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간의 불신 속, 한국의 전략적 공간 넓어졌다

[현안진단] 文, 촉진자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레드라인을 밟은 북한

지난 5월 4일 발사체 발사를 시작으로 11월 28일까지 북한은 소위 '단거리형 무력시위' 행보를 이어 왔다.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는 다종 및 다양한 형태로 탄도미사일과 방사포(다연장 로켓)가 주종을 이루었다. 예외가 있다면 10월 2일의 SLBM(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으로 사실상 중거리였지만 사거리는 단거리를 유지했다.

북한의 행동은 모든 탄도미사일 기술을 적용한 북한의 발사체 시험을 금지한 유엔의 결의와는 흐름을 달리한다. 사거리 1000km 미만 단거리 발사체의 경우 미국 본토 위협 가능성은 없으나 서울, 베이징, 도쿄를 포함해서 한·중·일의 주요 도시를 핵심 사정권으로 한다. 특히 북한의 스커드와 노동계열 미사일의 개량형은 핵탄두의 탑재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따른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 위원장은 4월 12일 시정연설을 통해 강도 높은 대남, 대미 비난과 함께 일방적으로 올해 말을 비핵화 협상 시한으로 선포했다. 이후 북한은 지속해서 단거리 발사체를 시험했으며 그 의도는 대남, 대미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은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는 별 문제 없으며, 모든 국가에서 하는 행보라는 것이었다.

연말로 접어들면서 북한의 무력 시위는 '레드라인'을 밟기 시작했다. 11월 원산 일대에서 행한 일련의 북한군 현지 시찰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서해 창린도에서 해안포 사격을 지시했다. 이는 9.19 남북 군사합의를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그동안 우리 정부가 성과로 내세운 군사적 신뢰 구축에 상처를 주는 공개적 행보였다. 12월 7일과 13일 북한은 동창리(서해 위성 발사장)에서 두 차례의 중대한 시험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공개했으며, 특히 두 번째 시험 시간을 7분이라고 밝힘으로써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관련 엔진 시험임을 암시했다.

동창리는 로켓의 발사와 엔진 시험을 위한 시설이라는 점에서 장거리 탄도미사일(ICBM)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북한이 해체에 착수했던 동창리 시설에서 시험을 진행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외교 업적으로 내세운 북한의 ICBM 발사 및 핵실험 중단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된다. 북한이 ICBM을 발사할 경우 대선 국면에 진입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정치적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바빠진 미국의 행보

북한의 고강도 무력 시위로 미국의 행보도 바빠졌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다시 로켓맨으로 호칭했으며, 북한이 대선에 개입하지 말 것과 김 위원장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15~17일 한국을 전격 방문했다. 비건 대표는 알렉스 웡 부대표와 앨리슨 후커 NSC 한반도 담당 선임보좌관 등 북핵 협상 실무진을 모두 대동했다. 한국을 방문한 비건 대표는 "나는 여기 있고, 북한은 접촉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함으로써 북·미 판문점 회동을 염두에 둔 제안을 했다.

비건 대표는 또한 "미국은 타당성 있는 단계와 유연한 조치를 통해 균형 잡힌 합의에 이를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힘으로써 북한이 원하는 접근법도 제시했다. 비건 대표는 19~20일 예정에 없던 중국을 전격 방문한다. 판문점 북·미 회동 결렬 이후 다시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견인하기 위해 중국의 협조를 구하거나 혹은 북한의 움직임에 새로운 신호를 잡은 데 따른 미국의 행보로 읽을 수 있다.

이전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무력 시위 때와는 사뭇 다른 미국의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ICBM을 건드린 북한의 전략이 일정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일반적인 경우 외교, 특히 북한 문제는 미국의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문제를 자신의 성과로 수없이 내세웠으며, 자신에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도록 활용해 왔다. 미국 대선 길목에서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북한 문제의 함정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김 위원장은 2018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4월 20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경제·핵 병진노선의 결속(종료)을 선언하고 경제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채택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비핵화 협상에 나섰으며, 남북 정상회담 3회, 북·미 정상회담 및 회동 3회, 북·중 정상회담 5회, 그리고 북·러 정상회담 1회 등 숨 가쁜 정상외교를 펼쳤다. 이 같은 김 위원장의 행보에서 비핵화 협상을 통해 경제발전을 위한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제 지난 2년여간 원하는 성과의 도출에 실패한 김 위원장은 자신의 전략적 결정에 대해 연말 시한이라는 기로에 서 있다. 이미 북한은 비핵화 협상의 성과 없이 연말을 경과할 경우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점을 예고한 상태다.

북한이 말하는 '새로운 길'이 ICBM 발사와 핵 실험을 재개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실상 옛길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럴 경우 파국적 결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로선 미국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하며, 이미 미국 조야에서 회자되고 있는 북·미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김 위원장이 인민들에게 약속한 경제건설 총력 집중 노선의 관철도 물 건너간다는 점이다. 원산 갈마 해안관광지구, 삼지연지구, 양덕 온천지구 등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해 건설한 대규모 관광시설의 미래도 암울해지게 된다. 김 위원장이 초심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이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북한 문제를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컨벤션효과로 이용하는 행보를 멈추어야 한다. 또한 대북제재 만능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탄생한 유럽의 징벌적 평화 체제가 히틀러라는 독버섯이 자라는 토양이 되어 결국 비극적인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와 마샬플랜의 주역으로 지금까지 3차 세계대전을 막은 성공적인 평화경제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을 성찰할 일이다. 포용적 평화 체제의 형성이 중요한 이유이다.

북·미 간의 불신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공간은 다시 넓어지고 있다.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은 북·미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텄으며, 9.19 평양 남북 정상 공동선언은 영변 폐기를 명시함으로써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동력을 제공했다. 6.30 북·미 판문점 정상회동도 당일 한·미 서울 정상회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 한반도 문제의 중재자가 아닌 당사자, 나아가 해결사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긴 비핵화 여정의 입구를 여는 것이며, 실질적인 초기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다. 김 위원장의 결단이 옳았다는 신뢰를 심어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상응 조치를 유도해내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장 가능한 남북관계는 전방위적으로 열어야 하며, 남북 철도·도로 연결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을 중국과 러시아가 안보리에서 논의하는 판이다. 고위급 대북 특사 파견은 물론이거니와 파격적인 남북정상회담도 마다할 일이 아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연말 딜레마에서 시급히 벗어나는 일이다. 김 위원장이 연말 '데드라인'을 스스로 접을 수 있는 명분과 실리를 보장하는 창의적인 대안이 시급한 이유이다.

종교를 떠나 성탄절은 인류 모두가 축하하고 향유할 기념일이자 포용과 평화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하는 날이다. 이 축복의 날에 증오와 대결을 가득 실은 '선물'이 배달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성탄절의 평화를 위해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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