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더미 같은 물결들을 헤치며 큰 바다를 질러갔다. 홍도의 흰 동백숲이 첫 목표였기 때문이다.
흰 동백숲은 꽃들이 이제 막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을녘에 검은 돌무더기들과 축축한 검은 흙 위에 떨어져 누운 흰 동백들은 마치 불행한 한 여인의 갖가지 표정의 얼굴들 같고, 또 흰 미륵 부처들 같기도 했다. 그리고 기일게, 길게 울리는 뱃고동에 몸을 뒤척이는 한 청년의 갖가지 정감의 상징들 같았다. 노을녘 그 숲속에서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시(詩) 한 토막이 문득 떠올랐다.
꽃지는 사월
동백숲 외딴 돌무더기에
너를 묻고 떠난다
길었던 기다림
짧았던 만남
<사진>
그날 밤 원두는 이 토막 시에 곡을 붙여 기타를 동당거리기 시작했고, 눈먼 여주인공 역을 하던 '하나'라는 이름의 젊은 여배우는 너무 슬프다고 조용히 눈물바람을 했다.
영화 '청녀'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교향악'(田園交響樂)을 번안·각색한 것이다. 어렸을 적 데려다 기른 눈먼 소녀를 부자가 함께 사랑한다는 삼각 드라마였다. 홍도 뒤편 절벽 위에서 사그라드는 노을 무렵에 먼 곳으로부터 오고 있는 그 집 아들을 기다리는 눈먼 소녀의 슬픔을 그린 그 이튿날 밤, 달도 별도 없는 그 새카만 밤, 술을 사러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나는 짐승을 잡기 위해 땅을 파놓고 그 위에 살짝 나뭇가지와 가마니를 덮어놓은 깊은 구덩이에 푹 빠져 버렸다.
캄캄했다. 그리고 암담했다.
도무지 혼자서는 기어나올 수 없어 원두를 부르기 시작했다. 꼭 짐승 같았다. 구덩이에 빠지고 덫에 걸린 산짐승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울부짖음! 원두를 부르는 나의 외침은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나를 아랫목에 눕히고 무릎과 팔꿈치 등에 머큐로크롬을 발라 주던 원두가 큰 눈을 껌벅이며 왈,
"너 여기 안 왔으면 죽었다."
촬영이 끝나고 홍도를 떠날 때다.
대흑산 예리에서 그 이튿날 목포로 떠나는 배에 대려고 밤에 홍도를 떠나는데 홰들을 잡고 미끄러운 돌짝지에서 작은 배로 옮겨타려고 펄쩍 뛰다가 갑자기 미끄러지며 앞으로 확 고꾸라져 노를 거는 쇠붙이 위에 가슴을 몹시 찧었다. 끙끙 앓으면서 뱃전에 누워 있는 나에게 횃불이 번뜩번뜩 스쳐 지나는 두 눈을 껌뻑이며 원두가 또 가라사대,
"너 여기 안 왔으면 죽었다."
그래.
아마도 헌병대나 보안사에 처음 걸려들었으면 고문에 맞아 죽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고비를 넘겼으니 이젠 잡혀가도 된다는 것일까.
그날 밤 대흑산 예리 관광여관의 큰 방에 모여앉아 노래들을 부르고 노는데 엉망으로 취한 내가 배우 남궁 원(南宮遠) 씨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나 심하게 시비가 붙었는가 하니 내가 남씨더러,
"야 이 똥배우! 그렇게 연기할 바에는 차라리 배우 관둬! 배우라는 게 신비스러운 데가 있어야지, 넌 뭐야, 임마! 그게 얼굴이야? 떡판이지!"
남궁 원 씨가 독한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하고 나는 귀퉁이방에 가서 고꾸라졌는데 술에 몹시 취한 남궁 원씨가 악을 악을 쓰며 나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 문정숙(文貞淑) 씨와 이감독(監督)이 말려 겨우 안정시켰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던 원두가 또 그 큰 두 눈을 껌벅이며 왈,
"너 정말 여기 안 왔으면 죽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실례합니다. 김지하 시인이지요?"
그는 흑산경찰서의 민경사였다.
마침내 배가 떠났다.
나는 배 맨 위층에 있는 선장실 쇠창살에 수갑을 나눠 한 손목에 걸고 민경사와 함께 목포까지 그 먼 바다를 내내 술을 마시면서 왔다. 그 선장실에서 처음에는 조금씩, 그리고 차츰 잦아지면서 심한 기침이, 오래전 가라앉았던 그 천식이 시작되었다.
혼자 웃었다. 속으로 지껄였다.
"제기랄! 내가 무슨 체 게바라야, 뭐야? 웃기네!"
그렇게 나는 내 운명을 웃으면서 왔다.
비극도 희극도 아니었다.
멀리 검은 유달산의 바위 끝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야말로 나의 운명이자 숙명이요, 또 그렇게 말하는 게 용납된다면 나의 천명이기도 했다.
훗날 들으니 바다 위에서 아래쪽 객실에서는 원두가 술에 취해 남궁 원 씨에게 마구 퍼부어 대며 경찰에 밀고했다고 욕을 욕을….
아! 그러는 게 아닌데…. 전혀 허물 없는 사람이 욕을 봤구나….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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