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소속 전국 109개 사업장 12만 명 조합원이 21일 하루 총파업을 진행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이유다. 한편에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 언론들은 연일 문재인 정부가 "노조에 끌려다니고 있고, ILO 협약 비준 등에서 노조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취지의 논조로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날선 공격을 벌이고 있다.
노동존중 사회를 주창한 문재인 정부로서는 양 진영에 낀 상태로, 그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는 양대 노총의 반발에 부딪혔고, ILO 협약 비준은 재계과 보수 야당을 상대로 거친 싸움을 준비중이다.
민주노총은 이날 전국 14개 지역에서 약 4만 명이 모인 가운데 총파업대회를 진행했다.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1만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수도권 총파업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총파업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몰두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를 더는 지켜볼 수 없기에 결단한 투쟁"이라며 "절박함으로 결단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라고 밝혔다.
'협치' 산물이라던 탄력근로제는 양대 노총 비판 직면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 후퇴 징조로 '탄력근로제 기간확대'를 꼽았다. 김 위원장은 "정부와 국회는 시작도 하지 않은 주 40시간제, 주 52시간 상한제를 무력화하려고 있다"며 "탄력근로제 기간확대는 장시간 노동의 합법화"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단언컨대, 탄력근로제 확대 개악은 노조할 권리, 교섭하고 파업할 권리를 봉쇄당해온,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전가 될 것"이라며 "재벌 개혁이 멈춘 자리에 재벌과 자본의 청원입법인 '탄력근로제 기간확대'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라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발표한 결의문에서 "문재인 정부는 바꾸어야 할 제도 개혁과 적폐 청산은 차일피일 지연하고 있고, 거꾸로 하지 말아야 할 개악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며 "우리 노동자의 요구가 여태껏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재벌체제 청산을 외치던 2년 전 촛불의 요구가 외면당하고 있음을 규탄한다"면서 "개악을 중단하고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를 제대로 개혁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 장시간 과로노동과 임금삭감 '탄력근로 기간확대' 노동법 개정 중단, △ ILO핵심협약 비준 및 모든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 보장 노동법 전면 개정, △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 직접 고용 쟁취, 비정규직 철폐 노동법 전면 개정, △ 노후 소득 보장과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한 올바른 연금 개혁 등을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그간 문재인 정부가 진행한 노동정책이 상당히 후퇴했다고 판단한다.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확대한 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이 어렵다고 발언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탄력근로 시간제'가 논란이다.
여야는 주52시간 상한제를 도입하면서 근로기준법 개정안 부칙에 '고용노동부장관은 2022년 12월31일까지 탄력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 확대 등 제도개선을 위한 방안을 준비하도록 함'이란 조항을 명시했다. 즉, 근로시간 단축 과정에서 탄력 근로시간제 확대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에서는 현재 3개월로 한정된 탄력근로 산정기간을 1년까지 연장하겠다고 합의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일부 부작용을 부풀리는 등 최근 경기 위축 상황을 이용해 정부를 연일 공격하고 있는 보수 정당과 보수 언론에 밀려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읽힌다. 이른바 '협치'의 모양새지만, 노동계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주52시간 상한제 도입하고, 그걸 무력화하는 방안을 함께 시행한다는 것은 정책 효과를 보기 힘들뿐더러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다. 그나마 주52시간 상한제는 '6개월 유예'를 두면서 아직 현장에 도입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또한 탄력근로 기간이 확대되면 근로 시간을 초과해 일해도 정당한 시간외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실질적인 임금 감소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ILO협약 비준은 '조중동'과 재계 반발에 직면
문재인 정부의 '협치'는 시험대에 섰다. 자유한국당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자니 노동계가 반발하고, 노동계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자니 자유한국당과 재계가 반발한다. 내친김에 보수 언론은 연일 노조를 '악마화'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때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ILO협약 비준안을 강하게 추진하려 하고 있다. 20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해직자·실업자의 노조가입을 허용하고 공무원·교원의 단결권을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ILO협약비준을 위한 공익위원 합의안을 공개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질 경우, 그간 논란이 됐던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도 해결된다. 직권 취소의 방법 대신, 국회를 통해 국제 조약 비준을 추진함으로 자연스럽게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의 원인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 합의안은 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는 유지하되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권고했고, 특수고용(특고)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를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안 모색'으로 제안했다. 그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고 노동자의 권리도 어느 정도 인정받도록 권고한 것이다.
관련해 민주노총은 "비록 공익위원의 안이지만 공식적으로 처음 ILO협약비준과 관련한 입법처리 내용을 담았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비록 부족하고 한계가 있지만 정부와 국회는 즉각 기본협약 비준과 모든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법 전면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평가했다.
전교조 역시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애초 마련되었던 초안에서 후퇴하여 정부가 긴급히 취해야 할 조치들, 이를테면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조치 등에 대해 명시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한계가 있지만, 해고자, 실업자 등의 노조 활동 제한이나 행정관청의 일방적 판단에 의한 노조 지위의 부정과 같은 노동적폐들이 청산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보다 밝아졌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ILO 기본협약비준 관련, 공익위원들의 합의안은 재계에서 비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 <조선일보>는 이날자 신문에 "(민주노총) 총파업 하루 전날...정부, 탄력근로제 빼고 다 들어줬다"는 제목을 싣는 등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난성 기사를 쏟아냈다. "강성 노조 세상인데 '노조 하기 더 편한 나라' 만들겠다니"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었다.
'샌드위치' 신세 문재인 정부, 왜 이런 상황에 처했을까? 방법은 없을까?
문재인 정부의 노동 정책 관련 현재 스탠스를 거칠게 요약하면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내 주고 ILO협약비준을 취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ILO 협약 비준 역시 국회를 통해 관철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협치'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받고 ILO 협약 비준에 협조할 가능성은 현재로서 크지 않아 보인다는 게 문제다. 무엇을 위한 '협치'인지 의문이 생긴다.
자유한국당과 재계는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얻어낸 후 내친김에 최저임금을 비롯한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정책들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또한 정부에 각종 규제 완화를 관철시키고 노조를 '악마화'하기 위해 정치 공세까지 벌이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기본적인 단협 협상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노조 측을 비난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일부 인사들은 사석에서 '자본 파업'까지 거론하는 등 전방위로 노동계와 정부를 '협박'하고 있다.
노동계와 보수 진영에 낀 문재인 정부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문재인 정부 역시 보수 진영의 '노조 악마화'의 전략에 일정부분 말려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은 대기업의 사업 확장과 이윤 추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제 완화를 연일 강조하고 있다.
현 상태로 간다면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보수 야당과 재벌 기업이 요구하는 건 다 내주고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져, 진보 지지층이 떠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과 재벌 대기업이 '노조 비판하고 규제 완화해줘 고맙다'며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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