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 감염인들…"아프지 않아도 죽고 싶었다"

국내 최초로 열린 감염인들의 인권증언 발표회

1981년 최초 발견 이후 '죽음의 병'으로 알려졌던 에이즈. 그러나 그간 치료제가 개발되며 더이상 에이즈는 당장 죽거나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 아니라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이 됐다.

그러나 많은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들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죽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다. 왜 그럴까?

1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진행된 'HIV/AIDS 감염인의 인권 증언, "말할 게 있'수다'"는 국내 최초로 HIV/AIDS 감염인들의 삶을 직접 그들의 입을 통해 공개적으로 들어보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 행사는 지난 7월 인권단체연석회의,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 연합 등이 공동으로 발족한 'HIV/AIDS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예방법 대응 공동행동'의 주최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직접 무대에 출연한 3명의 감염인들의 증언, 그리고 영상과 자료집을 통해 감염인들의 다양한 삶이 소개됐다.

"호적정리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나라가 한국"

"HIV/AIDS 양성 판정을 알리던 병원 레지던트가 내 누나에게 '평소 동생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그런 병에 걸렸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누나는 그때 받았던 모욕에 치를 떨었다. 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1994년 어느날. 보건소에서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고 통보했다. 다음날 일하던 레스토랑에 사표를 내고 그만 뒀다. 직장으로 찾아와서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그만두어야 했다는, 언젠가 본 잡지기사 때문에 너무 두려웠다. 병명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할까 걱정만 하면서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남의 눈이 무서워 검사도 두려운 나라가 한국이다. 직장 건강검진에 HIV 테스트가 포함되어,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나라가 한국이다. 호적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가족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수술일정을 체크하면서 '당신 호모냐'고 되레 큰소리 치는 의사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 HIV/AIDS 감염인 인권증언대회 ⓒ 'HIV/AIDS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 예방법 대응 공동행동'

이날 참석한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이었다"는 점이었다.

성생활이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 등 사생활에 대한 추궁을 넘어서 감염 사실을 알고 난 뒤 가장 친했던 친구와의 결별, 친척들의 외면 등은 감염인들이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심리적 고통'이었다.

또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빈곤으로 내몰린 경우, 치과 등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거부해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 등 사회적 차별로 인해 감염인들이 겪는 '물리적 고통'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감염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죽음을 생각한다"

에이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주위의 시선이나 차별뿐만 아니다. 이들은 "감염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많은 환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과 '곧 죽는다'는 두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처럼 질병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HIV에 감염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 살거나,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 내가 처음 감염사실을 알았을 때 정보를 제대로 알려고 했다면, 아니 인터넷을 접했을 때 검색창에 '에이즈' 세 글자만 쳐봤다면 지금과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감염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죽음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몇 사람의 감염인을 간병하며 이 질환 때문에 가족과의 연락이 두절되고 여러가지로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게 됐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없이 돌아가신 분들을 보게 되고 감염인 스스로조차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사람들을 만났다."

"일상적인 접촉은 문제없어…공포는 과장된 것"

이들은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HIV/AIDS 감염인들을 시한폭탄처럼 여기는 정부의 '에이즈 예방정책'과 정부의 일방적인 정보에 의거해 오도된 정보를 배포하는 언론들의 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1987년 정부가 후천성 면역결핍증 예방법(에이즈예방법)을 제정한 뒤 이 법은 이제까지 네 차례나 개정됐지만 '감염인의 이동에 따른 신고의무'나 '성관계를 포함한 일상생활을 감시하는 조항'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공동행동'은 "에이즈는 감염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예방될 수 있는 질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감염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정책은 환자들을 편견과 차별로 몰고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의학 전문가들은 "에이즈는 일상적인 접촉으로 전염되지 않으며 혈액이나 정액에 직접 접촉할 경우에만 전염된다"며 에이즈에 대한 일반적인 '공포'는 과장돼 있다고 지적한다. 외국에서는 HIV/AIDS 감염인들을 격리시키지 않으며 수영이나 샤워장 등도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다.

"질병은 질병으로만 봐달라"

지난 14일 보건복지부는 '에이즈 예방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여기에는 단순히 건강상의 이유로 해고하는 등 '감염인에 대한 일체의 근로 차별'이 금지되며 '감염인 사망시 신고의무제 폐지' 조항이 포함돼 있다. 또 감염인에 대해 치료를 권고하되 이에 응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감염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해 치료 명령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공동행동'은 "앞으로 에이즈예방법이 좀 더 감염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감염인들은 한결같이 "질병은 질병으로만 봐줄 것"을 당부했다. 이들은 "에이즈 환자가 마치 '뿔이 두 개고 혹이 달린 사람'인 것처럼 여기는 은유나 상상을 접고 한 명의 환자로 봐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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