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할 때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나요?"
안부 인사처럼 한 번씩은 해 본 말이다. 나는 동유럽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슬로베니아 류블라냐로 향하는 국제버스 안이었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태어났다는 슬로베니아의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겨울이 주는 '동구(어쩜 이렇게 고색창연한 이름인가)'의 스산한 풍경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2시 30분경(한국 시간 오후 10시 30분경) 휴대폰에 속보가 떴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처음에 보였던 그 반응처럼, 나도 그것이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속보.
이역만리 타국에서 맞이하는 모국의 계엄 선포 뉴스는 초현실적이다. 유고 연방의 붕괴 이후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의 독재 악몽이 사라진지 20년이 훌쩍 넘은 동구의 땅에서, 공산주의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소소한 여행의 즐거움이 갑자기 그로테스크한 악취미처럼 다가왔다. 슬로베니아에 도착해 류블라냐 터미널에서 배낭을 질머지고 호텔로 향하는 그 시간, 한국에서 계엄군을 실은 헬리콥터는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계엄이란 건 말의 인플레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와 윤리의 제방을 범람하던 말의 다툼이 결국 계엄이란 단어를 먼지 쌓인 사전에서 소환해 내고, 너를 죽이겠다거나, 너를 미워한다거나, 너를 밟아버리겠다는 말이 온갖 변주를 거쳐 당도하게 된 어떤 마지막 단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강을 건너는 헬기를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건널목에서 차들을 여유있게 흘려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동구의 겨울은 춥고 어두웠다. 오후 4시를 갓넘겼지만 이미 해는 쫓기듯 '자유의 방위', 서방을 향해 내리 꽂혀 자취를 감췄다. 눈 앞 유럽의 성당은 어둠을 이기려는 듯 크리스마스 시즌의 조명줄을 휘감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2000년 전 신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었으나, 낯선 땅에서 시대착오적 우울감에 빠져 있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었다.
유튜브를 켰다. 8500킬로미터 떨어진 서울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실시간으로 류블라냐의 작은 호텔방에 전해지고 있었다. 계엄 포고령 1호가 무슨 차압딱지 계고장처럼 픽 날아들었다. 직업병이었다. 언론과 관련된 문구를 가장 먼저 찾았다. 포고령 3호,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아, 이건 교과서다. 독재의 교과서다. 가짜뉴스, 허위선동을 금한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될 수 있다. 내가 모르는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도 몸부림조차 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계엄이란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정치 분야를 꽤나 취재해 온 기자로서의 자존감 붕괴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포고령을 읽는 중간중간 헛웃음이 터져나왔지만, 인지 부조화 현상을 극복하려 양미간을 커튼처럼 구겼다. 비상계엄을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을 받은 후, 첫번째로 내린 결정은 '앞으로 카드를 사용하지 말고 되도록 현금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외환시장은 출렁였고, 환율은 수직상승하고 있었다. 모국의 계엄을 보며 타국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임이 분명했다. 내 앞에 놓여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환율 걱정에 이어 든 생각은 '나는 과연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였다. 구글 창을 열고 'EU 망명 절차'를 검색했다. 웃지 마시라. 그렇게 된다. 계엄 포고령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나는 언론인이다. 그간 내가 써 왔던 칼럼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인천공항에서 붙잡히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검색창 맨 위엔 'EU 망명 규정 강화'라는 제목의 기사가 제일 먼저 떴다. 국제 엠네스티는 2024년 1월에 개정된 EU의 이주 정책으로 인해 망명법이 수십년 전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었다. '유럽의 극우화 열풍'이란 단어 조합은 뉴스를 다룰 때나 쓰는 어떤 클리셰일 뿐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 조국의 극우화라니. 망명도 쉽지 않구나.
내가 속해 있는 SNS 메신저 방들에선 실시간으로 계엄 상황 정보가 공유되고 있었다. 국회에 달려긴 기자와 시민들이 생중계하는 유튜브 영상 속에서 계엄군은 야간 투시경을 쓰고 소총으로 무장한 채 유리창을 깨부수고 있었다. 공포에 휩싸인 국회 보좌진과 시민들이 고함과 비명을 내질렀다. 저 시커먼 총구 속에 탄환이 도사리고 있다는 상상이 끝없는 우울 속으로 날 밀어넣고 있었다.
산책을 나갔다. 류블라냐 중심을 흐르는 강은 사바강의 지류다. 그 역시 도나우 강의 지류인 사바 강은 유럽 역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카톨릭과 정교회, 유럽과 오스만을 나누던 분열의 강이었던가. 미혹은 호텔방에서부터 나를 따라나섰다. 거리의 성긴 추위 틈새를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춥지만 따뜻하게 껴입은 유럽 사람들의 웃음이 메우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온전히 즐길 수 없는 유일한 국적의 인간. 윤석열의 저 비밀스러운 방에서 새어나온 칼칼한 포고령이 목구멍의 침을 계속 위장으로 흘려 내렸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나는 영사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지금 여의도로 향할 수도 없고, 용산으로 향할 수도 없다. 서울의 집은 너무 멀었고, 숨기에 이 곳은 너무나 낯설다. 슬로베니아의 공항에서 '한국으로 갑니다'라고 하면 당국이 내게 경고를 해 줄까? 인천공항은 폐쇄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갑자기 국회 앞에서 무장한 군인의 총구를 잡고 흔들던 여성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의도에 있었다면 나는 그 총구를 잡아 뺄 수 있었을까? 짧은 대기음이 지난 후 젊은 직원이 전화를 딸깍 받았다. 한궁은 지금 한밤중이다.
"해외 체류중인데 한국에서 계엄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인천공항을 통한 입국이 가능할까요?" 직원은 당황한 눈치였다. "선생님처럼 문의하는 전화가 많이 오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입국하시나요?" 내가 답했다. "아니요" 직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세요" 다시 물었다. "공항이 폐쇄 조치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가 답했다. "폐쇄될 지 안 될 지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내일 입국하는 사람들은 입국이 가능한가요?" 다시 물었다. "내일 입국하시는 분들이 안그래도 문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가 답했다. "그 분들에겐 어떤 매뉴얼을 안내해주시고 있나요?" 내가 그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 같았다. "그건...제가 확실히 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도 답답했고, 나도 답답했다. 한참을 의미 없는 문답을 주고받았다. 비로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사실 기자인데요, 대통령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한국에 입국할 경우 정치적 탄압이 예상되는 상황이예요. 망명 절차에 대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직원의 태도가 약간 바뀌었다. 기자 응대를 잘 못했다간 엉뚱한 기사가 나갈 수 있겠다는, 그런 위축된 태도는 아니었다. 매뉴얼을 살짝 벗어나기로 한 것 같았다. 그가 속내를 좀 더 내비쳤다.
"저...방금 전에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기다려 보시면 어떨까요?" 기다려 보라니. 내가 대꾸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계엄 해제 선언을 하지 않고 있잖습니까? 대통령이 계엄 해제 선언을 하지 않으면 계엄군은 국회에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슨 답변을 원하고 있었을까? 대사도, 영사도 아닌 그에게 무슨 책임 있는 답변이라도 듣길 기대했을까? 그가 말했다. "국회가 계엄을 해제했으니 계엄은 해제될 겁니다."
슬슬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장담하시죠?"라고 대꾸했다. 언성을 높이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고 전화를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통화를 더 하든, 더 하지 않든, 그와 나 사이의 대화는 계속 겉돌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뭐라도 햐야 했다. 무슨 질문이라도 해야 했다. 그때 그가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말을 했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니... 질문거리가 떨어졌다. 나는 직원으로부터 담당 영사 연락처를 받은 후 전화를 끊었다. 슬로베이아에는 영사가 체류하지 않으니,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있는 영사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애초 여행 계획에 오스트리아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한국에서 새벽 당직을 서고 있는 영사 콜센터 직원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그는 왜 하필 계엄날 당직을 서는 바람에 해외 체류 국민들의 걱정스러운 전화 민원을 받고 처리하는 일에 휘말리게 됐을까? 그 역시 나와 같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일 뿐인데. 무의미한 행위와 말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류블라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 사이를 유영했다. 중얼거렸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하는 것'이라니. 그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군이 국회를 침탈하려 하고 있는 계엄 상황에서, 수화기 너머로 예의를 갖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모습은 무슨 오래된 고골의 소설이나,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고지식한 관료와의 대화 같았다. 그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화를 낼 힘도 없고, 화를 낼 생각도 없는 두 명의 한국인이 루블라냐라는 낯선 도시에서 무슨 의미 없는 몸부림을 몰래, 소심하게 부리고 있는 것인가. 휘발되고 말 대화들. 의미 없음의 연속. 계엄과 해제와 계엄의 후속 조치에 일말의 영향도 끼칠 수 없는 그런 말들을 국가의 말단 구성원들이 나눠본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응대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국회가 계엄을 해제했으면 대통령이 계엄을 해제하는 게 맞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을 것이다. "그래야 하니까"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국회가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킨 후 새벽 2시, 국회의장은 계엄 해제 요구안을 대통령에게 발송했다. 하지만 윤석열은 두 시간이나 더 지났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불안했고, 그도 불안했다.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새벽 4시 30분이 되서야 비로소 대통령은 '그렇게' 했다.
외교부 콜센터 직원도 나도, 국회에 진입했으나 시민과 국회의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못한 707부대 계엄군도 우리 사회의 말단이다. 당위성이 사라진 시대. 극한의 갈등이 미덕인 시대. 죽지 않으면 죽임당하는 그런 시대.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말초 신경은 살아 있는 것인가. 당연한 상황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상식이라 부른다. 더 당연한 건 허황된 망상에 의거한 계엄 따위가 선언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상식이다.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25년 12월 3일, 지금, 독재자는 탄핵됐고, 시민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세웠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상황'을 회복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시간 속에서 불안과 상실, 분노와 체념을 모두 겪어왔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정치란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 '그렇게 있는' 상태를 유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윤석열 3년, 당연한 상식이 부서진 시대에 대한 기록을 다시 들춰본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도 '그래야 하는 것'들을 지키려는 군인들과 공무원들, 기자들, 그리고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귀하게 생각하게 됐다. 여의도로 갈 수 없었던 류블라냐의 한 여행객으로서, 이 작은 기록을 변명처럼 남겨보고자 한다. 아, 나도 계몽된 것인가.
(이 글은 책 <윤석열과 그 공범들>(모비딕북스) 에필로그에 담았던 글을 대폭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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