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트럼프에 '영변 핵시설 영구폐기' 새 카드 던졌다

[정욱식 칼럼] 트럼프, 김정은의 '통 큰' 제안 받아야

9월 18-2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핵 신고'였다. 북한이 핵 신고를 확약할 것인가의 여부를 이번 정상회담의 성패를 가늠할 핵심 지표라는 주장도 많이 나왔었다.

하지만 '9월 평양 공동선언'과 문재인 대통령 및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기자회견에서는 이 단어가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왜 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핵 신고는 '교착 상태의 끝'이 아니라 '더 큰 문제의 시작'이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불일치'이다. 북한이 핵 신고를 하더라도 미국의 추정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고편은 이미 나온 바 있다.

6월 29일 미국 방송 NBC는 정보당국의 보고서 내용을 인용해 "북한이 최근 몇 달간 여러 곳의 비밀 장소에서 핵무기의 재료인 농축 우라늄 생산을 늘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워싱턴포스트> 역시 복수의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국방정보국(DIA)은 북한이 미국 정부를 속이고 핵탄두와 미사일, 핵 개발 관련 시설의 수를 줄여서 신고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북한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7월 초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의혹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북한이 핵 신고를 하더라도 미국 정보기관의 분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번째 문제가 자연스럽게 불거지게 된다. 바로 '검증'이다. 북한이 결백하다면 검증을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검증 대상과 방식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북핵을 완전히 검증하려면 북한 전역을 샅샅이 뒤져야 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핵 신고가 불러온 위기

과거의 사례를 살펴봐도 핵 신고가 새로운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두 차례 핵 신고를 했었다. 첫 번째는 1992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한 때였다. 당시 북한은 여러 핵시설과 더불어 플루토늄 90g을 추출했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미국의 정보기관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핵무기 1~2개 분량인 10kg 정도 된다고 주장했다.

'플루토늄 불일치'가 발생하자 미국은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주권 침해'를 들어 거부했다. 이 문제로 인해 1994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전쟁위기까지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2008년 미국은 북한이 건네준 핵 일지를 검토한 결과 북한이 1992년에 신고한 게 정확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두 번째는 2007년 6자회담의 10.3 합의에 따른 핵 신고였다. 당시 북한은 30.6kg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도 이를 수용했다. 그러자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네오콘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이 빠졌을 뿐만 아니라 실체가 불분명했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및 시리아로의 핵 시설 수출 내역이 빠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오콘들은 검증과 관련해 사실상의 '백지 수표'를 요구했고, 이명박 정부도 이에 가세하고 말았다. 그런데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이명박 정부는 에너지 지원을 중단해버렸고, 그 결과 6자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바로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다. 그런데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리스트인 조시 로긴에 따르면, 볼턴은 "현 시기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며, "북한이 먼저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및 자산을) 신고하고, 미국이 추가적으로 양보 조치를 취하기 전에 북한의 신고는 검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볼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신고→검증→종전선언'의 순서를 상기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은 이를 볼턴이 쳐놓은 '덫'에 걸려드는 것이라고 여겼을 공산이 크다. 또한 북한이 미국과의 적대관계가 청산되기 전에 핵과 미사일 정보를 미국에 넘겨주고 이를 검증받게 되면 미국에 선제공격 목록을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우려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더 솔깃한 제안을 내놓은 북한

북한이 핵 신고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은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공산이 크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해서 판이 깨질 수도 있는 선택, 즉 핵 신고는 뒤로 미루면서 주목할 만한 제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밝히면서 두 가지 구체적인 입장을 내놨다. 첫째는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의 상응조치 없이도 주동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함의를 내포하면서 '못 믿겠다면 직접 와서 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둘째는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상응조치는 종전선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미국이 종전선언에 동의하면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인 폐기로 통 크게 화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귀가 솔직해지는 제안일 수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겐 그렇다. 전임 대통령들과의 차별성을 원하는 그에게 큰 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때에는 영변 핵시설 '동결'까지 갔었다. 부시 대통령 때에는 '불능화'까지 갔었다. 모두 가역적인 조치들이었고, 실제로 미국의 약속 불이행에 불만을 품은 북한은 재가동에 돌입했다.

그런데 북한이 이번에는 "영구적인 폐기"를 협상 카드로 꺼내들었다. 미국이 종전선언에 응하면 더 이상 핵물질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물리적 조치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6,12 싱가포르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계속 가동해왔다고 비난해온 미국으로서는 마땅히 화답해야 할 제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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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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