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를 예를 들어가면서 유세하는데 조금 우스꽝스러운 실례를 들어서 모두 웃음이 나는 걸 지긋이 참고 있었을 때였다.
누구의 입에선가 마치 방귀소리처럼 왈
‘어쭈-’
고2 학생간부의 얼굴모양이 순간 형편없이 일그러지며 얼굴빛이 샛노오래졌다. 독사같이 모난 눈을 들어 장내를 휘둘러 보았다. 교실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누구야? 나와!’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걸 어찌하나?
‘좋은 말로 할 때 앞으로 나와!’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괜히 실실 웃으며 비실비실 앞으로 걸어나갔다.
‘너야?’
‘이 짜아식이 웃어?’
단 한방에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간단해서 좋았지만 그 뒤로 나는 상급생들에게는 ‘꼴통’으로 찍혔고 동급생들에게는 엉뚱한 촌놈으로 따돌림을 받았다.
분명 중동기질이란 것이 있기는 있는 셈이었다.
***늑막염**
아무래도 두가지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은 내게는 무리였다. 더욱이 열여섯 살의 객지살이에겐 지나친 부담이었다. 개학 후 불과 두 달 만에 나는 늑막염에 걸려 원주집에 돌아가 쉬게 되었다.
병원에 가서 늑막의 물을 빼내는 일과 극장에서 영화, 연극을 보는 것 이외엔 내겐 할 일이 없었다. 그 두 달 동안에 나는 시시각각 빛깔이 변화하는 치악산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알았고, 폭격으로부터 면제된 원주 남산 근처와 봉산동 배마을이나 우물시장 쪽의 구시가지 옛집, 옛 골목들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게 일꺼리가 되었다.
자기 땅에 붙어살아 익숙한 토박이 사람들의 느긋하고 한적한 붙박이 삶을 부러워했고 눈에, 마음에 깊숙이 그 삶의 모습들을 담아두려고 했다. 그 낡은 집들과 낡은 삶의 모습들은 강열하게 내 심상 속에 새겨진 채 퇴색되지 않고 한두 해 뒤 나의 초현실적인 시작들 속에 신화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거나 대학초기에 원주에서 벌인 시화전속에서는 ‘그림시’들로 그 모습을 바꾸어 드러나기도 했다.
늑막염은 그 후 폐렴으로, 대학시절엔 다시 폐결핵으로까지 진전되어 나의 청춘을 병색으로 어둡게 만들어 놓았지만 늑막염은 그 두 달 동안 내안에서 공부에 대한 정성을, 공부를 통해 가난한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지극한 열성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삶과 세계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서글픈 정조를 빚어내었다.
‘삶이란 슬픈 것이다.’
나는 그 무렵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 그런 슬픈 마음에는 다시금 공부하러 서울로 떠나던 그날 새벽, 원주역에 나와 배웅하던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이 내 한시절의 슬픈 인상화로 새겨져 지금까지도 누우렇게 빛바랜 서글픈 사진처럼 뇌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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