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세계 자동차 산업 판도가 바뀐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바닥 향한 경쟁' 강요하는 자본의 '공포 정치'

"프랑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르노 자동차가 2014년부터 스페인 현지공장에서 1300명을 추가로 채용하고 생산량을 40% 늘려 연간 28만 대의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다."

지난 11월 21일, <로이터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뉴스이다.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아니, 르노 자동차가 미쳤나. 유럽 자동차 시장이 쪼그라들어 곳곳에서 감원이니 공장 폐쇄니 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생산량과 고용 인원을 늘리다니? 게다가 재정 위기 폭탄을 맞은 스페인에서?

최근 GM이 차세대 크루즈를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 역시 유럽으로 생산을 이전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유럽 노동자들의 임금이 한국보다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새로운 공격

그렇다. 세계 경제의 판도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다뤘던 환율 변동도 세계의 제조업 판도를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하나의 변수만으로 움직이는 물건이 아니다. 각국 정치와 경제, 노동자들의 조직력 등의 변수가 모두 어우러져 돌아간다.

스페인에서 르노가 고용과 생산을 늘리는 이유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노동조합이 엄청난 것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우선 휴일에도 공장을 돌릴 수 있도록 노동시간 연장에 합의했고, 물가인상률보다 낮은 임금 인상에도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투입을 용인한 것이다.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하는 '사유제한 제도'를 가진 스페인에서, 르노가 18개월 한도 내에서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줬고, 신규 채용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정규직 임금의 3/4 미만으로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말았다.

노사 합의가 발표되던 날(11월 21일), 스페인 총리 마리아노 라호이가 갑자기 르노 공장을 방문한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실업률이 25%로 치솟고 재정 위기와 경기 침체로 인기가 급속도로 떨어진 라호이 총리는 약속이나 한 듯 합의 내용을 찬양했다. 그의 연설은 TV로 생중계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이 타전됨과 동시에, 르노 자본은 본토인 프랑스 노동자들을 상대로 스페인 노조처럼 양보안을 받으라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노조가 아니라 자본의 요구로 프랑스에서 이제 막 단체교섭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르노 자본의 협박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내년 1월까지 단체교섭 마무리하자. 그때까지는 어떤 공장에서 무슨 차를 생산할지 발표하지 않겠다." 즉, 노조가 양보하는 수준을 보고서 신차 투입 여부나 생산물량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협박술 아닌가.

▲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 ⓒ로이터=뉴시스

물량 놓고 '바닥을 향한 경쟁' 강요

이런 양상은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GM의 유럽 법인 오펠(Opel)은 독일에 4개 공장을 비롯해 유럽에만 11개의 생산 공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난 5월, 오펠은 차세대 아스트라(Astra) 소형차 생산을 독일에서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아스트라는 크루즈와 동급 모델로서 오펠의 주력 차종이며, 독일의 뤼셀스하임 공장과 보쿰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차세대 아스트라 생산지로 영국의 엘스미어포트 공장과 폴란드의 글리비체 공장을 선정해 버린 것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독일의 금속노동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즉, 말을 듣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고분고분한 노조를 갖고 있는 다른 나라 또는 노조가 없다시피 한 동유럽으로 생산을 빼돌리는 것이다. 차세대 크루즈 생산에서 제외된 한국GM 군산공장 노동자들이 느끼는 위기감 못지않게, 차세대 아스트라 생산에서 배제된 독일의 오펠 노동자들의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오펠과 독일 금속노조(IG Metall)가 체결한 단체협약에 따르면, 2014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고용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4년 이후에는 독일에서 어떤 차를 생산할지에 대해 오펠은 아무런 계획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양보하지 않으면 물량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펠 노동자들은 임금 동결 등의 방식으로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 그럼 또 무슨 양보를 더 하란 말일까? 그렇다. 스페인에서 이미 선례를 만들어 프랑스로 확산시키려는 르노 자동차처럼, 오펠 역시 독일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연장과 저임금 비정규직 투입을 요구할 것임에 틀림없다.

전 세계가 경쟁의 도가니로

이러한 변화는 2008년 경제 공황의 도래와 함께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2009년 전미자동차노조(UAW)와 GM이 체결한 단체협약에서 유휴공장 하나를 살려서 소형차를 만들기로 함에 따라, 오하이오 주의 로즈타운이 선정되어 쉐보레 크루즈를 생산하기로 한 얘기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GM 자본이 과연 아무런 대가도 없이 미국 공장에서 소형차 생산에 나섰을까?

그렇지 않다. 노동조합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이른바 이중 임금제(Two-tier wage system)라는 이름으로, 기존 정규직 임금의 절반 이하를 받는 비정규직 채용에 합의해준 것이다. 당시 GM 정규직 노동자들은 시간당 28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새롭게 고용된 젊은 노동자들은 시간당 14달러 미만의 임금에 복지 혜택도 정규직의 절반 수준을 감내하고 있다.

당시 미국으로 진출한 한국의 현대기아차와 일본의 토요타 공장들에는 노동조합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아예 처음부터 노동자들의 임금이 시간당 12~13달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GM이 먼저 노조의 양보를 받아 비슷한 임금 수준을 달성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포드와 크라이슬러 등으로 확산되었다.

독일의 폭스바겐은 최근 아예 시간당 12달러로 임금을 주면서 모든 노동력을 이주노동자로 고용하는 미국 현지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유럽 자본은 미국에서 이러한 제도의 맛을 보기 시작했고, 이제 드디어 유럽 본토에서도 이중 임금제와 비정규직 제도를 수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고용 형태의 시초는 한국이다. '사내하청'이란 이름으로 2000년부터 현대차부터 비정규직이 투입된 후, 제조업 곳곳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사내하청 고용형태가 존재하긴 했지만, 정규직과 동일한 직접 생산 공정에 비정규직이 대규모로 투입된 것은 2000년부터이다.

당시 이러한 고용형태가 얼마나 생소했는지, 취재하러 온 조·중·동 기자들마저 "어떻게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까지 절반인 비정규직이 양산되느냐? 임금과 고용 둘 중 하나는 차별을 없애줘야지"라며 혀를 끌끌 찰 정도였다. 미국과 유럽 자본가들은 이런 극악한 비정규직 활용이 이뤄지면, 제품의 품질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정규직 신규 채용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젊은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반토막 임금을 받고서라도 사내하청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하청을 적극 활용한 결과 1999년 이후 현대차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대부분의 직접생산 인력을 사내하청으로 활용하는 삼성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 초과 착취의 결과로 그들은 2008년 세계적인 공황 물결 속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경쟁 조건의 평준화

GM이 차세대 크루즈 생산을 한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올 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국 노동자들보다 시간당 임금이 2~3배나 높은 유럽으로 생산을 옮긴다고? 에이~ 자본가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발상을 하겠어?

이 역시 오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판도가 바뀌고 있다. 지난번에 살핀 것처럼, 우선 환율 상황이 달라져서 미국과 유럽의 생산 조건이 나아지고 있다. 다음으로, 2009년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양보 교섭으로 서구에서 이중 임금제와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있다.

만일 유럽으로 이 제도가 확산될 경우,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유럽의 비정규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한국에서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하는 물량의 경우, 선적 비용과 수출입 관세를 감안하면 전체 비용에서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한국에서 생산할 이유가 있겠는가?

전 세계 각 대륙에 생산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자본의 경우, "가장 많이 양보하는 곳에 물량을 배정하겠다"고 협박 정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노동조합과 교섭이 끝나기 전에는 어디서 뭘 생산할지 발표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거의 모든 자본가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지 않은가.

공포를 확산해 노동자들을 굴복시키는 '공포 정치'의 시대가 오고 있다. 차세대 크루즈 생산에서 제외된다는 발표가 난지 한 달 만에, 한국GM 군산공장은 12월에 딱 15일만 라인이 가동된다. 잔업과 특근이 모두 사라졌고 1일 8시간 주 5일 근무에다 26일부터 연말까지는 휴업이다.

반대로 부평공장은 대선 투표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특근이 잡히며 31일 내내 공장이 가동된다. 창원공장은 크리스마스만 빼고 30일간 생산이 이뤄진다. 한쪽은 일감이 줄어 한 달에 절반만 일하고, 다른 쪽은 토요일·일요일·공휴일 가리지 않고 팽팽 돌아간다. 이게 노동자들에게 어떤 시그널로 작용할까?

2014년 새로운 시스템의 완성을 향해

경제 공황으로 소비 시장이 꽁꽁 얼어붙고 있는데 도대체 생산 물량은 어떻게 확보하는 걸까? 그러나 자동차 산업은 전·후방 고용 창출 효과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들은 이 산업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투입해서라도 살리려 한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부도 지난 9월부터 연말까지 개별소비세 인하 조치를 하며 내수시장을 살리려 하지 않는가?

아~ 오해하지 마시길! 노동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을 살리려 한다는 말이다. 노동자들의 혈세로 정부가 자동차 산업 자본가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있기에, 당분간은 일정 규모의 생산물량이 확보되고 있다. 여기에 자본은 확보된 물량을 어디에 배정할 것인가를 놓고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한다.

밀어붙이는 방식이 매우 단순하고 과격해 보이지만, 거대 자본가들은 상당히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생산물량과 관련하여 어김없이 등장하는 숫자가 하나 있다. "2014년"이다. 차세대 크루즈의 본격적인 생산 시점은 2014년 말이다. 구세대 아스트라는 2014년까지만 생산되며, 2015년부터는 독일에서 더 이상 아스트라가 생산되지 않는다. 르노는 스페인에서 2014년부터 생산과 고용을 늘리기로 합의했다. 푸조 시트로앵은 파리 근교의 오네(Aulnay) 공장을 2014년에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자본가들은 지금 내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먼 미래를 보면서 돌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차종 출시를 2014년에 맞춰놓고, 내년에는 현재의 차종만을 생산한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 내년 한 해 내내 신차종 생산을 어디에서 할 것인가를 놓고 전 세계 노동자들을 경쟁시킨 후, 자신들이 원하는 생산 시스템의 완성은 2014년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 시위를 벌이는 푸조 시트로엥 노동자들. ⓒ로이터=뉴시스

노동자들이 세워야 할 전망

현대기아차는 물론이고 한국GM 역시 지난 10년 동안 생산물량이 꾸준히 늘어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한국GM은 대우차 시절에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이 오랜 해고 생활을 끝내고 복직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해고자들의 복직과 함께 3000명에 달하는 비정규직도 투입되어 주야맞교대로 생산을 늘려왔다.

글로벌 GM이 배정하는 물량을 잔업과 휴일특근까지 해가며 만들어줬다. 2008년 경제 공황과 함께 GM이 파산 위기로 몰렸을 때 1000명의 비정규직이 해고되는 등 잠시 잠깐을 제외한다면, 고용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오히려 늘어나는 노동 강도에 대한 불만이 더 높았다.

그러나 '고용과 생산이 늘어나던 지난 10년'이 지나가고 '새로운 10년'이 시작되고 있다. 지난 10년은 글로벌 GM이 한국의 저임금과 비정규직 제도를 활용하여 엄청난 생산대수를 강요한 세월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배정된 물량의 이면에는, 타국의 GM 노동자들의 아픔이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GM 자본은 한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고 보았고, 실제로 어마어마한 이윤을 뽑아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10년은 한국GM 역시 글로벌 GM의 다른 대륙 공장과 함께 물량 경쟁에 내몰리는 세월이 될 것이다. 그럼 노동자들은 어떤 전망을 세워야 할까? 이에 대해 앞으로 다양한 얘기와 토론을 해가겠지만, 분명한 것은 노동자들 역시 내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미래를 보고 돌을 놓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를 보고 돌을 놓는다"는 것은 당장의 시급한 대응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새로운 10년의 세월'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1년 동안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자본가들도 2014년 새로운 시스템의 완성을 위해, 내년 1년 동안 노동자들을 물량과 양보 경쟁으로 내몰기 위해 치밀한 전략과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도 빠른 시간 안에 너른 전망을 수립하고, 당장의 시급한 대응들을 시작해야 한다. 자본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파악하고 분석하며 끊임없이 현장에서 토론이 벌어지고 저항이 조직되어야 한다. 한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남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추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곳의 노동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뚫어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이, 이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자본만이 아니다. 노동계급 역시 부단히 움직이고 운동한다. "내가 목격하는 그 순간에도 목적물은 운동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처럼, 자본이 뭔가 압박을 하는 그 순간에도 노동자들은 저항을 조직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지난 11월 29일, 프랑스의 르노와 푸조 시트로앵 공장에서 동시에 파업이 벌어졌다. 공동 파업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두 개의 파업이 같은 날짜에 벌어진 것이다. 르노 자본이 스페인에서 얻어낸 양보안을 프랑스에서 밀어붙이자, 성난 르노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아울러 2014년에 공장을 폐쇄하겠다는 발표에 이어, '품질 불량'을 이유로 5명의 조합원을 징계위에 회부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푸조 시트로앵의 오네 공장 노동자들이 즉각 생산라인을 멈춰 세우고 파업을 벌였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노동자들도 즉각적인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 우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 유럽 노동자들의 저항 소식들을 현장에 전파하고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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