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이 질문하는 창작의 윤리: 누가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가

[이동윤의 무비언박싱] <가능한 사랑>

다큐멘터리의 윤리적 문제를 거론할 때 항상 개입되는 것은 창작자와 카메라 앞에 선 자 사이에 발생하는 권력 불균형 상태다. 카메라는 필연적으로 이미지를 착취하고 고정해 대상화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착취당한 이미지를 안락한 의자에 앉아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 속에서 소비한다. 이는 전형적인 피핑톰, 관음증적 욕망의 시선이다. 주체를 객체로 만들어 버리는 카메라의 속성을 고려할 때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는 필연적이며 동시에 극복 불가능한 한계로 다가온다. 현장을 기록하고, 진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하더라도 이미 매체(필름 또는 디지털 정보)로 기록된 이미지는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촬영 전, 원형으로서의 현실과 달리 독자적인 해석 가능성을 품는다. 그러니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담아낸다 하더라도 그 현실을 카메라 앞에 선 자의 목소리와 직접적으로 연결해 사유하는 것은 고민이 필요하다.

다큐멘터리의 윤리적 문제는 카메라의 착취적 성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창작자가 선한 의도로 인물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 의도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촬영과 편집 과정 속에서 창작자의 의도가 개입하며 인물을 창작자의 시선으로 고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시선이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가의 문제. 창작자는 카메라를 통해 인물을 바라볼 수 있지만 대상이 된 인물은 창작자를 바라볼 수 없다.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 시선은 절대 카메라의 시선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닐 수 없다. <가능한 사랑>은 시선의 문제를 '대리/대표 가능성'으로 치환한다.

▲예지가 호석과 미옥의 집 마당에서 미옥을 인터뷰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는 SP 중공업에서 해고된 노동자의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을 만난다. 예지는 그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고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술을 먹지 못하게 가로막는 미옥, 그녀에게 화를 내는 호석의 상황은 당시 장례식장에 있는 모두의 주목을 산다. 적어도 호석의 역사와 세상을 떠난 자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자들로서 미옥에게 화를 내는 호석의 호통 앞에서 조문객들은 침묵하며 시선을 거둔다. 침묵을 깨며 끝까지 두 사람을 응시한 자는 예지가 유일하다. 응시의 이유는 단연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갈등'에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현장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기록하는 것은 때로 의무이기도 하다. 갈등의 상황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고 국가가, 언론이 그 사태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일방적으로 악마화한다면 다큐멘터리 감독이 기록한 갈등의 순간은 진실의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옥과 호석의 다툼, 술을 먹으려는 자와 먹지 못하게 가로막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이 해고 노동자들의 억울함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고통을 은유할 수 있는 극적 순간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창작자인 예지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 두 사람의 삶을 끈질기게 응시하겠다는 예지의 판단에 대해 손쉽게 옳고 그름을 따져 물을 수 없다. 대신, 그녀가 '줌'이라는 카메라의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카메라를 들고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에 대해서는 창작자의 위치에 대해 질문해 볼 수도 있다.

▲미옥의 위기의 순간을 몰래 훔쳐 보며 촬영하는 예지. ⓒ넷플릭스

예지는 인터뷰가 아닌 현장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을 때 줄곧 핸드헬드, 짐벌과 같은 테크닉을 구사한다. 핸드헬드는 촬영자의 움직임과 호흡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전달되는 촬영 기술이다. 시선의 주체를 정확히 드러내며 현장의 긴박함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반면 짐벌은 흔들림을 최소화하는 장치를 활용하여 매끄러운 부유감을 통해 탈체현화된 시선을 만들어낸다. 영화 미학적 측면에서 몰입감을 강조할 수 있으나 시선의 주체를 은밀히 감출 수 있는 효과도 지닌다. 흥미롭게도 예지는 두 가지 테크닉을 모두 구사하며 자신의 위치를 과감히 드러낸다. 촬영을 하며 미옥과 자유롭게 대화도 나누고, 자유롭게 미옥과 호석의 삶 속에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장면들을 마음껏 촬영한다. 두 사람은 예지의 촬영을 각각 한 번씩 중단시킨 바 있다. 호석은 장례식장에서, 미옥은 철이의 운동회에서. 그때마다 예지는 바로 카메라를 끄고 죄송하다며 사과한다. 그녀의 사과는 분명 충분히 진솔했다. 동시에 마치 어린아이가 혼나듯 어리숙하기도 했다. 어리숙하기 때문에 진솔할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창작자로서 예지의 태도를 불신하게 만든다.

불신의 근원은 카메라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미옥과 호석의 삶을 무례하게 헤집어 놓으면서도 철저히 카메라 뒤에 숨는 예지의 이중적 태도로부터 발생한다. 예지에게 두 가지 테크닉 속에 담을 수 있는 시선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도구로서 카메라를 휘두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지는 카메라를 적극 활용하여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위치는 철저히 카메라 뒤에 고정한다. 노동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노동자 계급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예지의 태도에서 우리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발견하기보다 무엇이 중요하고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무지한 예지의 얼굴을 읽는다. 요컨대, 예지는 무지한 태도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조차 모른 채 미옥과 호석의 삶을 현 시대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삶으로 표현하려는 중이다. 투명할 정도의 무지함으로 카메라를 들고 고통 속에 놓여 있는 해고 노동자의 삶을 헤집는 모습을 응시하기란 쉽지 않다. <가능한 사랑>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그 불편함을 던져 놓고 고민하도록 만든다. '지금 극장에 앉아서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하는 당신의 시선이 예지의 시선과 무엇이 다른가?'

▲예지의 남편 상우(조인성)의 별장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는 미옥과 호석, 그리고 철이. ⓒ넷플릭스

<가능한 사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공장 옥상에서 시위하던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하는 장면을 선택하겠다. 이 장면은 2009년 8월, 뉴스와 신문을 본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면 모두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순간이다.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에서 시위하던 노동자들을 국가 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던 장면이 온 국민에게 노출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곧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도망치는 노동자들을 붙잡고 무참히 구타하는 전경들의 폭력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계엄령에 맞서는 평범한 시민들을 향했던 군부의 폭력과 무척 닮아 있다. <가능한 사랑>은 이 순간을 (굳이) 영화적으로 재현해낸다. 그것도 실제 당시 촬영되었던 이미지와 최대한 가깝게 닮은 형태로 말이다. 예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현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촬영하려 하는데 이창동 감독은 실제 촬영된 사건 당시의 이미지들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영화적으로 최대한 현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선택한다. 과연 무엇이 더 윤리적인 태도일까?

▲촬영장에서의 이창동 감독. ⓒ넷플릭스

예지는 현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찍으려 한다. 그 욕망 속에서 타인의 고통은 (창작이라는 미명 아래) 포획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반면 이창동 감독은 그 이미지를 새롭게 만드는 쪽을 택한다. 만드는 자는 찍는 자처럼 "나는 거기 있었고 있는 사실을 기록했을 뿐"이라는 알리바이를 가질 수 없다. 모든 구도와 동작과 폭력의 강도가 연출자의 책임 아래 놓인다.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영어의 representation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독일어 단어 Vertretung(대표/대리)과 Darstellung(재현/표현)으로 구분 지어 분석한 바 있다. 두 단어 모두 영어로는 representation으로 번역되지만 우리는 엄밀하게 누군가를 대표/대리하는 것과 그 자를 재현/표현하는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누군가를 어떻게 재현/표현할 것이냐는 누가 그를 대표/대리해 말할 권리를 갖느냐와 얽혀 있다. 예지는 미옥과 호석의 삶을 재현/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현 노동자들의 대표/대리로 만들려 했다. 두 사람의 삶을 재현/표현하려는 기획과 욕망은 예지의 것이지만 미옥과 호석이 현 노동자들의 대표/대리자가 되는 것의 책임은 예지가 아닌 당사자들에게 넘겨진다. 반면 이창동 감독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영화적으로 재현/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대표/대리자로 만드는 것의 책임까지 본인의 것으로 떠안는다. 여기서 이창동 감독은 SP 중공업으로 은유된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을 대표/대리하는 자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을 재현/표현하는 주체가 된다.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은 억압받는 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유무를 가르는 것에 있지 않다. 스피박의 관점에서 억압받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언어로 발화해왔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주류 사회 시스템이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억압받은 자들의 언어는 고통의 언어이자 폭력의 언어다.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 동지들의 배신을 겪어야 했던 호석은 자신의 경험을 쉽게 꺼내놓지 못한다. 대신 상담과 인터뷰를 거부하고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는 행동들 속에서 우린 그의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말할 수 없음을 행동으로 전하는 호석의 언어를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 쉽게 해석해내지 못한다. 장례식장에서 소리치며 화내는 호석의 태도에 모두가 시선을 돌리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처럼, 우리는 고통 속에 놓인 자들의 곁에 다가가는 것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한다. 고통받는 그들의 현 상태를 우리가 절대로 쉽게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타당하다. 하지만 고통의 언어로부터 거리 두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해석하려 노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가능한 사랑>은 적어도 해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기 위해 노력한다. 감독이 대표로서 책임을 품고 그들의 언어가 세상에 전달될 수 있도록 애쓴다. 그 노력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는가? 그것이면 충분하다.

▲<가능한 사랑> 메인포스터. ⓒ넷플릭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이동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 시나리오,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오이시맨>(2008)의 시나리오를 집필 했으며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 했다. 2019년부터 4년 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와 함께 ‘한국퀴어영화사’ 연작 시리즈를 책임 편집 했으며 『A Collection of Korean Queer Cinema』(2023)를 집필하여 영문으로 출간했다. 현재 영화 평론,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와 창작을 수행 중이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