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진 않았다?

[분석] 법이 없고, 사회 성문화가 '후진적'이어서 이런 '판결'?

법원이 성범죄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1심 무죄 판결을 내린 데 대해 "성인지적 감수성이 결여된 재판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검찰과 피해자 김지은 씨 측은 '도지사의 위치와 권세를 이용한 전형적인 권력형 성범죄'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증명 부족’이라며 김 씨 주장을 내쳤다. 올해 이어진 미투 사건 가운데 내려진 첫 선고였던 만큼 이후 미투 재판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14일 오전 피감독자 간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쟁점은 ① 업무상 위력이 존재하였는지, ② 위력을 행사하였는지, ③ 위력의 행사와 간음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④ 그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했는지 여부였다.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가지 쟁점은 인정하지 않았다. 즉 위력을 행사해 '간음'을 했다는지 여부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고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가령 김 씨가 굳이 가식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는 친한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안 전 지사에 대한 지지와 존경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점, 간음 행위 전 단계에서 안 전 지사가 행한 신체 접촉은 맥주 들고 있는 김 씨를 포옹하며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했다는 것인데, 이런 정황으로 봤을 때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첫째, 업무상 위력이 존재하지만, 성폭력 행사 시에는 위력이 없었다는, 다소 모순적으로 들리는 논리가 도출된 셈이다.


둘째, 피해자는 성적 주체성을 갖춘 사람이며 "피해자의 심리상태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그루밍, 학습된 무기력, 해리증상, 방어기제로서의 ‘부인과 억압’, 심리적으로 얼어붙음 등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의 심리 상태가 '피해자스럽지 않다'는 결론이다.


이같은 논리라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에 '위력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상관에게 적극적으로 'NO'를 외쳐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NO'를 외치더라도 성폭력이 감행되야 한다.


왜 이런 판결이 나왔을까? 재판부는 비판을 예상한 듯, '법 체계의 미비'와 '사회 전반의 성인식'을 탓했다. 그래서 재판부는 '죄형법정주의'를 새삼 강조했다.


재판부는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성인지 감수성적 고려'가 행해져야 한다", "관행화, 구조화된 폐습으로서의 권력형 성폭력 행위가 우리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점과 이를 위해서 사회적으로 연대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 관하여 십분 공감할 수 있다"면서도 피해자의 진술에는 거듭 "납득하기 힘들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른바 "No means No rule"(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에는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이나 "Yes Means Yes rule"(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성관계로 나아가면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이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우리 성폭력범죄 처벌 법제 하에서 피고인이 ‘위력을 행사하여’ 간음 및 추행행위를 저질렀다고 볼만한 증명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사안에서는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재판부는 "처벌체계 도입 여부는 입법론적 문제이고, 사회 전반의 성문화와 성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문제"라고 했다.


법이 없고, 사회의 성문화가 '후진적'이어서 이런 '판결'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4일 1심 선고 후 소감을 밝히는 안희정 전 지사. ⓒ프레시안(서어리)


▲1심 선고 직후 열린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프레시안(서어리)

"재판부, 성인지적 감수성 고려?...재판 자체가 위력"

김 씨 측은 "(증명 부족이라고 판단한) 재판부가 왜 피해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선고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김 씨 대리인을 맡은 정혜선 변호사는 "재판부는 구체적인 위력 행사를 입증하기 부족하다는 말로 무죄를 선고했다"며 "그렇다면 피해자가 방송을 통해 처음 알린 직후 피고인이 SNS에서 인정한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합의하에 한 성관계라면 그 증거는 무엇인지, 피해자의 말을 왜 못 믿는 것인지 너무 많은 의구심을 남기는 판결"이라고 했다.

김 씨와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재판부는 애초 재판부가 성인지적 감수성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김 씨에게 '피해자다움', '정조'에 대한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이날 김 씨는 입장문을 통해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씨 역시 선고 후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정조를 지키지 않고 뭘했느냐'는 질문을 했다"며 재판부가 애초에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재판을 진행해왔다고 주장했다.

권김현영 씨는 "재판 자체가 위력이었다"며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굳이 폭력 행사하지 않아도 된다. 눈빛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게 권력을 지닌 이의 특권인데 재판부는 그런 것이 전혀 행사되지 않은 것처럼 판결문에 썼다. 마치 안희정과 김지은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수많은 미투 사건이 이후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오늘의 끔찍한 판결이 우리 사회의 더 불평등한 부분을 더 강화시킬 것이라 생각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김지은 씨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나에게 없다고 호소한 게 아니라 침해됐다고 호소한 것"이라며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어서 가해자가 무죄라면,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 모든 사람은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기적의 논리를 재판부가 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제지,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한 성적 자기 결정권은 하늘에만, 책에만, 인권선언에만, 남자들한테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검찰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법원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검찰은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했고, 피고인의 요구에 거부 의사를 표시했을 뿐 아니라 피해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호소했다"며 "인적·물적 증거에 의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됨에도 법원은 달리 판단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안 전 지사는 선고 직후 기자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럽다. 많은 실망을 드렸다"며 "다시 태어나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했다.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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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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