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납품 지연'에 "사기당한 것 같다"던 李대통령…문제는 '최저가 낙찰제'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일단 먹고, 계산은 나중에" 식의 경쟁 구도

현재 진행 중인 대통령 업무보고 과정에서 한국철도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드러났다. 바로 철도차량 산업 분야가 처한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토교통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다원시스가 납품을 지연했음에도 열차 계약금의 절반 이상이 이미 지급된 점을 두고 "정부 기관들이 사기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네트워크 산업인 철도는 전국적 망을 가진 거대 장치산업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막대한 투자와 유지비용이 필요하다.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것이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다. 경쟁체제란 이름으로 찢기 시작하면 필요 없는 중복비용을 지불하거나 본질을 망각한 경쟁을 위한 경쟁에 매몰되어 산업 자체가 황폐화되고 결국 국민 불편으로 돌아온다. 철도를 구성하는 3요소는 철도망을 이루는 시설과 열차를 운행하는 운영, 그리고 차량 제작 산업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바람직한 구조는 이 3요소가 통합된 체제이겠지만 각 국가의 철도 역사나 사회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최소한 유기적인 보완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철도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 중의 하나인 차량 제작 산업은 정부가 정책으로 면밀하게 주도하고 지원해야 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국토부는 주기적으로 마련하는 철도산업발전기본계획에 이를 포함하지 않고 시장에 전적으로 맡겨놓은 상태다. 한국은 세계에서 5번째로 고속철도 운영을 시작한 나라로 철도 분야의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전체 영업거리의 한계로 인하여 차량분야 시장은 협소하다. 때문에 차량제작사의 난립은 경쟁의 효과를 얻기보다는 자칫 차량제작분야의 국제 경쟁력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

한때 한국 철도차량제작 분야는 대우, 한진, 현대 등 대형 중공업 회사들이 경쟁하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작은 내수 시장 규모에 부침을 겪다가 IMF를 지나며 현대에 흡수되어 로템으로 일원화 되었다. 이후 2010년경부터 철도차량제작 업체들이 새로 등장하고 이들 간에 인수 합병 과정 등을 거처 현재 현대로템, 다원시스, 우진산전 삼각구도로 경쟁하고 있다. 문제는 앞서 지적한 대로 한국 철도차량제작 시장은 이들 업체가 적절히 사업을 영위할 만큼의 시장 규모가 되지 않기 때문에 세 회사는 제로섬 게임을 해야 한다. 어느 한 업체가 대량의 차량을 수주할 경우 다른 업체는 안정적인 생산을 유지할 물량을 수주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철도 차량 입찰 경쟁은 회사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수주전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철도선진국들은 철도차량제작분야를 주요 국가 기간산업으로 간주하고 주력 업체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독일의 지멘스, 프랑스의 알스톰 등 차량제작사는 자국을 대표하는 고속철도 차량은 물론 국제철도 시장에서 다양한 철도 차량을 공급함으로서 파이를 키워가고 있다. 이미 충분히 큰 회사들도 규모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서로 간 인수와 합병으로 더 몸집을 불리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은 히다치, 가와사키, 미쓰비시 등의 차량제작사가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특이한 점으로 일본 최대의 철도회사 동일본 JR의 경우 JR종합차량제작소라는 직할 자회사를 제작사로 두고 있다. 자신이 사용할 철도차량을 직접 제작함으로써 차량 구매 비용의 적정성은 논란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토교통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 최고의 철도차량제작사는 중국 중차이다. 중국 중차는 중국 북차와 남차라는 거대 차량제작 회사를 하나로 합쳐 세계 최대의 차량 제작회사로 발돋움 한 뒤 세계 차량시장 점유율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속철도망과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망을 갖고 있기에 탄탄한 내수 시장이 받쳐주는 가운데 아프리카와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이 같은 양적 확대를 바탕으로 중국의 철도 기술력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최소한 철도 분야에서 만큼은 중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선진국이 되어있다. 세계 철도차량제작 분야의 흐름은 덩치를 키우고 그 힘으로 내수 시장을 선도하며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게 시장 자율에 맡겨서 경쟁체제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또 이 경쟁 구도 속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치가 있는 데 바로 '최저가 낙찰제'다. 발주 업체가 선정한 기준에 충족하면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입찰 업체가 선정되는 방식이다. 업체의 가격 횡포를 방지하고 예산 낭비를 막는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최저가 낙찰제는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업체들이 담합하여 교대로 낙찰을 받는 고전적인 방식부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낮은 가격을 써내 일단 수주부터 받고 보는 식이다. 그 대가로 안전에 문제가 생기거나 유지보수비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문제는 업체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구호 같은 "일단 먹고, 계산은 나중에" 방식이 차용됐다.

최저가 입찰제의 또 다른 문제는 국내 철도 차량 제작 기술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TGV 기술을 들여와 갖은 노력 끝에 고속철도 자체 생산이라는 기술 독립을 이루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오랜 연구개발 끝에 달성한 성과였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23년 1조 원대 SRT 고속차량 2차 발주 경쟁에 국내기업과 스페인 탈고가 연합한 컨소시엄이 입찰에 나섰다. 만약 스페인 탈고가 참여한 컨소시엄이 낙찰받았다면 한국고속철도 차량 제작 기술을 원천 보유하고 있는 로템과 그 협력사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국내 주력 철도 차량 제작사가 내수시장에서 밀리는 만큼 연구 개발이나 선진 기술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새로 도입되어 달리는 ITX-마음의 핵심부품인 견인전동기는 중국 중차 제품이고 신호 보안 시스템의 주요 부품인 ATP에는 히다치라는 일본 제작사의 영문 이니셜이 선명히 박혀있다. 환경부가 전기버스 도입을 추진했더니 값싼 중국 전기버스 제조사가 시장을 장악해 국내 전기버스 제작 생태계가 무너졌다고 이재명 대통령이 지적한 적이 있다. 최저가 입찰제가 치열한 국제 경쟁속에서 국내 산업을 위협하는 국토부판 전기버스 사례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대통령 업무보고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제작사가 납품 기일을 못 맞춰 운영사인 코레일의 열차 운행 전략이 차질을 빚고 있다. 여기에 문제는 더 있다. 운전실이 좁게 만들어지는 바람에 기관사가 좌석에 앉아 몸을 조금 돌리더라도 무릎에 객실 냉난방 조절기가 닿아 제멋대로 돌아간다. 안전을 위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운전실 안은 냉난방 능력이 모자라 여름엔 덮고 겨울엔 추워서 보조 수단을 갖춰야 할 판이다. 승무 교대나 차량기지에서 수직 이동으로 승하차 해야하는 운전실 출입문은 손잡이 구조가 불편해 안전사고 위험까지 있어 기관사들의 불만이 크다. 하지만 신형 차량이라 폐차연한 30년이 도래할 때 까지는 마땅한 해결방법이 없다.

필자는 로템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철도산업의 생태계에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해야한다. 로템 독주 시절에 경쟁자가 없다고 차량 가격을 너무 높게 책정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입찰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한 행위를 했다는 지적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들은 입찰제도의 혁신이나 경쟁 입찰 과정의 엄정한 관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철도차량제작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정부의 가이드라인,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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