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비핵화를 여러 단계로 나눠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그럴 수밖에 없다.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상응조치도 단계적으로 제시됐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확증 편향'이 드러난다. 살라미는 북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협상해온 모든 나라도 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살라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조치에 걸맞은 단계적 상응조치를 꺼려해온 것이다. 6.12 북미정상회담 이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던 핵심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9월 20일 미국 국무부가 내놓은 입장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헤더 나워트 대변인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인 폐기"를 위해 요구한 상응조치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비핵화 없이는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 비핵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미정상회담에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평화체제 구축에도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종전선언→평화협정 체결→협정 이행→평화체제 구축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종전선언도 거부했다.
만약 나워트 대변인의 답변이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기 전에는 종전선언에 임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다시 열린 비핵화로 가는 길은 또다시 막힐 공산이 커진다. 미국이 진정으로 비핵화를 원한다면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대북 제재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단계적인 비핵화 초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제재를 완화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강화시켜왔다. 20일 나워트 대변인은 이러한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북한의 비핵화를 얻기 위해서는 제재가 이행돼야 한다"며, "우리는 페달에서 발을 떼면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제재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즉 '유지냐 해제냐'의 문제가 아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따라 얼마든지 완화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 역시 실망스럽다. 비유하자면 그는 작년까지는 인상을 쓰고 막말을 하면서 북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올해, 특히 북미정상회담 이후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대북 제재는 요지부동이다. 미소 띤 얼굴로 멱살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젠 트럼프 행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트럼프가 그토록 강조해온 '공정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겠다고 말이다. 진즉에 했어야 할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 완화는 미국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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