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보다 극악했던 그곳, 26년 지난 지금도…

[26년, 형제복지원] <3>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1. 법인 기본 재산 매각 대금 중 36억9600만 원 허가 조건 위반
2. 법인 기본 재산 매각 대금 14억5300만 원 개인적 용도 사용
3. 수익 사업 회계에서 6억4700만 원 개인적 용도 사용
4. 수익 사업 회계 6억 원 지출 부적정
5. 장기 차입 허가 조건 위반 16억4000만 원
6. 허가 없이 임의로 4억4700만 원 장기 차입 실시
7. 법인 기본 재산 무료 임대 부적정
8. 회계 장부 부실 작성 및 외부 회계 감사 미실시
9. 법인 자산의 법인 등기부 등기 부적정
11. 법인 목적 사업 및 법인 정관 변경 절차 미이행
12. 건물 증축 공사 시 부당 공사 분할 및 수의 계약
13. 사상온천 옥상 건축물 불법 용도 변경 등

위 내용은 2012년 8월 27일부터 9월 7일까지 부산시가 형제복지지원재단(과거 이사장 박인근, 현 이사장은 박인근의 아들인 박천광)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별 점검 결과다. 2005년 사회 복지 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은 수익 사업부 증축 공사(사상온천 등)와 공사비 명목으로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장기 차입을 시작해 2009년까지 총 118억 원을 대출받았다. 2009년까지 원리금 상환도 없었고 대출 용도대로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이후 부산시가 허가하지도 않았는데 4억4700만 원을 추가로 대출받기도 했다. 법인이 상환해야 하는 금액이 모두 128억 원인데, 당시 근저당 설정도 되지 않은 채 "부산저축은행과 거래한 신용으로"(2009년 2월 9일 임시이사회 회의록, 이사장 박인근이 한 말) 이 어마어마한 서민들의 돈이 사회 복지 법인의 수익 사업이란 명목으로 흘러들어갔다.

아, 사회 복지 법인이라 하니까 꽤나 여러 곳의 시설이나 복지 기관을 운영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복지 사업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온천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시설은 47명이 생활하고 있는 '실로암의 집'이라는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 딱 한 곳뿐이다. 그것도 관리비, 운영비, 인건비 등 소요 예산 일체가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돈을 법인의 이름으로 대출받았다.

어디에 썼을까? 첩첩산중에 커다란 4층짜리 건물 하나 달랑 세워놓고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한 시설이라고 말하지만,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여러 명 살고 있는 시설에 휠체어 리프트 차량 한 대 없는 열악한 곳이 '실로암의 집'이다. "예전 이사장님이 그런 걸 싫어하셔서…"라고 이유를 대는 시설 직원의 말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1987년 형제복지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박인근에게 복지 시설은 수익을 위한 수단

그렇다면, 이 총체적 부정과 비리의 온상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앞서 밝혔듯 '실로암의 집'이라는 중증 장애인 생활 시설 하나 달랑 운영하면서 온천, 사우나, 수영, 찜질방, 헬스, 화장품 사업 등 수익 사업은 넘쳐난다.

그렇다고 수익금이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쓰이지도 않았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자가용이 아니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데, 인근에는 식당 하나 있을 뿐 집이나 거주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입구부터 건물까지는 40도쯤 되는 경사진 길로 꾸불꾸불 500~600m는 가야 한다. 전동 휠체어는 속력을 내야 오를 수 있고 내려오는 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비장애인도 헐떡이며 등산하듯 기어 올라갈 정도니 수동 휠체어 탄 사람은 혼자 힘으로 도저히 오르내릴 수 없다.

한번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중증 장애가 있는 거주인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는 2013년 현재의 '실로암의 집'은 1980년대 산비탈에 세워진 형제복지원의 폐쇄적이고 고립된 모습, 그대로다.

26년, 형제복지원
①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② 500명 넘게 죽인 그곳…박정희·전두환은 책임 없나?

1980년대 형제복지원의 실체

거주인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형제복지원에서는 수용자들이 모두 똑같은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는 군인처럼 짧은 스포츠형이었다. 군가를 부르고 '소대'라는 이름의 거주 공간에서 집단생활을 했으며, 점호가 끝나면 열쇠를 가진 사람이 바깥에서 잠그고 나가는, 감금 상태였다.

내부에서는 동성 간 성폭력이 자행됐고 그 상처로 정신 장애를 갖게 된 사람도 있다. 색소가 들어간 김치와 1년 내내 나온 하얀 선짓국, 조, 보리, 쌀이 들어간 밥은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었지만 살기 위해 먹었을 뿐이고 뒤돌아서면 곧바로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매일매일 군대에서 벌어지는 제식훈련을 해야 했고, 자칫 실수라도 하면 기합과 폭력, 가혹 행위가 이어졌다.

모든 건축물은 수용자들의 강제 노역으로 만들어졌고, 기계 장비도 없이 삽과 곡괭이, 망치 하나 달랑 들고 그렇게 수용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성경과 찬송가를 외우고 일요일에는 그 내부에 있는 새마음교회에 강제적으로 가야 했다. 목사는 앞에서 설교를 하고 뒤에서는 탈출하다 잡혀 온 사람들을 죽을 만큼 팼다고 한다.

가끔 외부 사람들이 견학(?)을 오면 작업장 같은 곳을 보여주며 "갱생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노임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가족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결국 그곳을 나가게 되었을 때는 적금이라 불리는 몇 만 원을 손에 쥐어줬다. 밖에 나가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발설하지 말라는 일종의 입막음용이었다.

▲ 옛 형제복지원. 한때 3000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하던 수백억 원대의 대지 및 시설이었다(1990년 1월 13일 모습). ⓒ연합뉴스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

그렇다면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는 유일한 시설, '실로암의 집' 모습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거주인들이 1970~1980년대 수용 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스포츠형의 머리 모양에 고무줄이 들어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또 장애가 경한 사람들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뿐, 장애가 심한 사람들은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은 채 각자의 방안에서 혼자 벽을 보고 식사하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는 이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끈을 묶어 허리를 결박한 사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채광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마당을 나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층 건물에 1층만 거주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 프로그램실, 교실(순회 교육), 의무실은 모두 잠겨 있었다. 3층은 교회로, 공적인 시설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어 부산시에 의해 고발 조치됐다. 공공 시설물에 종교 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층은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여 년을 산 거주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 그곳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어디어디를 맘대로 못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1층 법인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6-7대의 CCTV 화면 모니터가 박혀 있었다. 섬뜩했다. 옛날 형제복지원을 운영하고 유지했던 방식과 똑같이 거주인들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방증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만한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때문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퀭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의 방문에는 밖에 잠금 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 뇌병변 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비리 뒤에 공존하는 국가와 지자체

비리 시설의 문제를 접근하다보면, '비리가 있으면 당연히 그곳의 거주인들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가기 때문에 인권 침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게 된다. 고구마 줄기처럼 하나둘 문제가 튀어나오는데,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권과 삶에 중대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의 아들 박천광이 운영하고 있는 형제복지지원재단의 비리 문제는 너무나 가볍게 넘어가고 있다.

부산시는 2012년 진행한 감사의 한계로 "장부 관리 부실 등으로 차입금 집행, 기본 재산 처분과 각종 회계 집행 확인을 위한 전반적인 확인 및 점검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했다. 13가지나 되는 부정, 비리, 횡령 등이 드러났지만 실은 장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더 밝혀낼 수 없었다는 것이니 실제 상황은 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래서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는데, 몇 개월이 지났건만 검찰 수사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감사를 통해 부산시 등의 공무원 16명이 연루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최악의 공무원 유착·비리 사건으로 읽히지만, 2012년 당시 "시설장이 치매로 병원 입원 중이라 확인할 바가 없어"라는 이유로, 경징계 2명, 훈계 7명, 주의 7명으로 끝난 사실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실로암의 집' 거주인 인권 상황도 2011년 민관 합동 조사를 통해 드러났었는데, 당시 민간 단체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시설 폐쇄'를 제안했었다. 그러나 부산시와 기장군은 납득할 만한 근거 하나 제시하지 못한 채 민간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했다. 공무원들에게 중증 장애가 있는 거주인들은 관리의 대상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었지, 결코 '시민'의 한 사람이 아니었다.

반성은 없고 당시의 부를 그리워하는

"형제복지원을 운영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장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 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 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왔기에…."

2004년 박인근이 <한국기독신문> 및 <교회복음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금당했고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강제 노역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26년이 지난 지금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의 버거움에 비틀거리고 있다. 그때의 사건은 자신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했고 일상에서 가난과 불안을 오가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거짓으로 왜곡하며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폐쇄 사건을 일부 언론과 사건 담당 검사의 중상과 모략으로 치부하고 있고 사비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수용자들을 보살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금고 안에서 쏟아질 정도로 외화, 엔화가 가득했고, 33개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콘도 회원권, 골프 회원권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사실을 부정하며 지금껏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 복지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박인근은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1983년도에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 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놓은 걸 보면 반성은커녕 폭력으로 획득한 권력과 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청산되지 않은 사회 복지 시설의 부정과 인권 침해

도대체 이런 상황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을 때,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당신 때문에 거리의 거지들이 없어졌으니 얼마니 좋은 일이오.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오!"라고 말했고, 국가가 주는 훈장도 2개나 받았다. 그의 말처럼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라 부산시와 부산 경찰의 도움을 받아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것이니 어쩌면 그가 줄곧 사건을 정당화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게다가 사건이 터진 후에도 대통령, 보사부 장관, 부산시장, 검찰총장, 구치소장이 모두 하나같이 그의 '죄 없음'을 인정했고 결국 대법원 판결에서도 외화관리법, 초지법 등만 적용돼 2년 6개월을 살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의료 방치와 폭력, 영양실조, 강제 노역으로 죽어나간 500여 명에 대한 진실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국가 정책으로 가해진 범죄 행위는 정당화되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사회 복지 시설 관련 법과 제도는 지금껏 보호와 관리라는 '시설'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탈시설'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에 가장 강하게 반대한다. 그 결과 시설 거주인들은 자기 결정권을 침해당한 채 관리 대상이 되어 숨죽여 살고 있다.

1980년대 형제복지원 사건과 지금 현재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회 복지 법인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박인근 일가는 그때의 가치관과 수법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부산 지역의 유명 인사(부산시사회복지법인시설대표자협의회 회장)로 행세하고 있으며, 법인 시설들은 문제가 터졌을 때 집단으로 시청에 몰려가 그의 구명 운동을 했다. 부산시는 절차와 법을 무시하고 법인을 비호했으며, 연루된 공무원들은 그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훈계와 주의를 받았다. 그리고 국가 정책은 '사람'이 배제된 시설 중심, 법인 지원 중심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이 보여준다. 어마어마한 폭력을 목도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도가니>보다 더 극악무도했던 사건을 왜 사회는 침묵하는가?"라고 말하는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한종선의 질문에 이제는 몸으로 답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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