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정상회의 '멘붕'에 '본드런'까지 본격화

[진단]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경제독립 문제"

그리스 사태로 불거진 유로존 위기가 유럽 정상들의 위기로 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유로존 위기 해결을 목적으로 18번째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진전된 해결책이 나오기는커녕, 양대 경제대국인 독일과 프랑스의 불협화음만 드러낸 채 끝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EU정상회의는 그리스 사태로 불거진 유로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국이 힘을 합해도 모자른 판인데, 입장차이가 예전보다 커지고 있으니, 실효성있는 방안에 대해 유럽 차원의 합의가 나오기는 더욱 어렵게 됐다는 회의론이 증픅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2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는 "프랑스의 새로운 좌파 대통령은 회담을 끝낸 뒤 독일 정상과의 차이점을 강조했으며, 이것은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인 언행"이라고 전했다.

▲ 23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정상회의에서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회담 직전 대화를 나두고 있다. 양 정상의 제스처부터 의견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AP=연합

인색한 독일, '의견 차이' 강조하는 프랑스

신문에 따르면, 우파 대통령이었던 전임 니콜라 사르코지는 일부 의견에 차이가 있어도 유로존 위기에 대한 단합된 리더십을 위해 어떤 지점에서 의견이 모아졌는지를 강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후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사르코지와 달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정상회담장에 들어서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양국이 주도해 만든 가장 근본적인 합의안마저 흔들리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해 만든 유럽의 재정통제 방안(신재정협약)에 대해 올랑드 대통령은 긴축 노선을 완화하는 대신 재정위기에 빠진 회원국들에 대한 지원과 성장을 강화하는 변화를 요구하고,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재정협약을 존중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당장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문제에 대한 대책도 일각에서는 "유럽의 정책당국자들이 연옥에 빠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이다. 기껏해야 EU 정상들은 이번 회의에서도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를 희망한다"면서도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에 대한 비상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말을 흘리고 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머물 것이라는 얘기는 희망사항이고, 실제로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막으려해도 막을 수 없을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 것이다.

유로본드, 합의 불가능한 '최후의 해법'

이날 씨티그룹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할 확률을 75%까지 끌어올리고, 시기는 내년 1월쯤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장에서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을 훨씬 높게 보고 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쪽은 대체로 EU 관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신뢰를 잃었다고 일축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유럽 각국이 마련하고 있는 비상대책이라는 것도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국채 시장과 은행 등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의도를 의미할 뿐 실제적인 대책이 어떤 것이 있을지는 아무도 얘기를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유로존 위기 최후의 해법'이라는 유로본드가 거론된 것이다. 유로존 통합채권이라고 할 수 있는 유로본드는, 유로존 개별 회원국이 발행하는 국채가 아니라, 유로존 전체가 보증을 하는 채권을 말한다. 유로본드 발행이 허용된다면 그리스처럼 이제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는 나라도 최대한 싼 이자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유로본드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유로본드가 부실화되면 최종적인 부담을 져야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독일은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결사반대의 입장을 고수했다.

전문가들 대부분도 독일 유권자들이 유로본드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막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헌법으로 면세 보장한 그리스 선박업

유로본드에 회의적인 입장에 서있는 전문가들은 그리스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날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그리스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보다 고질적인 문제는 탈세나 납세 거부에 따른 세수 부족이다.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긴축을 실행하려 해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이터> 통신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제2도시 테살로니키 등의 세수가 이달 들어 15~30% 감소했다는 통계도 제시했다. 그리스는 납세 의식이 희박해 지하경제 비중이 GDP 대비 25%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높아질 유로화는 보유하고, 세금을 내도 가급적 나중에 내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최고 부유층들에 대한 비난도 고조되고 있다. 그리스는 정경유착으로 재벌이 누리는 특혜가 심한 나라다. 관광업과 함께 그리스의 대표적인 산업인 해운업은 지금까지 법으로 소득을 면세 받는 특혜를 누려올 정도다.

세수가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그리스 언론에서 해운업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뉴욕타임스>는 "그리스에서 뱅크런이 일어나고 유럽에서는 그리스가 추가 구제금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논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그리스에서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헌법으로 면세가 보장된 선박 재벌, 석유와 가스, 언론, 금융 등 기간산업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해온 독과점 기업들"이라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유럽의 위기는 프랑스의 개혁, 이탈리아의 책임정치에 '인색하지 않은 독일'이라는 거의 불가능한 3가지 요소가 합쳐져야 한다는 농담 같은 말이 나온다. 여기에 현재 무정부 상태로 빠진 그리스는 이 3가지 요소가 합쳐져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다.

'리더십 실종' 사태에 '본드런' 가세

25일 <파이낸셜타임스>는 '뱅크런'에 이어 '본드런'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유럽 2위의 자산운용사 아문디와 영국 최대 자산운용사 '트레드니들'이 유로존 위기를 해결할 유럽의 정치력에 대해 좌절감이 커지면서 유로 채권 비중을 대폭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며칠 간 유로 채권 매도세가 이어지면서 24일 달러 대비 유로 환율은 22개월 저점인 1.2514달러까지 하락했다. 씨티그룹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무질서하게 전개될 경우 1유로=1달러 수준으로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문제는 '경제적 독립국가'로의 회귀라는 지적도 나왔다. 영국 런던대의 경제학 교수 코스타스 라파비차스는 <파이낸셜타임스>의 기고문을 통해 "그리스가 유로존에 머무는 한 서서히 말라 죽는 식민지 신세를 벗어날 길은 없다"면서 "유로존을 탈퇴하면 대가가 크다는 것이 서서히 죽어가야할 이유가 되지 않으며, 독립해야 그나마 살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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