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에 관한 나의 몇 가지 이야기

[이 많은 작가들은 왜 강으로 갔을까?]<1> 소설가 한강

그들은 왜 강으로 갔을까. 이미 살아 있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묘한 역설. 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파괴'의 현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했을까.

이제는 막바지에 치달은 4대강 사업에 관한 세 권의 책이 출간됐다. 고은 외 99명이 쓴 시집 <꿈속에서도 물소리 아프지 마라>(한국작가회의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엮음, 이하 아카이브 펴냄), 강은교 외 28명의 산문집 <강은 오늘 불면이다>(한국작가회의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엮음), 성남훈 외 9명이 참여한 <사진, 강을 기억하다>(이미지프레시안 기획)가 그것들이다.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문인들과 사진가들이 기록한 '강의 오늘'을 <프레시안> 지면에 소개한다. 오늘도 포클레인의 삽날에 신음하는 '불면의 강'의 이야기는 한 달여 동안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편집자>


ⓒ노순택

1
외자인 내 이름은 강이다. 한자로 큰 내 강江을 쓴다. 강처럼 길디길게 흐르라고, 해가 비치면 밝게 반짝이라고 지어준 이름일 게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이름을 가지는 게 어렸을 때부터의 소원이었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에 넘치게 아름다운 이름이기도 하다. 허물없는 사람들은 나를 강아, 라고 부른다. 그 발음이 문득 뭉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2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는 오래된 어린 시절부터―아니,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된, 강보에 싸여 있던 시절부터―나는 기차와 버스에 실려 여행을 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광주였지만, 부모님의 고향이 남해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 모두 그곳에 자주 내려갔다.

여행은 대체로 고단했다.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멀미를 심하게 했기 때문에 더 고단하게 느껴졌다. 멀미약을 먹고도 괴로워서, 앞좌석 등받이에 이마를 꼭 붙이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구역질을 참곤 했다. 그 시절의 버스는 왜 그리 느리고 덜컹거렸던지. 얼마나 자주 정차하고, 자꾸만 갈아타고, 더 기다려야 하고, 참아야 할 시간은 고무줄처럼 끝없이 늘어나기만 했던지. '다 왔다'는 어머니의 말은 어느 때건 믿을 수 없었다. '다 왔다'는 말을 금세 번복하고는 "당 멀었다, 잠을 좀 자봐라……" 하고 나를 달래곤 하셨으니까.

열한 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뒤로 여행 시간은 배로 늘어났다. 그 사이 다른 지역의 교통은 나아졌지만, 부모님의 고향만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개발이 되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은 아직 어린 오빠와 나 둘이서 보호자 없이 여행하게 하셨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고속버스로 내려가 외가에서 여러 날을 묵고,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장흥까지 가서는 하루에 두 번 있는 군내 버스를 탔던, 버스가 없을 때는 재를 넘어서 갔던 그 먼 길. 오빠와 나는 사회과부도에 실린 지도의 지명들을 손톱으로 짚어가며, 지도를 돌리고 돌려서 방위를 짐작해서는 햇볕이 따갑게 쬐지 않는 좌석에 앉으며, 잔돈을 아껴 보름달 빵을 사먹으며, 겁 없이 킥킥거리며 긴 여행을 했다. (그때쯤엔 많이 자라서 다행히 멀미를 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다. 그 시절 차창 밖으로 끝없이 흘러가던, 물리도록 보고 또 보았던 풍경의 아름다움을. 어쩌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면 더욱 애틋하게 눈을 가리던, 순하디순한 산과 들과 논배미들을. 수없는 비늘을 뒤척이며 고요히 흐르던 강들을.

3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고향에 내려가 정착하셨고, 이제 나는 아이를 데리고 부모님 댁에 다니러 가곤 한다. 교통이 조금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먼 곳이어서, 아이는 기차와 버스 여행을 퍽 지루해 한다. 그래서 고심 끝에 궁리해낸 것이 '강 찾기' 놀이다. 큰 강이든 실개천이든, 흐르는 물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 '저기 있다!'라고 소리치고, 그 강의 크기만큼 꿀밤을 먹이는 것이다. 강의 널따란 하류를 만나면 백 대, 크지 않은 지류는 삼십 대나 사십 대, 논두렁 옆으로 흐르는 실개천은 다섯 대……. (실제로 꿀밤을 먹이기보단 꿀밤의 횟수를 보태고 빼는 일에 이 놀이의 묘미가 있다.) 아이가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한 이 흥미진진한 놀이 때문에, 일단 기차를 타면 두 사람 모두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아이가 창가 자리에 앉기 때문에 내가 조금 불리하다).

"저기 있다!"
"저기 있다!"
"저기 있다!"

금광을 찾은 것처럼 아이가 소리칠 때마다 흠뻑 두 눈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들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 흔히 이야기하는 '금수강산錦繡江山'이니 '산 좋고 물 좋다'는 말을, 이 놀이를 하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얼마나 섬세하고 맑은 강들이 무수히 흐르는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노순택

4
지난겨울,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곳곳에서 발파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접한 밤, 이상하게도 아침까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의 등과 허리를 누군가가 강제로 밟아 부수고 있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선잠에서 문득 눈을 뜰 때마다, 발파 작업과 함께 사라졌다는, 인근의 숲 어디선가 두려워하며 뒤척였을 수달들의 눈이 불쑥 어둠 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며칠이 흐른 뒤, 보를 건설하는 강의 바닥에 콘크리트를 바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비슷한 괴로움을 느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따뜻한 살과 뼈를 바르고 거기 콘크리트를 채워넣는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작업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크고 작은 강들, 아무런 쓸모 없이 흐르는 개울, 무성하게 풀이 웃자란 천변……. 이 모두가 온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다.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삶이 뿌리째 흔들린다고 느낄 때 강 앞에―어떤 인위적인 구조물도 없는, 수천 년을 늙었으며 동시에 새벽마다 새로 태어나는 강 앞에―서본 사람이라면 안다.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만물 가운데 아주 작은 존재로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속절없이, 그러나 뜨겁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의 무게를.

ⓒ노순택

5
왜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일까. 왜 '살린다'고 말하면서 돌이킬 수 없이 죽이려 하는 것일까. 그토록 많은 혈세로 엄연한 생명을 파헤치는 것일까. 강보에 싸여 있던 시절부터 우리가 평생 동안 보고 또 보았던 강들, 사무치는 빛으로 우리 몸에 새겨진 모든 것을 허락 없이 부수려는 것일까.

우리는 이 세계를 가진 것이 아닌데. 잠시 이곳에 깃들어 있을 뿐인데. 하루하루 우리 몫의 삶을 조금씩 덜어 쓰다가, 축복이며 슬픔인 이 생명을 언제고 놓아주어야 할 텐데.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강들은 말없이 흐르다가, '저기 있다!' 하고 소리치는 누군가의 눈에 찬란하게 어른거릴 텐데…….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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