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이 한 말이다. 지난해에도 연초부터 이런 자세로 남북관계를 관리했더라면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경직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북한 대남매체들이 험담도 쏟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이런 입장을 표명한 뒤에서야 통일부는 유엔 제재와 무관한 대북사업 추진 의사를 밝혔고, 외교부 장관도 미국에 할 말을 하고 돌아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양새가 됐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이 실토했듯이, 지난해에는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가 북미관계보다 앞서 가는 것을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미국은 언제부터 우리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을까.
2018년 9.19 평양 정상회담을 계기로 '9.19 남북 군사분야합의서'가 발표된 뒤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불쾌감을 나타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그러더니 10월에 '한미 워킹그룹'이 발족되었고, 남북 정상이 합의한(4.27, 9.19)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같은 남북경협 프로젝트는 한 발도 나가지 못했다. 이걸 우리 정부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김정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하여 9.19 정상회담을 하고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 시민들 앞에서 즉석연설까지 하도록 했다. 이는 아마도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 개선의 종속변수가 아닙니다"라는 문 대통령의 2018년 8.15 경축사에 감동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만큼은 미국 눈치 안 보고 치고 나가면서 김 위원장 자신과 북한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줄 걸로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단체조 카드섹션(배경대) 마지막에 "잡은 손 놓지 말고 민족번영 이룩하자"는 구호도 띠웠을 것이다. 그만큼 문 대통령을 믿었기에 2019년 신년사에서 미국에게는 '새로운 길'을 예고하면서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조건과 대가없이 재개하겠다"고 공언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믿고 의지하고 싶었던' 문 대통령이 약속을 하고 돌아간 뒤, 한 발도 떼지 못 하는 것을 보면서 김정은 위원장은 실망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 앞에서 지도자의 영이 서지 않게 된 것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지난해 2월 말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나자 북한은 남한에 "주제넘게 중재자‧촉진자 행세하지 말고 민족적 입장에서 행위자가 되라"고 요구했다. 이후 대남 매체들의 언사는 날로 거칠어졌고, 올해 초에도 '핫바지'니 '몽유병 환자'니 남한 당국자를 비하하는 가시 돋친 막말도 쏟아냈다. 마치 우리와는 다신 상종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지난 한 해 북한은 왜 그랬을까? 이런 경우엔 역지사지로 복기(復碁)해 보는 게 좋다. 의지하고 싶었던 문 대통령을 믿고 북한 주민들이 경청하고 전 세계가 주목하는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큰 소리를 쳤는데, 그것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과 섭섭한 마음이 분노로 바뀌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의 분노는 지난 연말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자주 거론된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로 인한 인민들의 고통이 분노로 바뀌었다"와는 분노의 결이 좀 다를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과정에서 생기는 섭섭함과 좌절감 때문에 생긴 분노는 섭섭한 마음이 풀리면 쉽게 삭는 법이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올해는 지난해처럼 미국 눈치 덜 보고 주체적으로 남북관계를 풀어 나가면 북한도 우리의 대북정책에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다. 문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털어놓고 잘 해 보자고 하는 데도 계속 비아냥대고 험담만을 일삼는다면, 그 때부터는 북한이 크게 잘 못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은 어차피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그리고 미국의 현 국내정치 상황 때문에 최소한 올해 한 해는 북핵문제 해결 프로세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마저 손 놓고 또 한 해를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습관적으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병행'을 고집하는 미국을 설득해 나가되, 필요하다면 미국 양해 없이도 남북관계를 치고 나가겠다는 결단과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올해 외교안보통일 부처의 장들과 참모들이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대북제재 예외 조치'까지 언급했기 때문에 통일부 장관이나 외교부 장관이 우리 국민들의 대북 개별관광 추진을 언급하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난해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에 연초부터 정부가 앞장서서 북한 당국을 상대하는 건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게 심하게 우리 당국을 비난하고 비아냥댔던 북한이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당국과의 접촉과 대화에 나오기는 낯간지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잠시 뒤로 빠지고 민간을 앞세우는, 즉 선민후관(先民後官)으로 북에 다가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선민후관으로 나가기 전,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있다. 올해 봄에 열릴 한미 연합 훈련을 취소하는 일이다. 물론 미국이 동의해야 할 일이지만, 2018년 2월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미국을 설득해서 2018 춘계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했다. 그 결과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했고, 그리 함으로써 '한반도의 봄'이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추계 훈련도 하지 않았던 선례가 있다. 그 덕에 안보불안 없이 국민들이 2018년을 지냈다.
이는 우리 정부가 미국에 강력히 요구하고 설득하면 한미 연합 훈련은 얼마든지 조정될 수 있다는 말인데, 문 대통령이 올 한해 남북관계를 우리 문제로 보고 주체적으로 풀어나가기로 한만큼 국방부와 외교부는 한미 연합 훈련부터 중단·취소하는 협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북한은 군사훈련 중단 여부를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복원하는 가늠자로 삼을 것이다.
따라서 올해 남북관계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면, 설 이후인 1월 말이나 2월 초에는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이라는 결정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북한도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복원하고 남북 협력사업에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다. 올해 봄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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