에서도 '정당'에 관심을 집중한다.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 정당들의 이념·전략·정책과 이들이 현실의 악전고투 끝에 거둔 성공과 실패가 이 책의 중심 줄기를 이룬다.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들(학생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은 필요한 대목에서만 따로 부각해 다룬다. 서순은 "정당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한 나라의 역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며(상권 54쪽) 이런 접근법을 정당화한다. 이것 역시 다양한 형태의 좌파 조직들을 두루 다루는 일리의 책과 대조되는 점이다.

이렇듯 다루는 범위와 대상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유럽 사회주의 역사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사회주의 100년>보다는 'The Left' 쪽이 더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The Left'를 이미 접한 독자들에게는 <사회주의 100년>을 또 읽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일리가 소략하게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들의 이야기가 서순의 책에서는 훨씬 더 상세하고 깊이 있게 전개된다. '심화' 독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말 책들 중에는 이런 심화 독서 자료로 삼을 만한 게 거의 없다. 프랑스 좌파 철학자들의 저서는 많이 나와 있지만, 이들의 사유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알아야 할 프랑스 공산당이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운동의 역사는 영어 문헌을 뒤져야 확인할 수 있다. 그람시의 저서나 그에 대한 학술 연구서는 일부 번역돼 있지만, 그의 전략에 따라 50여 년간 권력을 넘보았던 이탈리아 공산당을 다룬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영국 노동당에 대해서는 고세훈의 <영국 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나남, 1999)라는 훌륭한 저작이 나와 있었으나, 이 책은 지금 절판 상태다.

다행히 최근 들어 몇몇 나라나 특정 시대의 좌파 정치사를 다룬 책들이 선보이고 있기는 하다. 당장 떠오르는 책만 언급해보자면, 어떤 영어 저작보다 더 풍부하게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전하는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2011)와 신정완의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임노동자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사회평론, 2012)가 있고, 1930년대 독일과 스웨덴의 좌파 정치를 비교 검토한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2010)이 있다. 최근에는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니크 브란달 외,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홍기빈 옮김, 책세상, 2014)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북유럽이 집중 소개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서유럽 중심부에 자리한 상대적 대국의 좌파 정치사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나 네덜란드, 벨기에처럼 북유럽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우리의 이목을 끄는 소국의 사례들 역시 미지의 영역이다. 1970년대 민주화 이후 좌파 정당이 현실 정치의 한 축으로 부상한 남유럽 국가들의 경우도 신문 단신으로나 정보의 갈증을 달래야 하는 처지다.

<사회주의 100년>은 이런 지적 상황에 시원한 숨통을 열어준다. 물론 어느 한 나라의 좌파 정당사만을 파헤치는 책은 아니지만, 그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각 나라의 주요 정당을 서술한 부분을 따로 떼어 읽으면 그것만으로도 해당 국가의 좌파 정치 약사(略史)가 된다. 프랑스 부분만 놓고 보면 프랑스 사회당-공산당의 역사이고, 독일을 다룬 대목만으로는 독일(서독) 사회민주당사가 되며,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 사회당사, 스웨덴 사회민주당사를 읽어낼 수 있다. 뒤늦게나마 유럽 좌파 정당들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길이 하나 열린 것이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방대한 역사 서술을 꿰뚫는 문제의식 - 혁명과 개혁의 문제

그런데 모처럼 열린 길을 통해 만나는 저들의 이야기는 이러저런 교과서들을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거대 서사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승리할 수도 있었던 혁명의 가능성이 정당·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끊임없이 배신당해온 이야기도 아니고, 공산주의와 벌인 경쟁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최후의 승리를 구가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역시 인간 세상은 그런 거대 서사의 틀에 담기에는 너무나 역동적이고 모순된 것이었다. 서순은 바로 이 점을 누구보다 솜씨 있게 드러내 보인다.

<사회주의 100년>은 단순히 방대한 분량과 박학풍만을 자랑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최대 미덕은 자칫 산만해질 수도 있는 거대한 역사 서술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꿰뚫는다는 데 있다. 서순이 뽑아든 그 문제의식은 오늘날도 자본주의 세계를 변혁하려는 이들에게 절실한 현안으로 다가오는 좌파 정치의 보편적 난제다. 다름 아니라 고전 사회주의에서 "운동의 장기적인 목표와 즉각적인 과제의 관계"(상권 91쪽) 혹은 "혁명과 개혁의 관계"라고 정식화했던 그 문제다.

이 문제를 도식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사회주의 운동이 내세운 궁극 목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었다. 지난 세기 벽두에 대다수 유럽 사회주의 정당의 표준 이념이 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극복이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에 따라 독일 사회민주당을 위시한 각국 사회주의 정당들은 '혁명'을 선전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이들 정당이 할 수 있었고 실제 주로 한 일은 이런 선전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선거에 뛰어들어 의원을 당선시키고 의회의 입법 및 예산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즉,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과는 거리가 먼 '개혁'을 추진했다.

강령 속 '혁명'과 일상 활동의 '개혁' 사이의 간극은 너무 컸다. 이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 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 집필자 칼 카우츠키가 제시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였다. 그 기본 얼개는 단계론이었다. 미래에 자본주의를 붕괴에 빠뜨릴 대위기가 닥치고 말 텐데, 혁명은 그때에야 당면 과제가 될 것이다, 지금은 개혁에 매진하면서 혁명의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이런 식이었다.

카우츠키라는 이름이야 이제 와서는 별반 권위를 지니지 못하지만, 이 도식만은 지금도 전 세계 좌파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서순도 지적하듯이 프랑스 공산당이 레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수십 년간 의회 정당으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카우츠키의 도식에 따라 '혁명'을 말하면서도 '개혁' 정당의 길을 충실히 간 것과 크게 다른 행태가 아니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한국 운동권의 수많은 변혁 이론들(이른바 '민주주의 혁명DR론'들)도 민주화 투쟁 단계와 사회주의 혁명 단계를 나누는 카우츠키주의의 변종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봉합 이상이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혁명'이 추상화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다른 한편에서는 '개혁'이 부차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순은 이런 봉합을 넘어서려던 시도들을 모두 '수정주의'라 부르며, 이것이 상반된 두 방향에서 전개됐다고 본다. 하나는 V. I. 레닌으로 대표되며 러시아 10월혁명으로 큰 흐름을 이룬 시도다. 즉,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선포하고 ('개혁'이 아닌) '혁명'을 당면 과제로 추구하는 것이다.

서순은 이 흐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일말의 미련도 보이지 않는다. 서유럽에서 혁명은 그 파고가 가장 높이 일었던 1차 대전 종전 직후에조차 초기 징후 이상으로 전개돼본 적이 없다. 당초에 혁명을 당면 과제로 내걸었던 공산당들,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인 프랑스 공산당이나 이탈리아 공산당은 자국에서 러시아식 혁명은 현실적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야 했다. 레닌식 수정주의는 서유럽에서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었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의 또 다른 수정주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단적 이론가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베른슈타인은 미래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일은 없으며, 따라서 이를 전제로 한 혁명 시나리오 역시 현실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즉, '혁명'이라는 궁극 목표는 허상이다. '개혁'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변혁 경로다. 이런 베른슈타인식 수정주의 덕분에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은 창당 당시의 이념적 짐을 벗어버리고 개혁 정당의 길을 당당히 걷게 됐다.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시작이다.

▲ 1919년, 10월혁명 2주년을 맞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모인 소비에트 지도자들. ⓒ위키미디어커먼스


개혁 노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을 찾아

그런데 서순은 레닌주의가 답이 아니니 곧 베른슈타인주의가 대안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하지는 않는다. 후자의 선택에도 그 나름의 근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개혁이 두 가지 조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순은 이렇게 지적한다.

"좌파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정치적 제약에 갇히고 말았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이라는 제약이었다." (상권 561쪽)

여기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란 대의 민주제의 게임의 룰이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란 기존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의 안정적 지속이다. 둘 중에서 서순이 더 주목하는 것은 후자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추진한 개혁은 대개 소득 재분배나 기본 생활 보장이었다. 이들 정책은 하나같이 기존 경제 체제에 의해 부의 확대 재생산이 원활히 이뤄지는 상황을 전제했다. 그래야 국가가 재분배나 사회 보장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런 역설이 등장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개혁 성과를 누적하면 할수록 이들은 애초에 자신이 극복하겠다고 한 자본주의가 붕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성장하길 바라게 된다.

"[이제-인용자]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본주의의 실행 가능성을 심각하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정의나 평등 같은 특정 가치를 촉진할 수 있는 규제의 틀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들의 수사법은 비자본주의 사회를 고대했지만, 그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 그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할 것이고 그럴수록 자본주의자들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리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었다." (하권 548쪽)

이에 따라 개혁적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이 애초에 내걸었던 가장 야심찬 약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극복이 현실의 목표에서 삭제되었다. 대신 자본주의에 규제의 고삐를 채워 '문명화'(하권 610쪽)하는 과업이 남았다. <사회주의 100년>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궤적이 이러한 적응의 기나긴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자본주의의 '규제'만 하더라도 결코 손쉬운 과업은 아니었다. 분명 부끄럽지 않은 성과였고, 나름 거대한 성취였다. 서순 역시 '에필로그'에서 미국 자본주의와 유럽 자본주의의 비교를 통해 유럽 좌파의 한 세기의 결산이 하찮은 게 아님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냉혹한 저자는 대차대조표에 심각한 의혹의 물음표를 덧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번영은 좁은 의미의 경제적 사안만은 아니다. 자본 소유 계급에게 축적이란 곧 권력의 신장을 뜻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 정당들이 자본주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자본 소유 계급의 권력은 더욱 확대된다는 것이다.

자본 소유 계급이 이 권력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이들은 이 힘을 무기로 사회주의 정당들이 개혁 성과라고 자부하는 바를 공격하고 회수하려 한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게 1970년대 이래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지구화'였다(나는 졸저 <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책세상, 2011]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려 했다).

이 상황을 맞이한 개혁적 사회주의 진영은 혼란에 휩싸였다. 일부는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잊었던 대의를 다시 끄집어내 자본 세력의 공세에 맞서려 했다. 영국 노동당 좌파의 '대안 경제 전략', 프랑스 좌파연합 정부의 은행 및 주요 제조업 국유화 그리고 스웨덴 노동운동이 추진한 임노동자기금이 그러한 시도들이었다. <사회주의 100년> 하권에서 쓰라리게 반복되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시도의 실패담이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 다수는 이런 궤도 이탈보다는 기성 행동 패턴을 반복하는 쪽을 택했다. 이들은 지구화와 금융화로 자본의 권력이 더욱 증대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상수(常數)로 바라보면서 새로운 타협점을 찾아보려 애썼다.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에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유행한 '제3의 길'이 이런 접근법의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협상을 하려는 자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빤하다. 서순은 이 역사적 궁지를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정리한다.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이것이다. 즉, 그들은 자본주의와 경제 성장, 그것이 줄 수 있는 번영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자가 필요하지 않다." (상권 30쪽)

"좌파의 전망은 암울하다. 좌파 정당들은 수세에 몰린 채 새로운 비전을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방어 전략은 일시적일 때만 통한다. 정치의 핵심은 이기는 것이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상권 32쪽)

▲ 안토니오 그람시. ⓒ위키미디어커먼스
그럼 이러한 개혁 노선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한 세기만에 도달한 현재 모습이 현실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인가?

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 역사적 시도들이 없지 않았다. 서순은 <사회주의 100년> 곳곳에서 그러한 사례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한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사회민주주의 국제 조직) 쪽이든 코민테른(20세기 초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쪽이든 정통 교리에 바탕을 둔 책으로는 접할 수 없는 이런 흐름과 조우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두꺼운 책을 감히 필독서로 권하는 또 다른 이유다.

서순이 주목하는 사례들 중에는 우선 혁명을 카우츠키식 도식에 따른 최종 목표나 러시아 10월혁명식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점진적 혁명'을 주창한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자 오토 바우어가 그 한 사례다(상권 179∼186쪽). 서순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도 이렇게 '과정으로서 혁명'을 구상한 것으로 재해석한다(상권 187∼200쪽).

다른 한편에는 베른슈타인주의의 통념을 넘어 권력 관계의 역전을 '개혁'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는 시도들이 있다. 영국 사회주의자 G. D. H. 콜은 '노동당 행동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비혁명적 상황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 발전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할 "헌법상의 혁명"을 제안한 바 있다(상권 167쪽).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브루노 크라이스키의 주도 아래 '영구적 개혁' 구상을 제시했다(상권 639쪽). 그 골자는 공공 부문 확대와 경제 민주화를 통해 자본-노동 간 세력 관계를 역전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람시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공산당과 사회당은 이와 비슷한 전략을 '구조 개혁'이라 칭했다(상권 540∼543쪽).

혁명 개념의 재검토에서 출발했든 개혁 과제의 재설정에서 시작했든 모두 다 혁명/개혁의 전통적 이분법이 강요하는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사회주의 정당의 일상 활동의 결과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 권력 관계의 지속이나 강화가 아니라 그 변형 혹은 역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고, 서유럽 역사상 가장 참신한 정책을 통해 이를 구현하려 한 것이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 방안이었다.

사실 저자 도널드 서순의 이력도 이런 서유럽 좌파 일부의 흐름과 깊이 연관돼 있다. 서순이 1981년에 낸 초기 대표작은 The Strategy of the Italian Communist Party: From the Resistance to the Historic Compromise(이탈리아 공산당의 전략: 레지스탕스로부터 역사적 타협까지)(Frances Pinter Ltd., 1981)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구조 개혁 전략을 영어권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몇 안 되는 저작 중 하나다. 국내에도 이 책 중 구조 개혁론을 직접 다룬 장이 두 차례 발췌 번역된 바 있다(정운영 편,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연구4: 프랑스, 이탈리아 편>[돌베개, 1989]과 황광우, <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거름, 1993]).

종결되지 않은, 아직 열려 있는 역사

한데 오히려 그래서일까. <사회주의 100년>은 후반부(국역본에서는 하권)로 갈수록 지나치게 실패와 좌절, 자조의 분위기에 짓눌린다. 어조는 착잡해지고, 논리는 단순해지며, 긴장 또한 떨어진다.

개혁의 한계와 딜레마를 넘어서려던 시도들이 1970∼1980년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초기 공세에 맞서다 모두 패배하고 만 이야기들 뒤에는 곧장 자본주의의 '규제'를 넘어서는 목표는 실현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의 결론으로 직행한다. 개별 국민국가 수준을 넘어선 유럽연합 차원의 구조 개혁 가능성을 넌지시 타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The Left'의 저자 일리가 서순의 이 책에 대해 꽤 비판적인 서평을 남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G. Eley, "Socialism by Any Other Name?: Illusions and Renewals in the History of the Western European Left", New Left Review, I/227, Jan/Feb 1998.)

어쩌면 서순 자신이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영국 좌파의 일원으로서, 영국 내 이탈리아 공산당통(通)으로서 <사회주의 100년>의 후반부가 다루는 시대를 뜨겁게 살았기에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이 한 시대가 종국에는 노동당 좌파의 패배와 이탈리아 공산당의 소멸로 끝나 버리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1990년대의 한가운데에 유럽 사회주의사를 탈고하며 좌파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그래도 미래는 우리 것" 찬가를 반복했더라면 그게 더 지탄받아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그만큼 지난 세기 말 좌파 정치의 패배의 골은 깊디깊은 것이었고, 그 직접 참여자일수록 이러한 패배의 그림자가 더 짙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패배로부터 미래의 교훈을 얻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겠지만, 패배가 다음 세대에까지 짐으로 이어질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 100년>의 결론은 어디까지나 1990년대의 어느 시점에 서유럽의 한 역사학자가 내린 잠정 결산일 뿐이다. 서순 자신이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흔히 현대사에서 결론이 난 것은 없으며, 어떤 결론도 뒷날로 미룰 수밖에 없다고 한다. (중략)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내키지 않더라도 미래를 전망해보는 일을 (중략) 할 때는 알려진 사실에 근거해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미심쩍은 확신마저 버려야 한다. 결국 이 작업은 서로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고, 어느 것도 확정적이지 않다. 그러는 사이에도 역사는 계속되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하권 587쪽)

다행스럽게도 이 책이 처음 출간되고 20여 년 가까이 지나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일들이 실제 벌어졌다. 서순은 국역본 첫머리에 실린 '2014년판 서문'에서 여전히 회색빛 전망을 견지하지만, 저자의 판단에는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중대한 사건들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가령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그리스에서 유럽 공산주의 전통을 이은 급진좌파연합(SYRIZA)이 30여 년 전의 구조 개혁 좌파들과 비슷한 전망을 내걸고 차기 집권 유망 주자로 부상한 것을 보라. 마찬가지 상황에 놓인 스페인에서 새로운 형태의 청년 운동('분노한 자들 운동')에 힘입은 포데모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라는 신진 좌파 정치 조직이 기성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지율을 앞선 것은 또 어떠한가. 서순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적으면서 염두에 뒀을 법한 사건들 아닌가.

이 사건들의 전개 여하에 따라 후세대는 <사회주의 100년>의 후반부를 전면적으로 새로 써야 할지 모른다. 사회주의의 역사는, 서순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서유럽만 놓고 봐도, 아직 종결된 게 아니다. 따라서 결론도 여전히 열려 있다.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기만 한다면, <사회주의 100년>의 정독은 분명 현대 좌파 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다만 번역에 대해 약간 토를 달아야겠다. 전반적으로는 읽는 데 별 무리 없는 괜찮은 번역이다. 그런데 영어권 정치 용어나 좌파 특유의 표현을 어색하게 옮긴 대목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게 좀 걸린다.

예를 들면, 상권 606쪽에서 영국 노동당이 발표한 '주택' 정책 성명서라고 되어 있는 것은 '국내' 정책 성명서라고 하는 게 맞다. 영국의 정당들이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을 나누면서 전자를 흔히 home policy라고 하는 것을 잘못 옮긴 사례다.

하권 108쪽에서 벨기에 사회당의 'new realism' 노선을 '신사실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어색하다. 정치 용어로서는 '신현실주의'가 더 자연스럽다. 하권 120쪽에서 영국 노동당의 National Executive Committee를 '국가'집행위원회라고 한 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전국'집행위원회라고 해야 이것이 당 내 집행 기구임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

하권 246쪽에서는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의 좌파 후보들 중 한 명인 피에르 쥐켕을 '반체제' 공산주의자라고 소개했는데, 이것은 'dissident' communist의 어색한 번역이다. 만약 현실사회주의 국가라면 '반체제' 공산주의자가 어울릴 수 있겠지만, 프랑스의 맥락에서는 공산당 내 반대파를 뜻하는 것이므로 '반당파' 혹은 '탈당파'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런 식의 아쉬운 대목들이 꽤 있다. 다시 번역될 일은 없을 대작의 소중한 번역 결과물이기에 아쉬움이 더욱 도드라진다. 번역 원고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감수 작업이 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일단 출간된 뒤라도 정오표를 만들어 독자에게 제공한다면, 이를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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