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23년 짓누른 검찰…정의는 있는가

[편집국에서] 유서 대필 사건 재심 선고를 주목한다

'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죽음을 부추긴 파렴치범.'

1991년 한 젊은이에게 무시무시한 주홍 글씨가 붙었다. 사회 부조리에 맞서고자 운동에 투신한 20대 청년이었다.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을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파렴치범으로 몰렸다.

청년은 무죄를 주장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이하 국과수)의 글씨체 감정 결과 이외에 다른 물증은 없었다. 그러나 검찰은 청년을 전격 구속했다. 법원도 청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작 의혹이 거세게 일었다. 공안 정국을 조성하고자 정권 차원에서 꾸민 일이라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왔다. 대학생 강경대가 시위 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직후였다. "살인 정권 물러나라"며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정권을 비판하며 연이어 분신하던 시기였다. 노태우 정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유서 대필 사건은 정권에 꽃놀이패였다. 불리하던 정국을 한순간에 반전시킨 것은 물론 눈엣가시이던 정부 비판 세력을 싸잡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세울 수 있었다.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동료의 목숨마저 가벼이 여기는 집단이라는 식이었다. 정권과 친정부 세력은 '분신의 배후가 있다',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무시무시한 공세를 퍼부었다. 적잖은 이들은 1986년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 당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운동권이 성까지 혁명의 도구로 삼고 있다'며 정부 비판 세력을 파렴치 집단으로 몰았던 전두환 정권의 적반하장을 떠올려야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청년에게 징역 3년, 자격 정지 1년 6월이 선고됐다. 청년은 꼬박 3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어마어마한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 재벌 총수 등이 흔히 누리던 감형의 혜택도 청년에겐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만기 출소 후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모르는 국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각종 매체가 떠들썩하게 다룬 사건의 주역인 파렴치범으로 몰린 이에게 마음 편한 삶은 허용되지 않았다. 억울함, 분노, 그에 더해 생활고까지 청년을 괴롭혔다. 사건이 조작됐음을 호소하며 오명을 벗을 길을 모색했지만 그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사는 것이 지옥 같았을 터. 그럼에도 청년은 진실을 밝히겠다는 뜻을 접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고통의 세월 끝에 오명을 벗을 수 있는 문 앞에 섰다. 강기훈, 바로 그의 이야기다.

▲ 강기훈 씨. 2012년 12월 20일, 유서 대필 사건 첫 재심 재판에 출석하기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문제는 검찰이다

다음 주 목요일(13일),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 대필 사건의 재심 선고 공판이 열린다. 사건에 휘말린 지 23년. 20대 청년이던 강기훈은 어느새 50대에 접어들었다. 고통의 세월 탓일까. 강기훈은 중병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마도 강기훈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판결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 1월 16일에 열린 재심 결심 공판에서 강기훈의 무죄 주장에 다시 한 번 힘을 실어주는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가 공개됐다. 재심 재판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도 받아들인 상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과수 등의 감정 결과를 토대로 2007년 유서 대필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재심 권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문제는 검찰이다. 검찰은 강기훈의 무죄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재심 권고 결정을 내린 후에도 과거의 주장을 완강하게 고집해왔다. 서울고등법원에서 2009년 9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자 검찰은 재항고했다.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2012년 10월이다. 검찰은 재심 결심 공판에서도 "사정을 잘 모르는 국민은 검찰과 사법부가 합작해 억울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며 과거의 판결을 유지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재심 권고에서 재심 선고까지 오는 동안 7번이나 해가 바뀌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검찰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 이는 유서 대필 사건이, 검찰이 전면에 나선 대표적인 공안 사건으로 꼽히는 것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유서 대필 사건은 군과 정보 기관이 퇴조한 가운데 검찰이 체제 유지의 주력 부대임을 과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한동안 '검찰 공화국'으로 만든 획기적인 사건"(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이라는 지적과 같은 맥락이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더라도 이 사안이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이 불복하고 대법원으로 사건을 끌고 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우려다. 검찰이 제1차 인혁당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등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거푸 상고한 것도 걱정을 더하는 요소다.

공안 조작 사건이라는 재심 결과를 받아들이면 검찰 조직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정반대다. 국민이 사랑하는 검찰의 출발점은 과거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검찰은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강기훈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는 23년 전 한 청년을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법부, 그리고 조작 정황에 눈감고 무시무시한 공세를 편 숱한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대법원이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복권시킨 후에도 89년간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프랑스 육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권한다(드레퓌스 사건이 터진 지 12년 만인 1906년 프랑스 대법원은 드레퓌스를 복권시켰지만, 프랑스 육군은 사건 발생 101년 만인 1995년에야 드레퓌스가 무죄라고 인정했다).

다시 대한민국의 정의를 묻는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날 경우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또 있다. 유서 대필 사건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사들에 대한 처분이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은 대부분 훗날 출세 가도를 달렸고, 상당수는 박근혜 후보 주위에 모여들었다. 강신욱 전 대법관,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이 그들이다.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또 있다. 유서 대필 사건이 터진 바로 그달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활약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강기훈을 짓누른 '비정상'을 바로잡는 판결이 나올 경우, '비정상화의 정상화'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지켜볼 일이다.

강기훈은 지난 20여 년간 이 사건의 장면들이 무한 반복됐다고 말했다. 너무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를 자유롭게 해줄 정도의 정의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지를 가늠할 잣대가 바로 재심 판결 결과다. 이는 또한 목숨까지 바치며 정권 퇴진을 요구했으나 유서 대필 사건이 터지면서 '유서도 제 손으로 못 쓰는 사람' 정도로 치부된 강기훈의 동료, 고 김기설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

23년을 끈 유서 대필 사건이 다시 대한민국의 정의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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