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로운 가족사진'과 같은 '60만번의 트라이'

[기고] 소통의 필요 이후 도래하는 공통의 언어

지금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등진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서양인 눈에 왜곡되게 비친 동양 담론, 즉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동시에 음악 분야에도 정통한 식견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은 사회적이다>(Musical Elaborations, 1991)에서 음악 듣기를 가족사진에 비유한 바 있다. "음악 듣기는 애처로운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음악 듣기와 가족사진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서는 '애처로움'의 감각이 중요해 보인다. 다시 말해 "애처로운 가족사진"에서의 애처로움 말이다. 가족사진 앞에 기어이 따라붙은,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애처로움의 정념은 우리에게 그다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다.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한국 근현대사를 염두에 둔다면,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앞에 애처로운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드문 일이지 않을까. 혹은 그 변변치 않은 가족사진조차 걸려 있지 않은, 걸 수 없는 가정은 또 얼마나 허다할 것인가.

▲ <60만번의 트라이>는 60만 재일 동포들의 꿈을 안고 전국 제패에 나선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럭비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디스토리
일본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럭비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60만번의 트라이>를 보면서 '애처로운 가족사진' 비유가 자연발생적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왜 애처로운 것일까. 애처로움의 이유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진, 혹은 잃어버렸던 사진이 그리고 그 사진을 담은 편지가 뒤늦게 도착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려 6~70여년이나 늦게 말이다.

1945년 기습적으로 도둑과 같이 찾아온 해방 이후, 이러저러한 연유로 조선 반도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에 남아 있어야 했던 잊힌 '가족'이 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을 '재일조선인'이라 부른다. '조선'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조선'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으니까. 때문에 만약 그들에게 거리낌 없이 "왜 당신은 '재일한국인'이 아닙니까?"라고 묻는 행위는 무례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근거가 빈약하다. 영화에는 한 남한 선수가 친선경기를 하며 조선학교 선수에게 "아임 오리지널 코리안. 유 아 낫"(I'm a original korean. you're not)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시 말해 '원조'는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다. 하지만 2006년 김명준 감독의 <우리 학교>(=첫 번째 '가족사진') 덕분에 비로소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이 땅에 대중적으로 환기되기까지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투명인간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 <60만번의 트라이>(=두 번째 '가족사진')가 현해탄을 넘어 한국 땅에 도착, 다시 한 번 이곳의 강고한 국민주의의 문(門)을 두드리고 있다.

<60만번의 트라이>는 유쾌하다

무엇보다 <60만번의 트라이>는 유쾌한 영화다. 그리고 재미있는 영화다. '재일조선인'이 어쩔 수 없이 자리하고 있는 엄중한 정치적·사회적·역사적 문맥으로 이 영화가 으레 무겁고 진지할 것이라 예상하기 쉽지만, <60만번의 트라이>는 보기 좋게 배반한다. 무엇보다 오사카 조선학교 럭비부 학생들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영화 홍보 차 한국을 방문한 프롭 '상현'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그 밖에도 센터백 '유인', 주장 '관태'와 매니저 '옥희' 등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많다. 관객들은 필시 영화 속 럭비부 학생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영화 밖, 즉 현실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게 될 것이다.

<60만번의 트라이>를 심각한 영화하고 예상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심각함 속에서도 일상의 세세한 결은 존재하는 법이다. 밀양의 촌로들과 송전탑 투쟁을 오랜 기간 함께한 이계삼 선생(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이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런 지난한 다툼의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들과 어울려 농담도 주고받고 막걸리도 나누어 마시며 웃고 떠드는 시간도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미류 씨의 표현을 빌면, "투사의 각오로 버티는 시간"이나 "피해자의 눈물로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고, "각오가 눈물이 되었다가 눈물이 다시 각오가 되는, 살아있는 시간"(<밀양을 살다>(오월의봄 펴냄) 중 '밀양으로 초대합니다')이다.

오사카 조선학교 역시 2014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랜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 당국의 '고교 무상화' 지원 대상에서 유일하게 제외된 것은 물론, 매년 집행되던 보조금 지급까지 끊겨 조선학교의 난감한 처지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오사카 조선학교의 시간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 땅의 '아픈 청춘'과 달리, 오사카의 '웃자란 청춘'은 처음 본 여학생에게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달라는 얼토당토 않는 영상편지를 남기기도 한다. 또 되도 않는 몸 개그를 수시로 선보인다. 그렇게 그들은 유쾌하고 발랄하게, 그들 나름의 오사카 조선학교의 시간을 살고, 살아내고 있다.

'보통 사람의 윤리'를 택한 다큐멘터리

<60만번의 트라이>의 박사유·박돈사 두 공동감독은 영화 작업을 예술적, 작가주의적 프레임으로만 다루는데 있어 일부러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만 같다. 두 사람은 그저 '기록자' 혹은 '관찰자'로 낮은 자리에 충실할 뿐이다. 근대 낭만주의 미학에서 비롯된 '창조자'로서의 특권적인 예술가 의식은 그들과 거리가 먼 것이다.

박돈사 감독은 자신의 작업을 "동네 마을 사진관" 정도의 역할에 빗대기도 한다. 1년에 한번 열리는 조선학교 축구대회에 카메라를 들고 가 촬영하고 편집해 DVD로 제작한 뒤, 선수의 부모에게 기념으로 나눠준다. '작품'이라기보다 '기록물'이라는 인식이다.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집단이 아니다. 동포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이쪽(한국 사회)에 전해주고 싶은 마음 하나로 활동을 시작했다. (...) 작은 목소리, 낮은 시선이 우리의 모토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나 영화를 찍고 있는 '작가'(作家)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영화가 담고 있는 사람들, 즉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이다.

▲ 지난 18일 국내에서 개봉한 <60만번의 트라이>는 1주일 만에 관객 1만 명을 돌파, 올해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의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인디스토리

카메라는 종종 흔들리고 피사체를 벗어난다. 포커스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감독의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손 떨림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60만번의 트라이>에서 카메라는 대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의 원칙을 굳이 지키지 않는다. 주장 ' 관태'가 무릎 인대를 다쳐 그라운드에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누워 있을 때 박사유 감독은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덮어준다. 원칙을 깬 이유가 뭘까. 박사유 감독은 "아직 초겨울인데 바깥의 날씨가 쌀쌀하지 않습니까"라고 흔들림 없이 말한다.

팀의 에이스 '유인'이 뇌진탕 판정을 받아 남은 경기에 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극도로 동요한다. 박사유 감독의 울음 또한 격심해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를 알아챈 눈 밝은 유인은 자신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박사유 감독에게 다가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코트를 벗어주고 간다. 다시 말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감독, 카메라가 담고 있는 유인, 그 어느 누구도 카메라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서성대지 않는다. <60만번의 트라이>는 '다큐멘터리의 윤리' 대신 '보통 사람의 윤리'를 택한 것이다.

재일조선인과 재한조선인 간 '공통의 언어'가 되다

<60만번의 트라이> 한국 상영본에는 자막이 있다. 한국 관객들에게 재일조선인의 표현 및 발성이 어색하거나 생소하게 들리는 것을 배려한 차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어와 조선어라는 '이중 언어'에 처한 재일조선인의 언어 문화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의 말을 유심히 들어보면, 조선어와 일본어가 한 문장 안에서조차 무시로 섞여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지난 7월 2박 3일의 일정으로, 히로시마와 시코쿠 조선학교의 재일조선인을 만났는데 그 때 받은 인상이 있다. 대다수의 동포들이 한국 방문단에게 '아무래도 우리의 조선말이 많이 부족하지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눈치였다. 역사의 부조리랄까? 그런 착잡함과 먹먹함을 당시에 느꼈다.

과거 일제 식민시대를 경험하며 이중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된 그들이, 다시 말해 피해자들이 한국에서 온 나에게 도리어 '미안하다' 말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 때 '듣는 자의 몫'에 대해 생각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듣는 자의 책임, 즉 '응답 가능성'(responsibility)의 문제'를 '차이'(difference)나 '차별'(discrimination)에 따른 미숙함이 아니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박사유(왼쪽), 박사동(오른쪽) 감독. ⓒ인디스토리
박사유, 박돈사 두 공동감독과 '관객과의 대화'(GV)가 예정되어 있던 날, <60만번의 트라이>를 두 번째 보면서 의식적으로 자막을 보지 않는 '불편함'을 택했다. 그리고 2시간여의 러닝 타임 동안 동포들과 희미한, 그렇지만 분명한 '우정'(amitié)의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아픔의 감각'인 동시에 '황홀한 아픔'이었다.

GV 전, 특히 박돈사 감독과의 만남을 내심 기대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몇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박돈사 감독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으로 삼분된 자신의 복수적 정체성, 한 마디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재일동포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종종 조국에 대한 귀속 의식으로 환원하는 논의가 있지만 그건 표층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지역사회와 학교를 통해 재일사회에 뿌리 내림으로써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조선학교 생활을 통해 축적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이 바로 그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 '조국에 대한 귀속 의식'으로 단일하게 환원되거나 '아임 오리지널 코리안. 유 아 낫'과 같은 은밀한 국민주의적 배제의 논법이 아니라, 자신의 복수(複數)적 위치성 덕분에 재일조선인이 남한·북한·일본의 단절된 고리를 이어줄 수 있는 긍정과 충만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희망의 메시지인 셈이다.

조선학교가 아닌 일본학교 출신인 박돈사 감독과 GV에서 나눈 대화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대한민국 국적의 서울 거주자인 내가 대한민국 국적의 일본 거주자인 박돈사 감독과 통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화했기 때문이다. 박사유 감독은 이 날 <60만번의 트라이> 감독이자 통역자로 자리했다.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가 같아서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언어가 다름에도 소통해야 할 관계가 먼저 존재했기에, 대화했다. 이 양자의 차이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물론 소통의 과정은 다소 어렵고 불편했다.

언젠가 재일조선인 서경식 선생이 김상봉 전남대 교수와의 대담 때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단지 소통이 잘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소통해야 하면 어려워도 소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순서는 '공통의 언어가 있고 그 바탕에서 소통하게 된다'가 아니라, '소통의 필요가 있고 그로부터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져간다'가 되어야 합니다."

'소통의 필요' 다음에 도래하는 '공통의 언어'라. 과연 '우리'는 공통의 언어를 함께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때가 온다면, 과연 언제일까. 하릴없는 질문을 속 깊이 간직한 채 GV를 마쳤다.

소통의 필요는 역설적으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의 차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소통에 대한 요구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엇보다 이 차이의 자각 및 인정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60만번의 트라이>가 빛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학교> 이후 찾아온 영화는 명민하게도, 어쩌면 우리가 확인하고 싶지 않아 하는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에 내재한 차이 또한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조선학교 재학생들이 초·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이후 일본 학교로 가 삶의 터전이 바뀐 친구의 집을 방문하며,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캠프에 초대하는 장면이 있다. 늦은 밤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옛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 카메라는 한 학생의 자전거 뒷자리에서 오사카 시내의 야경을 훑는다. 영화적 운율이라고 할 수 있는 리듬감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조선학교 학생이 옛 친구에게 묻는다. "캠프에 오지 않을래?" 일본학교에 다니는 조선인이자, 어린 시절 친구는 답한다. "갈 수가 없겠네. 거짓말이 아니고 그 날은 진짜 학원에서 일정이 잡혀 있어." 그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여야만 했다. 조선학교 캠프 일정과 학원 일정이 겹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일본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내가 지금 조선학교 캠프에 참석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는 의사를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 서로의 차이가 단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다른 위치와 입장을 하나씩 배우며 이해해가는 중일 것이다.

'<60만번의 트라이> 이후'를 기다리며

지난 18일 <60만번의 트라이>가 개봉한 첫 날, 영화를 보고 나온 뒤 모인 자리에서 여행 차 한국에 방문한 재일조선인 여성 S는 자신은 중급학교까지만 조선학교에 다녔노라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영화 속 캠프 초대 장면과 같은 일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캠프 초대와 관련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았다.

고급학교 과정을 일본학교로 옮기기로 했을 때 자신에게 쏟아졌던 부정적 반응, '반쪽바리가 되었네' 운운하는 폭력적인 언사에 대해. 일본학교로 전학을 간 S는 그러나 예외적이게도 자신의 조선 이름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조선학교에 있을 때도, 그리고 일본학교로 옮겼을 때도 '외부자'라는 자리에서 고독했을지 모른다. 일본 방송국에서 현재 피디로 일하고 있는 그는 경험이 쌓이면 재일조선인 문제와 관련한 다큐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이들 모두 '<60만번의 트라이> 이후'에 찾아올 영화를 기분 좋게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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