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 딜'로 끝난 뒤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연말까지 셈법을 바꿔 나온다면 북미 정상회담을 한번쯤은 더 해볼 수 있다"면서 연말까지 '북한의 선 비핵화'만 고집하는 미국이 셈법을 바꿔 나올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그 연말이 이제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연말이 보름정도 남은 시점에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뒤늦게 서울과 베이징에서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북한은 비건 대표를 매정하게 외면했다.
지나고 보니 북한은 10월 초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결렬 후, 12월 초부터 '새로운 길'을 준비해 왔던 것 같다. 7일 오후 1시쯤 동창리에서 출력이 강화된 ICBM 1단 엔진 시험 성공 후, 김성 유엔주재 북한 대사는 "이제 비핵화 문제는 협상 테이블에서 내려졌다"고 했고, 국방과학원 대변인은 7일 엔진 시험으로 "우리의 전략적 지위가 바뀌게 됐다"고 발표했다. 연이어 13일 2단엔진 시험 성공 후, 북한군 박정천 총참모장은 북한이 '전략적 핵전쟁 억제력'을 갖추게 되었고, "앞으로 이 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전략무기들을 생산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주말 개최된 것으로 보이는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이 같은 군사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자위적 국방력 강화'를 결정했다. 그 결과는 조만간 개최될 노동당 중앙위원회 7기5차 전원회의에서 당과 국가의 공식방침으로 채택될 것이다.
북한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7기5차 전원회의 날짜를 특정하지 않은 것은 전원회의 직전까지 미국의 셈법 변화를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미있는 메시지 없이 빈손으로 서울과 베이징을 돌면서 북한에게 대화 재개만을 재촉하는 비건 대표의 행보를 보면서 북한은 연말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공식화할 법적 절차, 즉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확대회의를 열고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를 준비하는 것 같다.
북한의 정치문화 맥락에서 보면, '최고령도자'가 한번 결정해서 발표한 것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이번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 결정인 '자위적 국방력 강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 인적 개편 방침은 조만간 개최될 당 중앙위원회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공식 채택될 것이고, 이를 토대로 2020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새로운 길'을 공식 선언할 것이다.
다만, 혹시라도 연말까지 남은 1주일 안에 미국이 셈법을 바꿨다는 확신을 갖게 할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라도 평양에 전달된다면 몰라도, 미국의 북핵정책 기본철학을 고려하면 현재로선 그러한 '기적'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럼 북한의 '새로운 길'은 어떤 길일까? 일단 총론 차원에서 '비핵화는 더 이상 북미간 협상의 대상이 아님'을 선언할 것이다. 첫째, 군사적으로는 '자위적 국방력 강화'라는 명분하에 핵무기와 ICBM급 탄도미사일 양산체제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미국의 전략자산들이 한반도에 전개되고 정찰기들이 수시로 북한지역을 정찰하는 걸 보면서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이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고 판단한 북한은 '자위적 국방력 강화'방침을 채택했을 것이다. 올해 4월부터 그랬듯이 내년에도 동‧서해안에서 방사포와 단거리 탄도 미사일도 수시로 발사하면서 한반도 긴장을 조성할 것이다. 이 같은 긴장 조성은 내년 대선 전이라도 미국이 셈법을 바꿔 나오게 하려는 압박의 일환이다.
둘째, 대외적으로는 중·러와의 외교 협력 강화와 반미국가들과의 연대강화로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에 구멍을 내는 틈새 전략을 모색할 것이다. 셋째,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길'을 가는 동안 겪게 될 압박과 제재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분노의 힘'으로 극복하자고 주민들을 독려할 것이다.
북한이 이렇게 '새로운 길'을 가게 되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고조될 것이 뻔하고, 미국은 수시로 대북 군사적 조치 가능성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전쟁공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한반도 상황이 2017년의 '화염과 분노' 트럼프-김정은의 '핵단추' 언급 시절로 돌아간다면, 정부와 여당은 이를 어찌할 것인가. 특히나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 한반도 안보상황이 당리당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안보상황, 한미동맹 등의 민감한 문제를 둘러싸고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보수야당의 선전선동이 이어질 것이다. "종북좌파들의 대북 환상과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북핵문제가 악화됐고, 그 결과 국민들이 전쟁공포에 떨게 됐다"면서 총선 민심을 흔들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새로운 길'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의 결과가 아닌,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간 힘겨루기 연장선상에서 북한이 선택한 '벼랑 끝 전술'이다. 이 같은 전후·상관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중우정치(衆愚政治) 수준의 선전선동을 하는 세력의 주장은 명쾌한 논리로 반박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와 여당은 '새로운 길'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첫째, 용기와 책임감을 가지고 미국의 대북정책 허점을 분석적으로 지적하면서, 미국이 6.12 싱가포르 북미공동선언 정신으로 돌아가 북한의 안전권과 발전권을 보장해 나가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견인해 나가는 방향으로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약소국이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나라이기에, 압박과 제재로는 북한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냉엄한 진실에 미국이 눈을 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갈 수 있는 '우리의 길'은 없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북미간 비핵화협상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남북간 교류 협력도 덩달아 정지되었다.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선언에서 남북정상이 합의한 개성공단 조업재개와 금강산관광 재개, 남북 철도·도로 연결과 현대화는 대북제재를 이유로 미국이 반대하는 바람에 한 발도 못 떼고 있다. 때문에 남북간 신뢰가 깨졌다고 할 수 있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어차피 단시간 내에 끝나지 않을 문제라면, 한반도 평화의 작은 조건인 남북간 교류협력을 더 이상 북미간 핵협상에 종속시킬 일이 아니다. 우리로서는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관계의 발전은 북미 관계 개선의 종속변수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다시 되새기면서, 그 때의 정신으로 남북관계를 풀어 나가야 한다.
북미는 6.12 싱가포르 정신으로, 남북은 4.27 판문점-9.19 평양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국민들이 북한의 '새로운 길'로 인한 전쟁 공포와 안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정부와 여당이 챙겨야 할 최소한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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