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가야 할 진정한 '정면돌파전'의 길

[현안진단] 철지난 '백두산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

실체를 드러내는 북한의 '새로운 길'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후 처음으로 신년사를 생략하고 지난해 12월 28일부터 4일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개최해 결정서 발표로 대신했다. 김 위원장은 이 결정서를 통해 정면돌파전을 선언했으며, 핵심은 자력갱생과 체제결속이다.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현 상황을 일반적인 국가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든 '혹독하고 위험천만한 격난'이라 규정하고 인민들에게 절약정신을 촉구했다.

김 위원장은 정면돌파전의 기본전선이 경제전선이며 농업전선이 주타격전방이라고 언급함으로써 경제 위기와 식량문제를 숨기지 않았다. 2012년 집권 직후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김 위원장은 다시 인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강조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전원회의 이후 북한은 정면돌파전의 관철을 위해 국가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전원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반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 현상의 제거를 위한 투쟁과 도덕 기강의 확립을 주문했다. 북한에서 반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는 정권과 체제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내부 동요와 사회적 이완을 막기 위한 지시로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 4일 김 위원장이 백두산을 방문해 '백두산 대학'을 언급한 이후 북한의 모든 매체가 백두산 정신을 반복해 강조하고 전국 각지에서 백두산 혁명사적지 및 전적지 행군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2월 중순까지 5만여 명이 백두산을 행군했다. 백두산 정신의 강조는 당면한 대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선대의 유산을 활용하겠다는 의도이며, 김 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가 지난 1월 25일 6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인 지난 2월 28일 김 위원장은 동해에서 인민군 합동타격훈련을 참관하고, 3월 2일에는 인민군 전선장거리포병구분대의 화력타격훈련을 현지 지도했다. 이날 북한은 원산에서 북동쪽 해상으로 초대형방사포 2발을 발사했다.

북한은 지난해에도 13차례의 단거리 발사체를 발사했으며, 11월에는 김 위원장이 서해 창린도에서 해안포 사격을 직접 지시함으로써 9.19 남북군사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했다. 2020년 북한이 다시 군사적 긴장 고조에 나선 것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3월 3일 밤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담화를 내고 한국 정부를 비난했다. 김 제1부부장이 공식담화를 내놓은 것은 처음이며,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 등 원색적인 표현을 담고 있었다. 이는 2일 청와대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긴급 관계장관 회의를 열고 북한의 군사적 긴장 고조 행위에 강한 우려를 표하고 중단을 촉구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김 제1부부장은 2018년 초 '백두혈통' 최초로 서울을 방문해 남북관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번 담화가 주목받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대남비난 공세를 지속해왔는데, 김 제1부부장의 담화로 남북관계 경색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졌다.

새로운 길을 예고했던 북한은 2020년 초 정면돌파전을 선언하고, 군사적 긴장 고조와 대남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과연 정면돌파전은 비핵화 협상 교착과 대북제재 장기화에 따른 북한의 불가피한 선택인가?

▲ 3일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김정은 (왼쪽 위) 북한 국무위원장이 포병부대의 화력타격훈련을 지도했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정면돌파전의 한계

정면돌파전과 군사적 긴장 고조, 그리고 대남비난을 통해 북한이 비핵화 협상 교착국면과 당면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북한이 동창리에서 로켓엔진 시험으로 추정되는 이상 징후를 보인 지난 연말부터 미국의 첨단 정찰자산들이 거의 매일 공개적으로 한반도에 전개되고 있으며, 한반도를 포함하는 전구에 미국의 전략무기들이 전진 배치되어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힘의 우위를 통해 북한의 고강도 도발을 암묵적으로 억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란의 제2인자라 할 수 있는 술레이마니 전 쿠드스군 사령관을 미국이 전격 제거한 사례에서 보듯이 경우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강경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미·중 무역전쟁을 겨우 봉합한 중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지지하기 어려우며, 북·중관계 악화로 북한의 어려움만 가중될 것이 자명하다.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지배적인 여론은 북한에게 양보를 하거나 잘못된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북제재 완화에 대해서도 미국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다. 북한은 풍계리 핵 실험장 폭파 및 동창리 로켓발사대·엔진시험장 해체 착수, 그리고 영변 핵 단지 영구 폐기 의사를 통해 자신들이 선제적인 비핵화에 나섰다고 주장하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은 싸늘하다. 북한이 처한 '양치기 소년 딜레마'의 현주소다.

대선 레이스에 몰입한 트럼프 대통령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도 난망하다. "11월 대선 전에는 김 위원장과 또 다른 정상회담을 원하지 않는다"고 CNN이 지난 2월 10일 자에 보도한 것처럼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은 북한문제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미 국무부 부장관으로 승진한 스티브 비건 대북 특별대표는 북한문제에만 집중하기 어렵게 되었고, 알렉스 웡 대북 특별부대표와 마크 램버트 대북 특사 등 미 국무부의 북미 비핵화 협상 핵심인사들도 조만간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는 정면돌파전의 예기치 않은 암초다. 정면돌파전의 관철을 위해서는 대규모 노력동원이 필요하지만 코로나19로 당장 이마저도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 당국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고 반복하고 있지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대북제재로 인해 지난해 12월 22일 이후 북한의 해외노동자들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어야 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로동신문>이 코로나19를 최초 보도한 것이 1월 22일이며, 북한 당국은 1월 13일부터 해외 출장자 및 외국인들을 격리했다고 발표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북한 귀국 노동자로 인한 감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코로나19로 북한 경제의 생명줄인 북·중 교역은 전면 중단상태이며, 김 위원장의 역점 사업인 관광사업도 개점 휴업 상태다. 절대다수의 북한 인민들은 이미 장마당 경제의 생리에 익숙해 있다는 점에서 절약을 통한 자력갱생과 백두산 정신을 강조하는 체제결속 노력의 효과도 미지수다.

진정한 정면돌파전의 길

북한이 시도하고 있는 정면돌파전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렵다. 지금과 같은 정면돌파전을 지속할수록 김 위원장의 권력 기반과 북한 체제의 근간이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2월 말 북한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리만건 조직담당 당 부위원장과 박태덕 농업부장을 해임했으며, 부정부패를 이유로 당간부양성소의 당위원회를 해산하고 관련자들의 책임을 물었다.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두 축, 즉 노동당 중심의 정치와 먹는 문제인 농업 분야 모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두 분야의 최고위 간부를 동시에 해임한 것은 북한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노동당 간부를 양성하는 최고위 교육기관의 비리를 공개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부정부패 문제가 북한의 골수에까지 퍼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면돌파전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남북관계의 길'이다. 남북관계의 자율성이 확보될 경우 복합적인 동북아 국제정치 지형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입지는 커지며, 북한의 협상력도 제고될 수 있다는 것은 남북관계사의 자명한 교훈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으로 상징되는 남북관계의 일상화 시대를 개막했다.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의 재개를 요구했으며, 2019년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 자신도 두 사업을 조건 없이 재개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동안 남북 협력이 얼마나 유용했는지는 북한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2018년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4.27 남북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의 파격적인 정상 외교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이를 토대로 지난 2년간 김 위원장은 은둔의 독재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도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남북 협력 없이는 북한의 경제건설총력집중노선의 관철도, 김 위원장의 역점 사업인 관광산업의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역할은 대남비난이 아니라 새로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3월 4일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온 코로나19 전염병 극복 응원 친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북한을 '남북관계의 길'로 견인하기 위해 우리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지난 2년간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북한의 신뢰를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방을 다지는 데에도 한계를 보였다.

김대중 정부는 냉전적 남북관계의 종식을 위해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199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된 '페리보고서'는 우리 정부에게 대북 포용정책을 기반으로 한 포괄적 접근방안을 권고함으로써 역사적인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측면 지원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대중 정부가 페리 미 대북정책 조정관과 긴밀히 협의했음은 물론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한·일관계도 정상화했다. 한·미 및 한·일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김대중 정부의 남북관계 일상화 시대 개막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반면 현 정부는 그랜드 디자인이 부재한 상태에서 매번 현안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를 설득해야 했으며,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한·일관계 역시 악화일로의 길로 치달아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제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북한의 신뢰와 아울러 미국과 일본의 협력을 유도하는 보다 큰 틀의 정책 기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번 김 위원장의 친서도 이러한 차원에서 들여다보는 겹눈이 필요하다.

두 번째의 길은 '양치기 소년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지난 30여 년간 협상 과정에서 북한은 남북간, 다자간, 그리고 북·미간 수많은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협상하는 과정을 통해 핵능력을 고도화시켰다. 북한이 기만적 협상 전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했을지 모르나 이 과정에서 신뢰를 상실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를 설득하기 위해서 '양치기 소년' 북한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이유이다.

북한이 자신들이 취한 부분적인 비핵화 조치의 중요성을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북한은 미국에 끌려가기보다 과감하고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를 통해 협상을 주도하는 '선도적 비핵화'를 고려해야 한다. 하노이에서 결렬된 영변 핵 단지 폐기 의사를 고수할 것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을 유도하고 미국의 여론을 설득할 수 있는 과감한 '+α 방안'의 제시를 통해 협상을 선도해야 한다.

세 번째는 '인민의 길'이다. 대북제재와 경제 위기, 그리고 식량난으로 북한의 인민들은 지쳐있다. 북한 매체의 보도를 보면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조류독감(AI)과 아프리카 돼지열병(ASF)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가정경제에서 돼지 한두 마리는 가장 중요한 자산인데 북한 일부 지역에서 ASF로 사육 돼지의 몰살 소식이 들린다. 코로나19로 식량 가격은 가파른 상승세다. 북·중 교역 중단의 장기화로 북한 경제의 버팀목인 장마당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다.

자력갱생과 절약, 그리고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백두산 정신'으로 인민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큰 실수가 될 수 있다. 우리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는 김 위원장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북한에게 밝은 미래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곧 북한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일이다.

지금은 김 위원장이 진정한 정면돌파전을 고민할 때다.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도 확실한 행동이다. 시간은 북한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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