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글] "내가니별이다"

故 박지연씨 "납 연기에 역겹고 머리 아플 지경…"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3월의 마지막 날, 채 피지 못한 꽃 한 송이가 여린 숨을 거두었습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카페에 들어갔다가 알게 된 소식 앞에 가슴이 먹먹해지던 순간의 망연함이라니요!

여고 3학년 때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 중이던 만 스물셋의 박지연. 언젠가 카페 앨범란에 올라온 그녀의 얼굴 사진이 떠올라 황급히 찾아보았습니다. 크고 선한 눈망울과 화사한 표정의 그녀는 20대 초반의 처녀들이 갖고 있는 발랄함과 아리따움, 그 자체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더 이상 지상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 ⓒ프레시안

박지연 씨는 삼성전자 안양공장에서 몰드(Mold) 공정에서부터 피니시(Finish) 공정까지 다양한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그녀가 산재신청을 한 후에 근로복지공단이 구성한 자문의협의회에 나가서 진술한 내용을 찾아 다시 읽어 봅니다.

……엑스레이 설비는 10년이 넘은 노후설비라 안전장치 등 잠금장치조차 없어 바쁘게 일하다 보면 설비가 켜져 있는지도 모른 채 문을 열고 닫고 작업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피니시(Finish) 공정에선 …… 245℃의 녹아 있는 납(Solder)에 담가 납을 입혀 제품에 납이 잘 입혀지는지 테스트하는 도금접착성 검사를 했습니다. 납이 입혀지면 세척제 역할을 하는 141B 약품에 담근 다음 스코프(Scope) 검사를 하는 작업을 수없이 했습니다.
납에 제품을 담글 때, 하얀 연기가 나는데 그 연기는 코로 바로 흡입이 되어서 역겹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며, 플럭스 용액과 141B 용액을 교체하며 다루는 과정에 화학약품이 손에 묻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장갑이라고는 면장갑을 착용했지만 약품이 그대로 손에 스며들었고 물로 씻어도 약품이 남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마스크를 하지 않았고 실험 시 필요한 안전 보호 장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위와 같은 증언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 발병과 작업환경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며 산재신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골수이식 수술을 받아 어느 정도 완쾌되는가 싶었던 박지연 씨가 갑작스레 재발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작년 9월의 일입니다. 그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3월 26일에 병세가 위중하여 중환자실에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박지연 씨는 며칠 만에 끝내 숨을 거두었고, 고인의 죽음을 위로하듯 빗방울이 먹먹한 가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지난 3월초에는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같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 씨의 3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역시 같은 병으로 숨진 고 황민웅 씨의 부인이 '그 동안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도 주변에 둘러선 경찰들은 불법집회이므로 해산하라는 경고방송을 해댔습니다. 삼성전자 본관 입구 위에 달아 놓은 감시 카메라는 그 순간에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고요.

최근에는 유죄판결을 받고 뒤로 물러나 있던 삼성의 사주 이건희가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공영방송이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열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박지연 씨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삼성 직원들이 중환자실 앞에 죽치고 있었다는 얘기까지 들려오니, 더러운 소식만 들려오는 귀를 흐르는 물에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마구 후벼 파내고 싶어집니다.

박지연 씨는 반올림 카페 게시판에 딱 두 번 글을 올렸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진이 올라온 것에 대한 민망함을 나타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집단 발병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는 반올림 동지들에 대한 고마움과 투병 의지를 표현한 글입니다. 글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지연입니다.
반올림 가족 분들 투쟁(?)하시느라 모두 고생이 많으시죠?? 가끔 들어와 보기는 하는데 글이란 건 처음 남겨 보네요. 쑥스럽기도 하구요.
일 봐주시느라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전 항암치료 꼭 잘 이겨내서 건강한 모습으로 나중에 또 인사드릴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감기조심하세요. 수고하세요.^^


2010년 1월 19일 22시 04분에 남긴 글입니다. 내용보다도 글 위에 적혀 있는 박지연 씨의 닉네임, '내가니별이다'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너의 별이 되어 주고 싶었던 만 스물셋의 처녀가 품고 있었을 꿈과 소망을 더듬어 봅니다. 건강한 몸을 되찾아 같은 또래의 남자와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을 것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영화를 보러 다니고도 싶었을 겁니다. 이건희처럼, 그 뒤를 이을 이재용처럼 세상을 돈으로 쥐락펴락하는 거창한 꿈을 꾸지는 않았겠지요.
▲ ⓒ프레시안(여정민)

이제 박지연 씨는 어둔 밤하늘로 올라가 한 점 별이 되어 빛나고 있을 겁니다. 박지연 씨, 아니 '내가니별이다' 님을 향한 우리 모두의 참회를 담은 속삭임이 들리는지요? '그 동안 당신의 별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말씀하신 대로 박지연 씨, 당신이 나의 별입니다. 이 세상이 당신에게 안겨준 고통을 모두 내려놓고, 당신의 소망대로 나와 우리 모두의 별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결코 당신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박지연 씨, 이제 슬픔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전 세계 반도체 산업 현장의 실상을 알리며 싸우고 있는 미국의 활동가 테드 스미스 씨가 말했다는 '슬픔을 조직하라'가 우리의 슬로건이 될 것입니다. 조직된 슬픔의 힘으로 백혈병 집단 발병의 진실을 밝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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