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남’과 ‘북’이 단순히 방위나 지리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19세기의 브리튼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에서 ‘남’과 ‘북’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전혀 다른 생각 속에 살아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뜻한다. 단순화하자면, ‘남’은 지주와 소작동이 살아가는 시골농경 지역, ‘북’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살아가는 도시공업 지역이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각각 봉건적 생산생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나는 전혀 편협한 취향이 아니에요”
“고먼 집안이면 사우샘프턴에서 장사해서 돈 번 사람들이잖아요? 와! 우리 집이 그런 집과 왕래하지 않고 지내니 다행이네요. 나는 장사꾼들이 싫어요.” (…)
“아니에요, 나는 전혀 편협한 취향이 아니에요. 땅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좋고, 군인이나 뱃사람도 좋고, 소위 삼대 전문직도 좋은 걸요. 나한테 소 잡아 팔고 빵 구워 팔고 촛대 만들어 파는 남자를 흠모하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엄마?” (…)
“마차제조업이 장사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도축업이나 제빵업과 비교하면 훨씬 무익한 장사인 것 같아요. 날마다 쇼어 이모의 마차를 타고 다니던 때는 얼마나 지루했었는지 몰라요. 얼마나 걷고 싶었다고요.” (2장)
남주 존 손턴은 ‘북’의 방직공장 사장이다. ‘남’의 눈으로 보면 손턴은 일개 장사치일 뿐이지만, ‘북’의 계산기를 두드려보자면 마가렛 양도 그리 바람직한 신붓감은 아니다. 물론 존 손턴은 남주답게 자기를 하찮게 대하는 여주에게 반해주시지만, 존 손턴의 엄마 말이 틀린 데는 없다.
“땡전 한 푼 없는 처자한테 낚이지 않도록 잘 해라, 존.” (…)
“우리 밀턴 처자들은 기가 쎄고 생각이 똑바로 박혀서 남편 낚는 낚시질은 안 하지만, 헤일 양이라는 이 처자는 귀족들이 사는 지방 출신인데, 듣자하니, 거기서는 돈 많은 남편을 전리품 취급 한다지 않니.” (9장)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갈등과 고통을 목격하고 아파하는 마가렛과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하한 손턴이 어떻게 사랑에 이를 수 있을까? 과연 그 전향이 사회통합의 비전이 될 만한 설득력을 얻게 될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로맨스 취향과 사회적 고민의 경계가 흐려져 버린다.
본격적인 드라마는 ‘남’의 레이디인 마가렛이 ‘북’의 도시 밀턴으로 난데없이 이사 오는 데서 시작한다. (BBC드라마의 오프닝은 과연 밀턴 행 기차의 조감쇼트였다). 마가렛이 본 밀턴의 첫 인상은 물론 최악이다. 떠나온 고향의 목가적인 자연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가히 지옥의 풍경이다.
밀턴을 수 마일 앞둔 지점부터 밀턴 방향의 지평선에는 짙은 납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 시내가 가까워질수록 공기에서 희미하게 탄 맛과 탄 냄새가 났다. (…) 공장들은 (…) ‘의회의 견해와는 다른’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면서, 마가렛이 비를 예고하는 먹구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7장)
“나는 이 단어를 오늘날의 유행어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밀턴에 온 후로, 마가렛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연동되는 반봉건적 가치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신분적 편견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손턴과의 부딪힘도 그 변화에 일조한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누군가가 도마 위에 오른 상황에서, 마가렛은 “그런 사람이 gentleman일리는 없겠지요?”라며 손턴의 예민한 곳을 슬쩍 건드린다. 발끈한 손턴은 “당신이 그 단어를 무슨 의미로 쓰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라면 이 모리슨이라는 자가 제대로 된 man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뒤틀린 심사를 내보인다. 마가렛이 “내가 말하는 ‘gentleman’에 당신이 말하는 ‘제대로 된 man’이 아무래도 포함될 것 같은데요”라는 말로 신분 기반 인간관을 과시하자, 손턴은 “내 생각은 당신 생각과는 다릅니다. 내가 생각하는 man은 gentleman보다 더 고귀한, 더 온전한 존재입니다” 라는 말로 정면 대응한다.
상대의 심상치 않은 전투력을 감지한 마가렛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라며 슬쩍 발을 빼려고 하지만, 손턴은 기다렸다는 듯 강스매시를 내리꽂는다.
“내가 볼 때 ‘gentleman’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는 그 사람을 설명해주는 용어입니다. 반면에, ‘man’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그 사람, 인생과 관련되어 있고 시간과 관련되어 있고 영원과 관련되어 있는 그 사람입니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야 했던 로빈슨 크루소도, 한평생 지하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던 죄수도, 아니, 파트모스 섬에 유배당했던 세례자도, 인내가 있었고 용기가 있었고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하려면 ‘man’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이 ‘gentlemanly’라는 단어에 좀 신물이 납니다. 명사 ‘man’과 형용사 ‘manly’의 소탈한 깊이는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 비해 이 단어는 온당치 못하게 쓰일 때가 많고, 그 의미가 너무 지나치게 부풀려질 때도 많은 탓에, 나는 이 단어를 오늘날의 유행어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20장)
순간 마가렛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다. (많은 빅토리아 소설에서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man은 gentleman의 상관어인 동시에 master의 상관어로 사용된다. 상술하자면, gentleman의 상관어인 man은 비본질 속성을 벗어버린 ‘그냥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master의 상관어인 man은 지주나 사장이나 집안의 주인이 부리는 ‘노동인력’을 의미한다.-필자 주)
그렇지만 마가렛이 전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일은 디너파티에서의 사상투쟁이 아니라 노동자들과의 우정이다. 마가렛과 히긴스 부녀가 친구가 될까 말까 하는 그 어색하고 난처한 순간은 연애가 시작되는 순간 못지않게 마음이 설렌다. 가난하고 아픈 소작농을 자선 방문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던 ‘남’의 레이디가 ‘북’의 공장노동자의 긍지에 당황하면서도 매혹되는 장면이다.
남루한 행색의 아버지와 병색이 완연한 딸의 산책길에 동행이 된 마가렛은 평소 습관대로 주소와 이름을 묻는다. “그럼 이름은요? 꼭 기억해둘 게요.” 통성명을 요구하는 처자에게 히긴스는 대꾸한다. “떳떳하니 못 알려줄 것도 없지. 니콜라스 히긴스요. 딸애는 베시 히긴스. 그런 걸 왜 묻나요?” 마가렛은 약간 멈칫하며 대답한다. “아니 그게…찾아가 드릴까 했어요.” 히긴스의 첫 반응은 “모르는 사람이 내 집에 오는 거 안 좋아하는데”였고, 상대를 배려한다고 급히 덧붙인 말은 “외지에서 왔다고 하니 여기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겠네. 딸애한테 이 꽃도 따줬고. 오고 싶음 와요”였다. 이래서야 면이 서지 않는 마가렛이지만, 처음 만난 친구에게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한 거 잊지 마요”라고 인사하는 딸의 간절함 앞에서 히긴스는 고까움 따위는 내려놓는다.
“그럼, 그럼, 와줄 거다. 내가 아까 싹수없는 말을 좀 했으니 지금은 좀 꽁한 마음이겠지만. 금방 풀고 와줄 거다. 저거 봐라. 콧대 높고 곱상한 얼굴에 속마음이 다 써있다.” (…)
마가렛은 (…) 자기 마음속을 읽은 이 사내의 통찰력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밀턴은 그녀에게 좀 더 환한 장소가 되었다. (8장)
노동자의 고통과 공장주의 고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노사의 갈등, 파업과 폭동을 양가적으로 경험하면서, 마가렛은 자기가 발 디딘 이 사회를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아닌 마주해야 할 현실로 보기 시작한다. 마가렛이 밀턴에 살면서 너무 타락해서 민주주의자, 빨갱이 공화주의자, 심지어 사회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그녀의 대부는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40장)
“사장님같이 참아주기 힘든 놈은 내 평생 처음 봤거든요.”
변한 것은 손턴도 마찬가지였다. 노동계급의 빈곤문제를 노동자 개인의 무지와 무능의 탓으로 돌리는 소설 초반의 손턴과 노동자 복지에 투자하고 노사 공동경영 시스템을 실험하는 소설 후반의 손턴은 분명 많이 다른 사람이다. 손턴이 이렇게 변화하는 데는 파업에 강경 대응했던 탓에 큰 손실을 입고 폐업의 위기에 몰렸던 경험도 적지 않게 작용했겠지만, 노동자들과 계급장 떼고 맨투맨으로 겨루는 경험들도 중요했다.
손턴에게 그 첫 경험을 하게 해준 것도 히긴스였다. 이 명장면은 손턴이 오후에 히긴스의 집에 찾아오는 데서 시작된다. 실은 그날 아침 히긴스가 손턴을 찾아가 일을 좀 달라고 했는데, 손턴은 매정히 내쳤다. 히긴스가 먹여 살려야 할 고아들이 있다는 말까지 했지만, 손턴은 그저 일자리를 얻으려는 구실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아이들이 오늘 아침에 나한테 말한 그 아이들이오?”
히긴스는 화를 채 삭이지 못한 채 힐끗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믿기는 어렵다, 랬잖아요. 나는 다 기억이 나누먼.”
손튼 씨는 잠시 조용히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도 기억나오. 내가 분명 그렇게 말했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될 일이었는데, 믿기지 않아서 그랬소. 나였다면 남의 자식들을 거두기는 힘들었을 테고, 나한테 그런 짓을 한 사람의 자식들을 거두기는 더 힘들었을 거요. 바우처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었소. 당신이 한 말이 진짜라는 것도 확인했고. 사과하오.”하지만 히긴스는 돌아보지 않았고, 곧바로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한참 만에 나온 말은, 내용이야 그런 대로 무뚝뚝했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바우처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사장님이 캐고 다닐 필요가 없는 일이지. 그놈은 죽었고, 내 마음은 아파. 그럼 된 거예요.”
“어쨌거나. 당신, 나랑 일하려오? 이 말 하러 왔소.”
히긴스는 고집을 풀고 돌아설 뻔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버텼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손튼 씨는 같은 말을 반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히긴스의 눈에 아이들이 들어왔다.
“사장님이 나더러 철면피에 사기꾼에 골칫거리라고 그랬지요.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에요. 가끔이지만 퍼마실 때는 진짜 그런 놈이니까. 나도 사장님더러 폭군에 늙은 불도그에 악덕업주라고 그랬지요. 지금 우리 처지는 이런데. 하지만 애들이 있으니. 사장님,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손튼 씨가 재미있다는 듯 대꾸했다. “그럴 리는 없지! 나는 잘 지내자는 말을 하러 온 게 아니거든. 하지만 당신 말을 들으니 한 가지는 안심이군. 당신이나 나나 상대방을 지금보다 더 나쁘게 볼 수는 없겠다 그 말이오.”
히긴스는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뗐다. “그 말이 맞네요. 사장님이 나를 안 써 준 게 정말 다행이었구나, 하고 나도 사장님을 만나고와서 쭉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장님같이 참아주기 힘든 놈은 내 평생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성급한 판단이었을 수 있겠네요. 내가 이 일 저 일 가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는 갑자기 돌아서더니 처음으로 손튼 씨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좀 더 솔직하게 말했다. “일하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일이 타결되면 나는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이 타결되면 나는 이렇게 합니다.” 손튼 씨는 이렇게 말하며 히긴스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러고는 사장으로 돌아가서 말을 이어갔다. “지각에는 용서 없소. 내 공장은 굼벵이를 그냥 두지 않소. 벌금은 철저히 물리지. 그리고 또 하나, 말썽 일으키다 걸리면 당장에 해고요. 지금 당신 처지는 이렇소.”
“오늘 아침 사장님이 내 머리가 이렇다 저렇다 했는데, 일하러 나갈 때 머리통을 달고 가도 괜찮나요? 차라리 집에 두고 갈까요?”
“그 머리로 내 일에 참견하겠으면 두고 오는 게 좋겠소. 당신 일만 하겠으면 달고 와도 좋소.”
“어디까지가 내 일이고 어디까지가 사장님 일인지 그걸 정하려면 머리통이 꼭 필요한데요.”
“당신 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고, 내 일은 잔뜩 쌓여 있소. 그러니 나는 이만 가겠소.” (39장)
로맨스의 팬이라면 마가렛과 손턴이 매력 면에서 좀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 마가렛에게는 엘리자베스(<오만과 편견>)의 상쾌한 엣지 같은 것은 없고, 손턴도 히스클리프(<폭풍의 언덕>) 같은 마성의 자본가는 못 된다. 하지만 <남과 북>에는 <오만과 편견>이나 <폭풍의 언덕>에는 없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사회의 총체적인 풍경이다. 마가렛과 손턴의 사랑을 뒤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19세기 중반의 영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사회는 어떤 힘에 의해 어디로 나아갔는지, 그때 그 사회는 지금 이 사회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비슷한지, 큰 그림 한 장을 손에 넣게 된다.
P.S. 개스켈 부인의 작품에서는 하녀들이 주인들보다 쌩쌩하다 -버지니아 울프-
긴 사설을 늘어놓고 정작 했어야 할 말은 못한 기분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혐오하고 경멸하는 귀족주의자와 고전적 정치경제학을 신봉하는 개인주의자가 내적 편견들과 외적 시련들을 극복하고 인본주의적 수정주의자 커플로 거듭나는 해피엔딩 로맨스는 분명 <남과 북>의 중요한 한 층이지만, 이 소설에는 다른 층이 존재한다.
그 층의 존재는 사회통합 내러티브 속에 우겨넣어지지 않는 현실 파편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일랜드 노동력이 수입되는 문제에서 해상반란 문제까지), 추리물이라는 로맨스의 네거티브 필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마가렛을 조사하는 수사관 이름은 무려 왓슨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느꼈던 비주류 언어의 에너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층이 훨씬 흥미로웠다는 것이 내가 나누고 싶은 감상이었다.
또 P.S.
이 글의 인용 부분은 출간된 책을 따르는 대신 필자가 다시 옮겨보았다. 같은 작품이라도 그 안에서 무엇에 주목하느냐가 사람마다 다르고 때마다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번역업 종사자가 자기 글을 쓸 때 다른 사람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 번역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인용하기가 불가능하다.
마지막 P.S.
엘리자베스 개스켈(1810~1865)은 주로 미시즈 개스켈이라고 불리는 영국 소설가로, 문학애호가와 사회사학자 양쪽 모두에게 흥미로운 작가라는 것, 성직자 출신의 공직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10대 시절에는 고전, 예술, 예법 등의 전통적 교양을 배우는 학교에 다녔다는 것, 20대 초반에 진보적인 유니테리언교파의 목사와 결혼해 공업도시 맨체스터 - 밀턴의 모델이 된 도시 - 에 정착했다는 것, 서른 살이 넘어 낳은 아들이 1년 만에 죽었는데 그녀가 소설을 쓴 것은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는 것, 찰스 디킨스, 존 러스킨, 미국의 스토우 부인 같은 당대의 명사들과 어울렸다는 것, 할레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찰스 할레에게 딸의 피아노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 등등의 정보는 WIKIPEDIA(☞바로가기)에도 나와 있다.
WIKIPEDIA에는 안 나오는, “그녀가 자부심을 느낄 때는 다른 여자들이 하는 일을 할 때, 그런데 그 일을 좀 더 잘 할 때였다”, “손님이 오면 책상에 있던 원고들을 치워버렸다. 자기를 이상하게 볼까 싶어서였다”, “그녀는 시골 기분을 느끼려고 뒤뜰에서 암소를 길렀다” 같은 이야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찾았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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