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약점이 잡혔다고 해서 트럼프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재가 북한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북한은 제재가 풀리기를 원하지만, 제재는 곧 "미국의 적대시정책"으로 간주되어 북한의 저항의식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은 이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그는 미국이 경제제재를 앞세워 "선 무장해제, 후 제도전복 야망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말한 "무장해제"란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김정은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에 담긴 것으로, 북한에게 핵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도 모두 포기하라는 요구를 지칭한다. 김정은은 미국의 의도가 제재를 통해 "무장해제"를 관철시키고 "제도전복"을 시도하려고 한다고 보는 것이다. 리비아한테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제재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제재 해제 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부흥의 앞길을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재에 약점 잡힌 북한이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셈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먼저 미국에 더 이상 약점을 잡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1차 정상회담 이후부터 2차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김정은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얻은 교훈은 제재 완화 및 해제를 요구할수록 미국은 이를 북한의 약점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약점을 잡았다고 여긴 미국은 요구 수준을 크게 높였다. 그러자 김정은은 제재에 굴복하느니 "자력갱생"으로 돌파하겠다며 미국의 "최대의 압박"에 '최대의 김빼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제재가 더 이상 지렛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제재 해결 싫으면 '군축 대 군축' 받아라?
둘째는 '협상의 법칙'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제재 해제 요구를 내려놓을 테니 미국은 다른 상응 조치를 준비하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북한이 종전선언이나 연락사무소 개소와 같은 조치를 요구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강한 것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여기에는 영변 핵시설 폐기의 상응 조치로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고, 이보다 확실한 것은 군사적 상응 조치 요구가 될 것이다.
북한이 하노이에서 제안한 영변 핵시설 폐기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동결과 불능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폐기를 언급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또한 모든 시설의 폐기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에는 동결 및 불능화의 상응 조치로 중유와 경수로 제공을 요구한 것과 달리 하노이에선 일체의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폐기'를 언급했다.
대신 경제제재의 대폭적인 완화를 요구했는데, 이는 경제적 보상과는 결이 다른 것이다. 영업 정지 처분을 당한 가게에 그 처분을 해제하는 것을 '보상'이라고 일컫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따라 북한이 영변 폐기의 상응 조치로 제재 완화 요구를 내려놓으면, 에너지 지원과 같은 경제적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보다 확실한 것은 군사적 상응 조치 요구가 될 것이다. 즉 '군축 대 군축', '안보 대 안보'로 협상의 법칙을 바꾸려고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리용호 외무상은 2월 28일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비핵화 조치를 취해나가는 데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안전담보 문제이지만 미국이 아직은 군사 분야 조치 취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라 보고 부분적 제재 해제를 상응 조치로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이 "부분적 제재 해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군사적 상응 조치를 요구할 것이라는 걸 뜻한다.
조총련계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김정은 시정연설 분석기사에서 "조선이 제재 해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다른 행동조치로 저들의 적대시 정책 철회 의지와 관계개선 의지, 비핵화 의지를 증명해보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고 짚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건은 북한이 요구할 미국의 군사적 조치의 목록에 있다. 여기에는 김정은이 신년사 및 시정연설에서 밝힌 한미군사훈련의 영구적이고 완전한 중단에서부터 한반도에 전략자산 배치·전개 중단 요구는 담길 것이 확실하다. 이뿐만이 아닐 수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을 지낸 앤드루 김에 따르면, 북한은 1차 정상회담 때부터 줄곧 "괌, 하와이 등의 미국 내 전략자산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는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화"의 정의에 한반도를 작전 반경에 두고 있는 미국의 전략 자산 제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셋째 해석과 연결된다. 즉 북한은 영변 폐기와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협상을 여전히 선호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리용호는 하노이 기자회견에서 "현 단계에서 우리가 제안한 것보다 더 좋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 건지 이 자리에서 말하기 힘들다"고 했고, 김정은도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지난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분명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제재 해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발언이 미국에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제재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던지, 아니면 다른 상응 조치를 준비하던지 말이다. 그런데 미국이 영변 폐기의 상응 조치로 경제적 보상과 안보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군사적 상응 조치에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은 바로 이점을 의식해 '협상의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협상의 법칙'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김정은도 "용단" 준비해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이 하노이에서 내놓은 영변 폐기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를 받지 않은 미국에 섭섭함과 분노를 표하는 것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김정은도 '자기만의 세계'에서 나와야 한다. '왜 내 본심을 몰라주느냐'고 하소연하기에 앞서 과연 그 본심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는지부터 자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비핵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와 핵물질은 어떻게 되느냐에 있다. 그런데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를 말한 이후 1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다. 단계적 해법을 주장하더라도 그 단계를 밟아나가면 어떤 출구에 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김정은이 이에 주저할수록 본인이 표현한 "정치적 계산법"을 달리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반격을 가하기 마련이다. 이들 행위자 가운데에는 북한이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내고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안보보좌관도 있겠지만, 김정은이 여전히 친분을 믿고 있는 트럼프도 포함될 수 있다. 결국 하노이 노딜을 선택한 장본인은 트럼프이지 않았던가?
김정은은 시정연설에서 "미국의 용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핵문제가 북미간의 적대관계의 산물이었다면, 문제 해결도 결국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즉, "미국의 용단"을 원한다면, 김정은 본인도 용단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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