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1·2차 인혁당 사건 구분도 못하면서 우겼나?

[기자의 눈] 판결이 두 개? 사건이 두 개!

'역사인식'이 문제라고? 아니다. '팩트'가 문제였다. 유신 정권하의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판결이 두개"라고 말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11일 역사적 '팩트'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근본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박 후보는 11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인혁당 사건은) 판결이 두개"라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전날 말했던 것과 관련해 "어제 말한 대로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이 나온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 조직(인혁당)에 몸 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해 역사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개의 판결"이 모순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새로운 '근거'를 댔다.

박 후보가 주장한 "그 조직에 몸 담았던 분들"은 민주당과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박범진 전 한성디지털대 총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총장은 지난 2010년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출간한 학술총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에서 "제가 입당할 때, 당의 강령과 규약을 봤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른 손을 들고 입당 선서를 한 뒤 참여했다"며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었다. 박 후보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박범진 전 총장은 1차 인혁당 관련자다.

박 후보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인혁당 참여자의 증언을 토대로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즉 '2차 인혁당 사건'의 "판결이 두 개"라고 말한 근거를 설명한 셈이 됐다. 명확히 하자면 1차 인혁당 사건은 판결이 하나다. 2차 인혁당 사건은 판결이 "두개"다. 게다가 1차 인혁당 사건은 유가족 등에 의해 2011년 4월 1일 재심이 청구된 상태다. '재심 여부'가 법원에 계류된 상황이다.
▲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 집행' 2달 여 전, 박근혜 후보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정권 신임 국민투표' 투표함에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매일경제

박 후보가 언급한 "그 조직에 몸 담았던 분들"이 박범진 전 총장이 아닐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박 후보는 '인혁당 재건위'에 몸 담았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사람일 모종의 '증인'을 언급하고 있는 셈이 된다.

결국 "박근혜 후보는 1차 인혁당과 2차 인혁당 사건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가장 설득력을 얻게 된다.

박 후보의 이같은 '무지'는 다른 추측을 파생시킨다. 1975년 4월 9일, 유신 정권에 의해 '사법 살인' 사건이 나기 약 두달 전인 2월 1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 헌법 재신임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72년 발표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위헌 기록'들을 연일 갱신하던 유신 헌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던 때였다. 당시 '영애' 였던 박 후보는 유신헌법 유지를 위해 설치된 투표함에 박 전 대통령과 나란히 한 표를 행사한다. 이 사진은 1975년 2월 12일자 <매일경제> 1면 톱에 실린다. 계엄 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인 재신임으로 귀결됐다.

당시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유신 재신임 투표함에 한 표를 던졌던 박근혜 후보는 유신이 없었던 시절의 '1차 인혁당 사건'과 유신 헌법에 따라 처형된 '2차 인혁당 사건'이 무엇인지 헷갈려 하고 있다. 게다가 "2개의 판결" 논란에서 긴급조치 등 위헌적 법률에 근거한 군사 법정의 판결을 지난 2007년 대법원 판결과 동일시하는 인식을 보인 것도 문제다. 이는 대통령의 '헌정관'에 대한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 1975년 4월 9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 소식 ⓒ동아일보

박근혜 후보를 위한 '1차, 2차 인혁당 사건' 요약

박근혜 후보의 발언 때문에 이런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으니, 박 후보를 위해서라도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며 '지하 조직 사건'을 발표했다. 18일 중앙정보부로부터 '인민혁명당'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는 구속연장 만료일인 다음달 5일 "증거가 없어 기소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소를 거부했다.

이에 신직수 당시 검찰총장은 '검사 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기소 내용을 알리가 없는 당직 검사 정명래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65년 6월 29일 항소심 재판부는 10년 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게 될 도예종에게 징역 3년, 박현채 등 6명에게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징역 1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이 판결이 확정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진실위는 이 사건과 관련해 "도예종 등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공산비밀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결성해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고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위와 같은 조직의 결성 사실조차 인정되지 않았으며, 당시 발표문은 확인되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발표한 것"이라는 취지로 결론을 냈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가운데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25일 도예종 등 23명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엮어 구속 시켰다.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이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긴급조치 1, 4호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다. 특히 긴급조치 1호는 이 재판을 '군사법정'에 회부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을 1항에 명시하며 이들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법원은 군사법정의 판결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긴급조치 1호와 4호에 규정된 대로 이들 가운데 8명은 1975년 4월 8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은 18시간만에 집행된다. 그러나 이들을 사형으로 내몬 긴급조치는 전두환 정권 시절 뿐 아니라 법원에 의해 수차례 '위헌'임을 지적받아 왔다.

결국 2002년 피해자 유족 등은 '2차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재심 청구를 했고, 대법원은 2005년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 결정을 내렸다. 2007년 억울하게 죽은 8인은 33년 여만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것이 1, 2차 인혁당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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