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제약회사 횡포에 "약만 제때 썼어도… "

[FTA허브? 환자들은 운다·上] "에이즈가 아니라 약이 비싸서 죽는다"

한국-미국 자유무역협정(한미FTA)이 양국 의회의 비준만을 남겨두고 있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약값이 오르리라는 데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이견이 없다. 정부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연간 1000억 원의 피해가 생기리라고 봤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주로 국내 제약회사의 피해만 조명됐을 뿐, 정작 특허 신약이 필요한 환자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프레시안>은 개방 경제 시대를 맞아 위협받는 환자들의 생존권을 조명했다. <편집자>

다국적제약회사 치료제 공급 거부, "약만 제때 썼어도…"

의사는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백혈구 수치가 생명을 위협할 정도까지 떨어졌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푸제온이라는 신약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약을 구할 수 없었다. 미국의 다국적제약회사 로슈가 "약값이 너무 싸게 책정됐다"며 2004년에 한국에 푸제온 공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푸제온 없이 2년을 버티다가 결국 한쪽 눈이 멀었다.

▲ <하늘을 듣는다> (윤가브리엘 지음, 도서출판 사람생각 펴냄) ⓒ교보문고
HIV/AIDS 감염인인 윤가브리엘 씨 이야기다. 로슈는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푸제온 시판 허가까지 받았지만 끝내 약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하늘을 듣는다>에서 "로슈가 2004년에 정한 가격으로 (푸제온을 제때) 공급해 내가 쓸 수 있었다면 시각장애는 안 생겼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치료만 제때 하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감염인은 약을 공급받지 못하면 죽음을 넘나들어야 한다. 에이즈 치료제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약값 협상을 거쳐 국내에 시판되는데, 이 과정에서 제약회사의 횡포가 심하다. 제약회사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시한 약값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급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에서 판매되는 에이즈 치료제 30개 중에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절반가량인 16개다.

16종이나 있는데 다른 치료제를 쓰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선택의 폭이 무척 좁기 때문이다. 에이즈 치료제는 일정 기간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서 끊임없이 더 강한 다른 치료제로 바꿔줘야 한다. 부작용 문제도 있어서 감염인마다 자기 몸에 맞는 약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감염인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약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마저 엄청난 비용이 들거나 국내에 없어서 못 구하는 상황이다.

방법은 있다. 복제약을 비상업적인 목적으로 자국에서 생산하거나 수입하는 것이다. 특허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는 특허권자만 독점 생산할 수 있는 약을 제삼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를 말한다. 강제실시권은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 : 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에 규정된 합법적인 권리이기도 하다. 특허 남용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폐해를 막으면서도, 사익과 공익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특허제도 본래의 목적에 따른 조치다.

강제실시를 하는 대가로 해당 특허권자는 '로열티'를 받는다. 하지만 제약회사는 더 큰 이윤을 남기기 위해 강제실시를 거부한다.

"사람들은 에이즈 때문이 아니라 약을 먹을 수 없어서 죽는다"

2004년 한국 정부가 푸제온에 책정한 약값은 연간 1800(월 150)만 원이었다. 로슈는 2007년 약값을 2200(월 183)만 원으로 올려달라며 약가인상조정신청을 했다. 문제는 그렇게 책정한 가격이 제조비, 연구개발비 등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값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서 팔리는 가격에 따라 책정된다. 일본에서 비싸게 팔리므로 한국에서도 같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 로슈 사장은 "한국은 OECD에 가입한 나라이므로 비싼 약값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씨는 그의 책에서 "로슈가 자료를 내놓고 약값을 올려야 할 이유를 밝힌다면 이해라도 될 것"이라며 인상 정보를 밝히지 않는 제약회사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윤 씨는 2008년 한국 로슈 앞에서 12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는 "사람들은 에이즈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을 수 없어서 죽는다"고 말했다. 특허청에 푸제온 강제실시를 청구했지만 그마저 지난해 6월에 기각됐다. 특허청은 "푸제온이 강제실시를 인정할 정도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히 필요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강제실시의 실익도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기각 사유를 밝혔다.

비난 여론을 의식해서 제약회사는 '돈이 되지 않는 시장'에 일정 기간 약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다국적제약회사 얀센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프레지스타 약값을 협상했다. 하지만 약값이 너무 낮아 출시할 수 없다며 10월까지 한시적으로 약을 무상으로 공급했다. 원하는 약값을 관철할 때까지 고객 확보 차원에서 샘플을 환자들에게 제공하겠다는 것. 하지만 얼마 후 프레지스타는 갑자기 가격이 뛰었다. 끊으면 건강에 치명타가 오는 감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약을 살 수밖에 없다.

환자가 내야 할 약값, 연간 1000억 오를 것

이런 상황에서 한미FTA가 통과되면 어떻게 될까. 미국은 제약회사의 이윤을 보장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었다. 제약회사가 '독립적인' 이의 신청 기구를 통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협상한 약값을 번복할 길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제약회사가 제시한 약값이 관철되기 쉬워진다.

복제약을 만드는 기간도 늦어진다. 국내 제약회사가 복제약(제네릭) 판매를 요청할 때 다국적기업 특허권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특허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판매할 수 없게 한 '특허-허가 연계제도'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특허가 만료되는 즉시 복제약을 내놓을 수 있었지만, 특허-허가연계제도가 실시되면 복제약은 특허가 사라지고도 6개월~2년 가까이 늦게 나온다. 한시를 다투는 환자들 사이에서 제2의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특허 신약이 필요한 병은 에이즈뿐만이 아니다. 올해 국내에서 판매되는 의약품은 10만 개가 넘지만 이 가운데 우리 기술로 개발된 신약은 15개에 불과하다. 이 중에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등 국내 주요 사망질환의 치료제는 하나도 없다. 큰 병 치료는 모두 수입약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약값은 얼마나 오를까?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11개 국책연구기관은 2007년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라는 보고서에서 한미FTA가 발효되면 10년간 연평균 904억∼1688억 원의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봤다. 환자가 내야 할 약값도 연평균 127억∼1364억 원씩, 10년간 1조3000억 원에 달한다. 그나마 보수적인 정부 보고서가 이 정도다. 보건시민단체에서는 연평균 1조 원의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8차 한·미 FTA협상이 진행 중인 서울 하얏트호텔 앞에서 열린 환자권리를위한환우회연합모임의 기자회견에서 회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에이즈 바로 알기

에이즈에 대한 무관심으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감염인에게 상처를 준다. 윤가브리엘 씨가 자신의 책에 적은 '에이즈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소개한다.

Q HIV/AIDS 감염인이라고 쓰던데 HIV는 무엇이고 AIDS와 어떻게 다른가?

HIV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이고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를 HIV 감염이라고 한다. HIV가 몸에 들어오면 바로 활동하지 않고 대략 7~10년 정도 잠복기를 거친다. 잠복기에는 아무 증상이 없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각종 감염성 질환이 찾아와 에이즈가 된다.

Q HIV 감염 경로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HIV 감염인의 혈액을 직접 만졌을 때 묻은 부위에 상처가 없으면 안전하다. 그 외 땀, 침, 소변, 대변 같은 분비물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는다. HIV 감염인과 국이나 찌개를 같이 먹어도 감염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가벼운 신체 접촉도 마찬가지여서 일상생활에서의 감염 가능성은 없다. 모기를 통한 감염 가능성도 없다. HIV는 혈액이 일정량이 형성돼야 살 수 있는데 모기가 빨아 먹는 피의 양은 극소량이기 때문이다. 또한 HIV는 성 정체성과 상관이 없다.

Q HIV 감염 확률은?

성관계 시 질 삽입 성교 0.1~0.2%, 항문 성교 0.1~3%, 수혈 90%, 산모로부터 태아에게 옮겨지는 경우 25~30%, 주사 바늘에 찔렸을 경우 0.3%이다. HIV에 감염된 산모로부터 태아에게 옮겨지는 감염은 보통 25~30%인데 에이즈 치료제를 복용하면 이를 훨씬 줄일 수 있다. 주사 바늘에 찔렸을 때는 가능한 한 빨리 비누와 물로 씻은 후 에이즈 치료제를 4주 정도 복용한다. 성관계 시 콘돔이 찢어져 감염이 의심스러우면 의사와 상담 후 에이즈 치료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Q 에이즈는 바로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 아닌가?

의료기술이 발전해 약만 잘 복용하면 완치는 안 돼도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관리할 수 있는 만성질환이 됐다. 문제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에이즈 치료제를 특허로 독점해 비싼 약값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 에이즈 환자의 90%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가난한 환자들은 비싼 약값 때문에 약을 먹을 수 없어 죽어가고 있다.

Q 에이즈 환자들에게 붉은 반점이 나타나지 않을까?

붉은 반점은 피부암의 일종인데 HIV에 의해 면역력이 파괴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감염성 질환 중 하나다. 주로 서양인에게 나타나며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인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붉은 반점이 에이즈를 더럽고 무서운 병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제는 관리만 잘하면 붉은 반점의 피부암도 안 걸리는 건강한 몸이 될 수 있다. 붉은 반점의 에이즈 환자 모습은 치료약이 없던 공포의 1980년대 이미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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