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순간' 맞은 이명박,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정인ㆍ존 들러리 공동기고 "국제사회, 北과 대화채널 유지해야"

과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북한 '급변사태'를 촉발시키는 방아쇠가 되리라는 관측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지난 17일 김 위원장이 사망했는데도 북한에서는 별다른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고 있고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도 비교적 순탄하게 이뤄지고 있다.

연세대 문정인 교수와 존 들러리(John Delury) 교수는 21일 동아시아재단이 펴내는 계간지 <글로벌아시아> 공동기고문에서 이같은 상황을 지적하며 지금 필요한 것은 급변사태 계획보다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외교"라고 주문했다.

두 전문가는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정치적 위기나 붕괴 같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의 새 지도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대화 채널을 열거나 기존 대화 채널을 확장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오히려 김정일 사망을 기회로 한‧미‧중 등이 북한에 대한 새로운 개입정책을 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결단의 순간을 맞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기고문의 주요 내용이다. (
☞원문보기) <편집자>

▲연세대 문정인 교수와 존 들러리 교수는 21일 <글로벌아시아> 기고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결단의 순간'을 맞게 했다고 분석했다. ⓒ연합뉴스

김정일 사망, 무엇을 할 것인가?

17년간 북한을 통치했던 '친애하는 지도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른바 "급변사태 계획"의 근거로 여겨졌던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북한 정치사의 다음 장(章)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한국, 미국, 중국 등 핵심적 행위자들은 이 민감하고 중요한 전환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필자들은 지난 4월 발표한 글(☞원문 바로보기)에서 북한의 권력 승계 과정은 순조롭게 이뤄지리라고 주장했었다. 김정일 사망 이후 며칠 지나지 않은 현재까지 이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까운 장래에 정치적 위기나 새 권력 서열(pecking order)에서의 혼선이 발생할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즉각적인 분파 간 투쟁이나 대중 봉기, 체제 붕괴의 조짐도 없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시위대의 해"로 명명한 2011년, 독재자들이 쫓겨나 재판을 받거나 총살당한 이 해에도 '평양의 봄'은 기척도 없다. 김정일은 자연사했다.

가까운 장래에 위기가 없을 것이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의 한 고위 당국자가 필자 중 한 명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이유다. 이 고위당국자는 북한을 리비아와 비교하는 것은 "가소롭다"(laughable)고 말했다. 북한의 정치제제는 '뉴 페이스' 김정은을 중심으로 단결되어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아들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북한 건국의 아버지 김일성의 손자다.

김정은은 3종류의 이너서클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첫 번째 이너서클은 김정일 일가다. '단결'의 핵심적 징표는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고모부 장성택이 지난해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 본인과 함께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너서클은 최근 몇 년 사이 위상을 회복한 조선노동당이다. 노동당의 네트워크는 활기를 되찾았고, 지금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며 해외를 열심히 누비는 한편 자신들의 미래를 김정은으로의 세습과 결부시켜 보고 있다.

세 번째 이너서클은 군부, 즉 조선인민군이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군은 김정은과 권력 투쟁을 벌일 수 있지만 '아랍의 봄'이 일어난 국가들과는 달리 북한 군 고위관계자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징후는 없다. 군은 김정일이 1995년 주창한 '선군정치'의 최대 수혜자가 되어 왔다. 또 김정일은 군에 많은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측근을 통해 군을 통제해 왔다. 현재까지 군은 김정은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김정은이 가진 최고위 직함도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그렇다면 '이너서클' 밖은 어떨까? 노동당원이 아니며 '핵심 세력'도 아닌 2000만 명 이상의 보통 북한 주민들 말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처럼 추앙받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실용적인 북한 주민들은 새 지도부에 대해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놀랍도록 닮은 외모여서 북한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그들 국가가 새롭고 더 나은 시대를 열게 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북한에는 저항을 조직할 시민사회의 싹이 없다. 적어도 현재까지 모든 징후들이 가리키는 바는 북한 관영 매체가 말하는 그대로다. 북한 매체는 김정은이 북한의 "당과 군대와 인민의 탁월한 영도자"이며 김정일의 "위대한 계승자"라고 보도했다.

北의 장기적 딜레마는 "안보와 번영"

따라서 단기적으로 보면 정권 붕괴는 물론 정치적 위기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김정은이라는 새 리더십은 딜레마에 봉착할 수 있다. 이는 국제사회가 권력승계 과정에 대해 반응할 초점이 될 것이다. 그 딜레마는 북한 정권이 두 가지 상호배반적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에게 2012년이 강성대국, 즉 '강력하고 번영하는 위대한 나라'의 문을 열어젖히는 해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 목표에 대해 내세울 게 없겠지만, 김정일은 적어도 한 가지는 이뤘다. 핵 억지력이라는 '강력함'을 얻었다. 이제 다른 하나의 목표인 '번영'은 김정은에게 달렸다.

지난 몇 년 동안 북한은 국가 경제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였다. 중국과의 무역과 투자를 늘리고 경제특구 계획을 되살렸으며, 주민 복지를 향상시키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최근의 평양 방문 기회를 포함해 다수의 북한 관리들과 만나보면 이러한 변화가 가장 먼저 목격됐다.

문제는 김정은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번영을 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강성대국'으로 순탄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외국의 식량 원조나 경제적 도움이 시급히 필요하다. 포괄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외국의 투자와 무역, 금융 제공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북한 경제를 둘러싼 철조망과도 같은 제재의 체제가 우선 완화되고 궁극적으로는 해제돼야 하며, 제재 해제를 위해서는 북한이 핵을 실질적으로 포기(concession)해야 한다.

'안보 우선'에서 '안보와 번영'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북한 정치 체제는 위기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군부 내 일부는 애지중지하는 핵무기 능력을 포기하는 것에 반발할 것이다. 강경파들은 최후의 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북한은 이라크나 리비아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 지도부와 건설적 관계를 수립하면서 강경파들의 손에서 놀아날 위험을 피해야 한다.

국제사회, 대화 채널을 열어야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지역 내 핵심 행위국들에게 가장 현명한 길은 북한과의 대화 채널을 조속히 재개하거나 확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부에 대해 더 많이 알 수록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현재로서 북한은 장례식과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주력하면서 내부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김정은은 한국의 장례 전통이나 1994년 김일성 사망시의 전례에 따라 아마도 3년 정도는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한국, 미국, 중국이 북한의 새 지도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김정은은 보다 높은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미국은 이런 종류의 사전 접촉을 하기에 적합한 긍정적 모멘텀(동력)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인도적 지원과 비핵화 등의 주제로 북미 양자 간 대화가 평양, 뉴욕, 제네바,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는 타이밍상 행운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새 지도부와 건설적으로 협력해 나갈 준비가 돼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중요한 전범은 1994년 김일성의 죽음으로 북미 협상의 향방이 불투명해졌을 때다. 당시 클린턴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에 대한 개입을 계속했고 결국 김정일은 199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킨 제네바 기본합의에 서명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빌 클린턴 대통령을 본받는 현명함을 보여야 한다. 힐러리 클린턴 장관이 김정일의 사망에 대해 신중하고 건설적인 논평을 한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한국의 반응은 훨씬 더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다. 남북관계에 관한 한 한국의 여론은 분열돼 있고 이명박 대통령은 뭘 어떻게 하더라도 공격받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내에는 대북 강경정책에 대한 피로감이 존재한다.

보수적인 이 대통령은 과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 문제에 대해 맞은 것과 같은 순간을 맞았다. 청와대에 이는 버거운 과제일 것이다. (공화당 출신의 닉슨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냉전 구도를 무너뜨렸다. 이를 '닉슨 쇼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닉슨은 퇴임 후인 1976년 마오쩌뚱이 사망하자 베이징을 방문해 조문했다 : 옮긴이)

이념적 분열 앞에서의 조의 표명은 남북 간의 유대를 위한 대담한 선언이었겠지만 통일부는 오직 민간 차원의 방북 조문만을 "허용"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인 어떤 신호도 보내지 못하게 하는 지시는 내려졌다. 한국 정부의 자제가 북한의 온건한 태도를 촉진할 것이다.

북한을 대하는데 가장 뛰어난 국가로 여겨지는 중국은 특히 민감한 시기를 맞고 있다. 중국의 현실주의자들은 북한 붕괴 시나리오는 거의 생각지 않으면서 외교 채널을 유지하며 경제적 개방을 지지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과 군 차원의 유대관계도 맺고 있으며 최소한 일정한 수준에서는 북한 군부의 행동을 누그러뜨리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낙관적으로 전망하자면 한국과 중국, 미국은 이 권력 교체기를 이용해 한반도를 비핵화하고 정상화할 건설적이고 잘 조정된 개입정책(engagement policy. 혹은 포용정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동안 정치분석가들이나 군사계획 입안자들은 김정일 사후의 "급변사태 계획"을 논의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김정일이 사망했는데도 혼란이나 붕괴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의 진전의 초석이 될 오늘의 신중하고 현실적인 외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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