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높았던 기온이 밤이 되자 뚝 떨어졌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경찰 무전기 소리가 차가운 시골 공기에 뒤엉켰다. 논·밭을 양옆에 둔 좁다란 시멘트 길 위로, 경찰 버스 수십 대가 쉼 없이 오갔다. 송전탑 반대 농성장이 있는 다섯 마을로는 진작에 외부인 통행이 차단된 상황. 떨칠 수 없는 긴장감을 달래려 70·80대 노인들이 이리 걷고 저리 걷는다. 그렇게도 원치 않았던 '전야'가 오고 말았다.
송전탑 반대 주민 대부분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이들과 함께한 다섯 움막을 지킨 수녀와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라도 자볼까 자리를 펴고 누웠던 '할매'들도 얼마 못 가 잠자기를 포기하고 허리를 곧추 세웠다. 전기가 아예 없었던 단장면 용회마을 승학산 정상의 움막(765킬로볼트 101호 예정 부지)은 몇 시간을 암흑 속에서 불을 피우며 버텼다. 경찰 눈을 피해 타지에서 온 시민들이 산발적으로 컴컴한 산길을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예고된 행정 대집행 시각보다 약 2시간 이른 11일 오전 4시 15분께. 부북면 평밭마을 움막(129호)에서 아래를 향해 보니, 텅 비어 있던 산 아래 도로 위로 자동차 불빛이 꼬리를 물며 이동하고 있다. 누군가 '경찰 버스다. 온다 온다!'고 외치면서 순식간에 움막 안팎이 분주해졌다. 카스텔라와 500밀리리터 흰 우유로 아침을 대신한 후, 할머니들이 움막 옆에 파놓은 깊이 2.5미터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목에 쇠사슬을 걸었다. 그 주변을 수녀 30여 명이 둘러싸고 기도하고 노래 불렀다.
"129호 끝났대요" 소리에 127호 할머니들 오열
잠시 후, 해가 떴다. 부북면 위양마을 움막(127호)에선 수녀와 신부들도 아예 주민들 사이사이에 앉아 허리춤에 쇠사슬을 함께 둘렀다. 경찰 수백 명이 산 아래에서부터 걸어 올라오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가 속속 전해진다. 대학생들이 127호 움막 마당에 연좌해 1차 저지선을 만들었다. 그 뒤로 젊은이 3명이 마당과 움막을 연결하는 좁은 나무다리 위에 앉아 2차 저지선을 만든다. 남은 시민들 30여 명은 움막 입구에 앉아 안에 있는 할머니들을 지키기로 했다.
경찰이 127·129호 움막 진입로인 장동마을 입구 농성 인원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 주민들은 분뇨를 뿌리며 강하게 저항했지만 '작정'하고 덤벼드는 경찰들에겐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위양마을 이장 부인인 박순연 할머니를 연행하며 오전 6시께에 이곳 진입로를 확보, 6시 30분엔 129호 부지인 평맡마을 꼭대기로 올라왔다. 수녀들이 할머니들이 들어간 구덩이 입구에 드러누웠으나 경찰은 이들을 하나씩 끌어냈다. 사지가 들린 수녀들이 비명을 지르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주저앉아 소리 내 울었다.
한옥순(67) 할머니 등은 옷을 벗어 저항했다. 그러나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옷만 입은 한 씨를 여경과 함께 남자 경찰 여럿이 들어 구덩이 밖으로 끌어올렸다. 127호 움막 안 할머니들은 129호 쪽 산기슭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129호 끝났대요"란 얘길 듣자 손희경 할머니가 "억울해서 못 살아"라며 쇠사슬을 붙들고 오열했다. 127호 움막이 눈물바다가 됐다. 전기를 아껴야 한다며 해가 뜬 후엔 움막에 불을 켜지 않았던 터라, 움막 속은 어두침침했다. 이제 곧 127호 차례다.
경찰, 날카로운 칼·펜치 사용…마친 후엔 "고생했어" 격려도
경찰은 10분의 휴식을 취한 후 129호에서 127호 움막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모두가 깨달았다. 경찰과 밀양시는 천천히 할 생각이 없다.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다. 모든 "작전"을 오늘(10일) 중에 끝낼 작정인 게 분명해 보였다. '내일은 없다'는 생각에 70~80대 노인들이 '결전'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다.
경찰이 127호 움막에 도착한 건 오전 8시 45분께. 노란색 옷과 하얀색 안전모자를 갖춘 시청 직원들과 한 무리를 이룬 이들은, 산기슭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걸어 올라왔다. 박훈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변호사가 아래 쪽을 향해 "나는 127호를 대리하는 변호사다. 경찰에겐 철거 권한이 없으니 물러가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다.
움막 마당에 도착한 한전 직원은 여유를 두지 않고 곧바로 계고장을 읽어 내려갔다. 곧바로 "다 끌어내"란 소리가 들렸고 1차 저지선을 만들었던 대학생들이 순식간에 비명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무다리 위에서 온몸으로 버티던 이들도 얼마 못 가 끌려 나왔고 경찰은 움막을 한바퀴 둘러싸고 날카로운 칼과 펜치를 이용해 비닐 벽을 찢으며 안쪽으로 빠르게 진입해 들어왔다.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움막 안에서, 할머니와 수녀들은 처음엔 "하나둘 하나둘"을 침착하게 외쳤다.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조차 얼마 못 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벽을 뚫고 들어온 펜치 끝이 할머니들의 목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김제남 정의당 의원과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 등 함께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르르 떠는 할머니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9시 10분께. 모든 이들이 끌려 나왔다. 탈진한 손 할머니가 시선을 잃고 사지가 붙들린 채 끌려 나올 때, 그 옆에 서 있던 여경들은 "고생했어"라며 서로의 어깨를 웃으며 두들기고 있었다. 구덩이 안에 있던 이계삼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호흡이 가빠진 할머니를 흙바닥에 앉아 처량하게 끌어안고 '들것'을 목놓아 외친다. 이제 115번 차례다.
멍하게 지켜보는 인권위, 빈정대고 기념사진 찍는 경찰
상동면 고답마을의 115번 움막과 단장면 용회마을 뒤 101번 움막에서도 경찰이 비슷한 방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전 직원이 형식적으로 계고장을 읽으면 경찰이 수백 명이 곧바로 움막을 둘러싼다. 밖을 지키는 시민들을 하나씩 들어냄과 동시에 날카로운 연장을 이용해 움막을 부스며 안으로 진입한다. 주민들 몸에 묶인 쇠사슬과 밧줄을 끊어내고 사지를 들어올린다. 그러고 나면 곧바로 한전 직원 및 밀양시청 직원이 경찰 자리를 물려받아 움막 뼈대를 철거한다. 경찰은 밖으로 끌려나온 주민들을 10명 안팎으로 쪼개 그의 몇 배에 달하는 인원으로 둘러싸 고착시킨다.
밀양으로 급파된 민변 변호사 12명은 무력감을 토로했다. 박다혜 변호사(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비서)는 "변호사들이 현장에서 의뢰인과의 접견을 요청하면 경찰은 통행을 열어줘야 하지만 접견교통권을 경찰이 완전히 박탈한 상황"이라며 "이 부분에 대해선 추후에 반드시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침해를 예방 및 감시하겠다며 파견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지킴이단 13명은 "눈 뜨고 폭력 상황을 지켜만 봤다"는 항의를 들었다. 이날 오후에 있었던 115번, 101번 움막 철거 때는 송동관 인권위 조사관 등 일부가 호루라기를 부르며 과도한 경찰 폭력에 몸으로 항의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대체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서성이거나, 끌려 나와 오열하는 주민들에게 마실 물을 갖다 주는 정도를 할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경찰은 웃고, 조롱하고, 서로만을 보호했다. "이놈들아 나를 죽여라"라며 울부짖는 할머니들을 앞에 두고 '피식'하며 웃는 경찰이 줄지어서 목격됐다. 127번 현장에선 이계삼 사무국장이 "할머니가 숨이 가쁘다. 들것을 달라"고 소리치자 경찰 무리 속에서 "나도 숨이 가쁘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101번 움막 위에 올라있던 조성제 천주교 부산교구 신부가 경찰 서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을 때는, 경찰들은 다리를 흔들며 "세상 좋아졌네"라고 빈정거리며 웃었다.
전쟁 같은 철거 상황이 끝나고, 경찰 한무리가 브이(v) 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때는 부상자들이 하나씩 헬기에 실려 수송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경찰은 기자들이 소속과 이름을 물어도 신분증을 꺼내 보이기는커녕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고 주변 경찰이 곧바로 길을 막아 동료를 보호하는 일이 반복됐다. 현장에 있던 기자 상당수가 "왜 못 보게 하느냐", "몸에 손대지 말아라"며 취재 방해에 항의하다 끌려 나오는 일도 반복됐다. 주민과 경찰 20여 명이 다쳤고 3명이 연행됐다. 행정 및 공무집행이라기보단 '소탕 작전'에 가까운 인상을 풍겼다.
이날 오후 5시 30분께 행정대집행은 모두 완료됐다. 문제의 송전탑으로 실어나를 전기를 생산할 부산 신고리 핵 발전소 3,4호기는 품질서류 위조와 성능시험 불합격으로 준공이 무기한 연기돼있다. "급히 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며 "대화로 문제를 풀자"고 했던 주민들의 간곡한 바람은 그래서 행정대집행 전이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11일 저녁, 그럼에도 10시간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밀양의 하늘 위로 헬기가 건설 자재를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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