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한과 크리스마스 선물 발언 등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렸던 북한의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가 끝났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전원회의 결정서로 대신했다. 결정서에서는 북미 협상이 장기화될 것이며, 외세와의 타협 없이 자력갱생을 통한 '정면돌파전'을 전개할 것임을 밝혔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과 한국의 중재 역할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4월 시정연설에서 2019년 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겠으며, 이후에는 새로운 길로 갈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시정연설 이후 북한의 외교·안보 고위층들은 경쟁적으로 미국의 선택을 강요하는 각종 담화를 발표했다. 연말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미국은 바꾼 계산법을 조속히 제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때 불꽃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형 방사포 시험 발사는 계속됐고, 미사일 엔진실험으로 추정되는 중대한 실험에 성공했다고도 발표했다. 세계의 시선은 자연히 연말 김정은 위원장의 입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ICBM과 핵실험 모라토리엄 중단을 선언하고 다시 대결국면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번 전원회의는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에 걸쳐 진행됐다. 2012년 이후 5차례의 전원회의가 열렸지만, 이번만큼 오랜 시간 지속한 사례는 없었다. 3일 동안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모든 분야에 대해 언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세와 투쟁 방향, 조직문제 등을 총체적으로 다루었다. 마지막 날 발표된 결정서에는 그 내용이 여덟 가지로 집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초 국제사회가 우려했던 미국과의 대화 단절 또는 ICBM과 핵실험의 모라토리엄 중단을 직접 언급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미국이 대북압박을 강화하는데 맞춰 전략무기 개발 수준을 높여갈 것이라는 간접적 위협만 있었다. 그리고 제재국면이 장기화될 것이니 자력갱생으로 버텨 나가자는 '정면돌파론'을 언급했을 뿐이다.
또한 2020년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없었다. 12월 31일까지 계속된 회의 탓도 있지만, 전원회의 이후 김정은 위원장의 직접 연설이 있었던 사례를 감안할 때 다소 이례적이다. 아마도 전원회의 결정서로 신년사를 대체하는 것이겠으나, 전원회의 직전까지 방향성을 정리하지 못했던 북한의 고민이 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면돌파전의 주공전선은 경제문제이며,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외의존적 자세를 탈피하고 자력갱생에 전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종합해 보면 그동안 북한이 말한 새로운 길은 "타협 없이 자력갱생으로 버티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고민을 드러낸 북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
이번 당 중앙위 전원회의 결정서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지난해 4월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의도를 정확히 인지했기 때문에 미국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자력갱생으로 버텨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한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과 경제문제에 대한 자체 질책이 많았다는 점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아니라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면서 남한과 관계를 단절했다.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한국은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면 북한이 대미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에 중재자 역할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북미 간 직접 대화가 가능했지만, 결과는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이어졌고, 그 책임을 한국 측에 돌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북미 관계에서 중재자는 필요 없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적극적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정서 대부분을 경제문제에 집중한 것은 그만큼 경제문제가 해법을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뒀다는 3가지 사업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지적하며 북한경제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석탄 수출을 확대하면서 들여온 외부 자본에 대해 '땜때기식, 하루살이식 투자'라고 폄하했다. 대미 관계 개선을 통한 경제번영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도 크다는 점을 역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자원 동원력을 극대화하고 산적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공식경제 부문의 정상화를 위한 처방전이라고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산적된 폐단과 '땜때기식 투자'가 북한경제 생존의 방법론이었기 때문이다. 경제문제의 해결은 개혁과 개방을 통한 성장 위주의 경제운영방식으로의 전환에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외환경을 개선하는데 장기전을 벌여야 하므로 자력갱생으로 버티자고 하면서 버티기 방법론을 없애자는 모순에 봉착한 것이다.
다음으로 연말까지의 협상 시한을 무기한으로 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대결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력갱생을 통한 자력 부강'을 언급했다. 대미 관계 개선 자체를 부인한다면 장기전이라고 표현할 필요도 없다. 장기전 기간 동안 자력갱생으로 버티다 보면 결국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거나 대외적 환경이 북한에 유리하게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포함하고 있다. 시한은 불분명하지만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타력 부강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미국과의 협상 시한을 무기한으로 연장한다는 것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는 북한의 고육지책을 읽을 수 있다.
미국을 자극하는 ICBM 개발과 핵실험 등의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는 점도 현상 시한의 무기한 연장을 뒷받침한다. 이미 북한은 비핵화가 더 이상 협상의제가 아니라고 밝힌 바 있지만, 이번 결정서에는 핵 억제력을 강화한다는 과거의 표현만을 재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 군축과 전파방지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미국의 대북 태도에 따라 억제력 강화의 폭과 심도를 상향조정 하겠다"라는 등의 위협적 발언을 하고 있지만, 당장 행동에 옮긴다는 결정은 없다. 대부분 미국의 행동이 전제되어 있다.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과정에서 미국의 필요에 의해 북한이 원하는 조건을 가지고 다가설 경우 언제든지 대화의 창을 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평화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
미국의 반응은 일단 현상 유지가 됐다는 입장인 듯하다. 북한이 극단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미국의 대북 군사적 위협과 강력한 경제제재에 기인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대북 입장을 바꿀 이유가 없다. 북한의 직접적인 대미 도발을 억제하는 현상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표현한 대로 고사 작전을 지속하면 북한은 손들고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보는 듯하다.
반면 북한은 건드리면 다친다는 '고슴도치'식 버티기에 들어갔다. 북한과 미국의 입장이 평행선을 그리게 되었으므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의 길도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표면적으로 한국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 북한의 비핵화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고, 자력갱생하느라 북한 주민들의 생활고는 깊어질 것이다. 한반도 정세는 불확실성 속에서 상시적 불안정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예상되는 장기적 교착상태 하에서는 남북관계 개선도 평화 체제 구축도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적극 나서야 할 필요성과 활동 공간이 더 커졌다. 당장 북한과 미국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는 단말마(斷末魔)적 대책을 사용할 시점은 아니다. 미국과 북한 관계의 진전을 전제조건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논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최근 북한의 대남 비난이 현저히 줄어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북한이 '새로운 길'의 구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태도 변화 가능성을 지켜보면서 불씨를 살릴 계기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지향하는가, 우리가 가진 자원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등등 근본부터 다시 자문해야 한다. 북미 관계 진전 과정에서 우리가 취할 것과 양보할 카드, 우리의 국력을 바탕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제반 여건들을 가지고 미국, 북한과 협상하는 전략적 지혜를 발휘하고 외교적 공간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핵심 가치를 지키고 한반도의 미래를 직접 운전하는 주인공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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