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요 몇 주 사이에는 주식 시장에 다시 돈이 몰린다느니 미국 경제가 되살아난다느니 하는 낙관적 전망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태풍의 소강 국면인 것만 같다. 몇몇 단기적인 긍정적 지표들은 또 다른 금융 부실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시대의 방향이 바뀌니 자연 세상인심도 바뀐다. 한때는 이제 자본주의 시대가 천년만년 계속된다는 '역사의 종말'론이 득세하더니, 요즘은 자본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사상가들이 서점 신간 코너에 이름을 들이민다. 그 중 대표는 단연 칼 마르크스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청년 비정규직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새삼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주목 받는다고 한다. <자본>을 만화로 각색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 서적 시장에서 자본주의 위기의 영향을 마르크스가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함께 케인스도 각광을 받고 있으며, 칼 폴라니나 소스타인 베블런도 재평가된다. 생태주의의 입장에서도 과거 마르크스주의 전통만큼이나 날카로운 자본주의 비판이 제출되고 있다.
즉, 이제 '자본주의 비판=마르크스'는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확인한 것 중 하나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본주의 비판'의 목록도 사뭇 풍요로워졌으며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제 그 한 부분 정도의 위상만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아니고서는 접할 수 없는 비판의 각도
하지만 명불허전. 마르크스는 그래도 역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이제 한 부분이지만, 어쨌든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그게 없으면 전체가 작동할 수 없는 그런 부분이다.
왜 그러한가? 그의 이름을 내걸었던 탈자본주의의 국가적 시도들이 너나없이 실패했는데, 왜 아직도 이 두 세기 전 사상가를 불러낼 수밖에 없는가?
마르크스에게는, 다른 자본주의 비판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본주의 비판의 어떤 독특한 각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아니고서는 접할 수 없는 자본주의 비판의 독특한 각도. 그 때문에 아직도 어떠한 자본주의 비판이든 마르크스의 성취를 염두에 두고 이와 대화하며 자신의 성취와 서로 견주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다.
그 각도란 곧 노동자의 시각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공공연히 임노동자의 시각을 전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굳이 사족을 달자면, 이때의 '노동자'란 한국 사회에서 흔히 '노총'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그런 한정된 계층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나 청년 실업자, 넥타이 부대 혹은 '식당 아줌마'까지 포괄하는 어떤 이름이다.
그래서 <자본>에서는 '착취'니 '잉여가치'니 하는 개념들이 그토록 중요하다. <자본>은 이게 현실에서 '절대적 잉여가치'니 '상대적 잉여가치'니 하는 독특한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당시 영국 산업 현실을 총동원하여 공들여 상세히 설명한다. 이 모든 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공장 안에서, 기업 안에서 나날이 벌어지는 그 일들이다.
제목에서 이미 확연히 드러나듯이 <자본>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자본'이다. 하지만 <자본>은 이 주인공을 철저히 임노동자의 시각에서 파헤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주인공이 임노동자와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예상 외로 상처받기 쉽고 불안정한 무엇임을 밝혀낸다.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임노동계급과 관계 맺는 숱한 계기들이 없으면 자본 축적 운동은 진행될 수 없다. 나날이 전쟁이요, 결코 공짜로 되는 게 없다.
즉, 자본이라는 괴물의 생존의 비밀은 우리 임노동자의 일상 속에 있다. 우리의 종속이 그 기반이며, 따라서 어쩌면 이것이 역으로 우리의 가능성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이자 그가 인류의 지혜에 보태놓은 결정적인 기여다.
한데 마르크스의 <자본>이 이렇게 노동자의 시각을 바탕에 둔 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노동자를 위한,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가 읽기 위한 책인지는 그 독일어 초판 발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의문거리였다. 정말 많은 노동자들에게 읽힐 책을 쓰고 싶었다면, 저자는 절대 책의 초입에 '사용가치', '가치', '교환가치 혹은 가치형태의 전개', '상품물신주의' 등등에 대한 그 악명 높은 장광설을 늘어놓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저자는 그렇게 했다. 그래서 스스로도 좀 미안했던지, 초판 서문에서 제1장 '상품'은 읽기 쉽지 않다고 사전 경고를 달아놓았다. 너무 어려워도 거기서 포기하지 말고 그 뒷부분을 꼭 읽어봐 주시오, 그 다음부터는 꽤 괜찮은 이야기거든,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이 뒤늦은 안내문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자들이, 저자 자신이 그 책의 마땅한 독자라고 생각했던 노동자들 자신이, 제1장에서 열이면 열 다들 한숨을 쉬고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는 책장을 덮는다. 필자 자신 노동자들과 함께 <자본>을 강독할 때마다 이것을 실감한다. 1장을 넘어 2장, 3장으로 넘어가는 게 꼭 여름날 가파른 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그래서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150여 년 전의 그 저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초고를 쓰고 또 다시 고쳐 썼는지 잘 알면서도, 매몰차게 말해주고 싶다. "다시 써!"
노동자의 일상과 상식으로 다시 쓴 <자본>
▲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강상구 지음, 손문상 그림, 레디앙 펴냄). ⓒ프레시안 |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한 동안, 적어도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는, 이 개작권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 필자가 이에 도전하고 나섰다. 진보신당 기획실장으로 일했고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문화과학사 펴냄) 등의 책을 낸 바 있는 강상구가 그 필자다. 그리고 그가 행한 개작의 산물이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레디앙 펴냄)라는 책이다.
<자본> 개작판 자체가 희귀하다 보니 이 책은 출간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것 이상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자본>의 '성공적인' 개작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몇 가지 뚜렷한 미덕을 구비했다.
우선 <자본>의 체계에 강박되지 않았다. <자본>의 장, 절 구성을 그대로 좇아가면서 설명만 새로 쓰는 식의 해설서와는 다르다. <자본>의 내용을 설명하되 그 체계를 자유로이 재구성했다.
<자본>의 기반이 되는 역사유물론의 주요 명제를 맨 앞 장에 미리 소개하고, 악명 높은 '상품' 장은 세 개 장으로 나눠서 상세하고 평이하게 설명한다. 반면 항상 고리타분하게 다가오는 <자본> 제2권 같은 경우는 과감하게 축약해서 정리한다.
저자가 염두에 둔 구성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상식을 지닌 독자가 자연스럽게 가질 만한 의문의 연쇄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는 대화가 빈번이 나온다. 문체도 구어에 가깝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강상구의 통역을 거쳐 마르크스와 대화하듯 자신의 궁금증과 <자본>의 답변을 오갈 수 있다.
말하자면 저자는 이론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두거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만약 마르크스의 명제들, 법칙들, 그 전반적인 이론 체계에 붙잡힌다면, 대학 강의를 위한 개론서는 쓸 수 있을지언정 생활인과의 거리는 여전히 좁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저자는 아주 능숙하게 이론의 언어를 생활의 언어에 접속시킨다.
접속의 대상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론은 역사와도 만난다. 이 책의 각 장에는 풍부한 역사적 사례가 부록처럼 뒤따른다. 가령 노동력을 상품으로 다루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설명한 뒤에는 농민들이 농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몰려들고 그래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연명할 수 없게 된 역사적 과정(영국의 경우, '인클로저 운동')의 소개가 따라붙는다. <자본>, 우리 시대, 또 다른 자본주의 시대들 사이의 이러한 3중의 대화가 독자들의 이해를 보다 입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사실, 그래도 입문서이기 때문에 한계가 없지는 않다. <자본> 1, 2, 3권의 내용을 한 권에 압축한 탓에 어떤 대목에서는 너무 소략한 감을 준다. 복잡한 이론들의 장황한 소개를 피하다 보니 두루뭉수리하게 처리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공황을 다루는 14장과 15장이 그렇다. <자본> 전체에서도 그 해석을 놓고 가장 이견이 분분한 대목 중 하나이니 만큼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 공황 문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논란을 최대한 비껴간다. 그러다 보니,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 전공자가 본다면, 상당히 아쉬움을 표할 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모든 입문서의 숙명인 '속류성'의 덫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겉으로는 간명한 듯 보이는 저자의 문장들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 속의 복잡하고 치열한 논쟁과 그 결과가 반영돼 있다. 상품에서 화폐가 발생하는 과정을 실제 역사적인 사실로 해석할지, 논리적인 가정으로 해석할지에 대해 후자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서술하는 게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마르크스 '이후'의 이론들을 과감히 동원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논지를 보완하기도 한다. 브로델-아리기의 '역사적 자본주의' 관점을 소개하는 부분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꼭 빠뜨려서는 안 될 이 책의 장점은 손문상이 그린 삽화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본문의 내용을 꿰뚫는 이들 삽화가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남은 숙제, '연대'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는 우리가 자본주의에 '바이(Bye)'를 외쳐야 할 이유를, 마르크스가 <자본> 1, 2, 3권에 걸쳐 장황하게 제시한 그 이야기들을 간명하게 풀어낸다. 세계 자본주의가 미증유의 장기 위기 시대에 접어든 만큼 이런 주장이 어느 때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꼭 함께 짚어 봐야 할 게 있다. 오늘날 위기에 처한 게 자본주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준거점으로 삼은 그 임노동계급 역시 지금 위기다.
수 세대를 이어온, 그리고 최근 더 극성스러워진 자본주의는 노동계급 내부에 커다란 균열과 분단을 낳았다. 우리의 경우 이것은 무엇보다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이들 사이에는 연대는커녕 경쟁과 차별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도대체 이들이 하나의 계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자체가 쟁점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임노동계급을 준거점 삼아 비판의 각도를 잡은 <자본>은 21세기 자본주의 비판의 무기로서 과연 어느 정도나 위력을 가질 수 있을까? 혹시 자본주의의 약점에 대한 설명력은 여전하되 그 대안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실효성을 상실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물음에는 현실의 한 가지 차원이 지워져 있다. 이론과 실천의 상호관계, 역사 속에서 입증된 그 놀라운 역동성 말이다.
도서관에 꽂힌 마르크스의 책들과 지금 그대로의 노동자들만을 염두에 둔다면, 임노동자의 시각에서 비판과 대안을 써나간 그 사람의 시도는 임노동자라는 말에 판돈을 건 도박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그 책을 '읽는' 일이 벌어질 때 상황은 달라진다.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드디어 역사가 그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이 때, 애초에 투기로만 보였던 그 기대는 오히려 씨뿌리기였던 것으로 다가온다.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있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그 책을 읽는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접속이 시작되고 대화가 피어나며 새로운 공동의 실천이 싹트게 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대'의 물꼬를 트려는 것이다.
저자 자신 이 책의 말미에서 그러한 소망을, 소박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밝힌다. "지금이야말로 개인만의 행복을 위한 처세가 아니라 연대(저자 강조)가 중요합니다. MB 빼고 다 연대합시다. 어차피 MB는 <자본론> 안 읽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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