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마지막과 김정은의 시작, 러시아

[정욱식 칼럼] 북한-러시아 '신밀월시대'(상)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했던가? 최근 들어 밀착되고 있는 북한과 러시아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북한은 1990년 이후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91년 한국-소련 수교였다. 러시아 역시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면서 유럽에서 떠밀려나고 있다. 그러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동쪽을 보자'(Look East)며, 동방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서방 세계로부터의 외교적 고립과 경제제재라는 '이중고'에 직면하자, 상호간의 협력 강화로 이를 돌파하려는 것이다.

이 와중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특사 카드를 꺼냈다. 오늘(17일)부터 일주일 동안 북한의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러시아 방문길에 나서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최룡해가 김정은식 특사 외교의 핵심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그는 2013년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5월 중국을 방문했고, 이번에는 러시아 방문에 나섰다. 올해 10월 초에는 황병서, 김양건과 함께 인천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2년 군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면서 김정은 체제의 핵심 실세로 거론되었던 최룡해는 작년에 총정치국장 자리를 황병서에게 내주면서 '실각설', '와병설' 등 온갖 소문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이번 특사 방문으로 적어도 김정은 체제의 대외 전략의 핵심 인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하는 최룡해 조선노동당 당 비서가 17일 평양공항에서 김기남 당 비서와 악수하며 배웅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김정일의 마지막과 김정은의 처음은 러시아?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이어지는 최룡해의 동선에서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이다. 정확한 일정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최룡해는 푸틴을 만나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할 것이 확실시된다. 아마도 김정은-푸틴의 정상회담 조율이 최대 의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두 나라는 2000년 이후 정상외교를 가장 활발하게 전개해왔다. 2000년 7월에는 푸틴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2001년 8월에는 거꾸로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을 만났었다. 북핵 문제로 인해 양국간의 교류협력은 주춤하는 듯했지만, 2011년 8월 김정일의 모스크바 방문 및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빠르게 회복됐다.

김정은 시대가 안착되면서 이러한 추세에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 북한은 소치 동계올림픽 참가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2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소치를 방문해 푸틴을 만났다. 그 직후엔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양국 관계 및 6자회담 재개 방안을 집중 협의했다. 10월에는 리수용 외무상이 모스크바와 극동 4개 도시를 열흘간 순방했고, 뒤이어 최룡해가 순방길에 올랐다. 그만큼 김정은 체제의 대러 관계 강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대러 행보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고(故) 김정일의 마지막 정상회담 상대가 러시아 대통령이었다면, 김정은의 첫 정상회담 상대도 러시아 대통령이 될 공산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외교 무대 데뷔를 타진 중인 것으로 보이는 김정은으로서는 푸틴을 적임자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련 붕괴 이후 가장 좋고 관계를 발전시켜야 할 정치외교적, 경제적 이유가 분명해지고 있으며, 푸틴이 대국의 지도자인 만큼 자신의 위상과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푸틴도 김정은과의 만남을 호의적으로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1991년 한소 수교 이후 대북 관계의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푸틴이었다. 2000년 7월에는 평양을 방문했고 2001년 8월에는 김정일을 초청해 각각 '평양 선언'과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하면서 북·러 관계 회복의 디딤돌을 놓았던 것이다.

최근 '동방정책'을 천명한 푸틴으로서도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이 유용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북러 정상회담이 러시아의 동방정책이 중국 쪽으로 과도하게 쏠리는 것을 완화시켜 줄 수 있고, 북핵 문제에 대한 개입력을 높여 미·러 관계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고 간주할 것이며, 대북 투자 강화를 통해 극동 개발 프로젝트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는 2000년대 이후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추구하고 있고, 작년에 푸틴이 서울을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만큼, 북한과의 정상회담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무르익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모스크바와 평양의 분위기가 전례 없이 좋아졌다는 러시아 전문가의 진단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인 게오르기 톨로야라 러시아 사회과학원 한반도 프로그램 소장은 러시아 내에서 친북파들이 재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근 <38노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 러시아의 대서방 관계의 악화로 "북한에 우호적인 공산주의자 및 국가주의자들이 러시아 정치의 주류에 다가서고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의 서방에 대한 반감과 북한에 대한 이해가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평양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을 만나본 결과, 북한 내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호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경제제재 약발 더욱 떨어질 듯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이 성사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최근 양국 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 글에서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북·러 관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경제협력이다. 그러나 북·러 관계 밀월은 경제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었던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병합한 것을 지지한 극소수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 역시 올해 한미합동군사훈련과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내 배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해 주목을 끈 바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유의해야 할 점들이 생긴다. 나진-핫산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북러 경제협력이 강화되면, 남한의 독자적인 대북 제재인 5.24 조치의 모순도 커진다. 박근혜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5.24 조치의 예외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 시작 단계인 북·러 경협이 본 궤도에 올라서면 대북 경제제재의 약발은 더더욱 떨어질 공산이 크다. 거꾸로 박근혜 정부가 북한 위협을 이유로 미국 및 일본과 미사일방어체제(MD) 협력을 강화하면 대러 관계의 악화도 수반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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