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많은 집에서 정치 이야기로 서로 낯을 붉혔을지 모르겠다. 해마다 추석 풍경은 조금씩 달라져도, 모인 사람 여럿이 정치평론가 노릇을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삶의 양식은 영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꼭 나쁜 일은 아닐 성싶은 것은, 이런 에너지가 있었으니 그나마 내란은 막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정치 평론의 수준(?)이 높아지면, 필시 주제는 현상의 문제와 논란거리를 넘어 개헌이나 국회의원 선거제도 같은 국가적 의제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느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없애야 하느니 하는 고난도의 주제까지 거론한 집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뭐 이런 주제도 시민의 민주주의 훈련으로 보면 그리 나쁠 것이 없겠다.
문제라 치자면, 흔히 이런 논쟁에는 결론이 없다는 점이다. 때로 관계가 서먹해지고 다시 보지 말자고 할 정도로 의가 상할 때도 있는 마당에,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중간한 타협이나 봉합조차 어려우면 분명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피하라고 조언할 수밖에.
사회적 가치로 보면 다들 그렇게 강조하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크다. 국가적 정치를 논하는데, 그 정치가 나아졌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나빠지고 극단화된다는 진단이 더 많으니, 직접적인 이유이든 아니든, 아무래도 일상이라 할 수도 있는 정치 토론을 좀 고쳐야 할 듯하다.
이런 정치화에 관한 다른 복잡한 원인 분석은 놔두자. 우리는 이런 현상의 (유력한) 원인 한 가지가 '총론' 중심의 의제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대통령 중심제가 핵심이야", "국회의원 선거는 중·대선거구로 해야 해", "원전 말고 다른 방법이 있어?", "그 당은 틀렸어" 등등의 주장이 대표적인 총론이다. 이렇게 시작하면, 차분한 논의보다는 그냥 '선언'과 '소신' 또는 '통찰'이 맞부닥치기 마련이다.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 최근까지, 한국 사회가 근대 국가 또는 '괜찮은 나라'를 만드느라 분투해 온 경험은 한편으로 총론의 역사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직선제라는 총론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 아는 그대로다. 꼭 현실 정치만도 아니다. '중화학공업'이 그랬고, '새마을운동'이 그랬으며, 지금 'K-컬처'도 일종의 총론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총론 중심의 국가적 헤게모니가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모두 이미 잘 아는 것이니 접어둔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우리 일상에 깊게 침투한 유산 한 가지, 바로 일종의 총론의 '물신화' 현상이다. 대통령 중심제를 바꾸는 개헌을 논의할수록, 그게 왜 나쁜지, 어떤 고통의 원인인지, 개헌하면 보통 사람에게 무엇이 좋아지는지는 관심이 줄어든다. 개헌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되는 수준의 물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지금 있는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것만 같은 무조건의 환상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특정한 정치·경제·사회 리더나 정권 교체, 때로 정권의 '국정 기조'가 이런 총론 노릇을 하고, 결국 물신화된 경험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총론의 물신화가 뭐가 나쁘냐고? 모든 것이 나쁘기만 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만, 이 글의 맥락에서 생각할 만한 총론 일변도의 문제 한 가지는 처음의 문제의식과 의도가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니, 나중의 결과 또는 문제라기보다는 물신화가 바로 그런 것이다.
어떤 제도를 근본적으로 고치자고 하면, 처음에 무슨 이유가 있었을 터. 제도를 개혁하면 어떤 문제가 없어지고 누구의 고통이 줄어드는지, 이 문제의식은 끝까지 살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제왕적' 대통령제는 누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제도를 바꾸면 무엇이 어떻게 좋아지는지, 계속 물어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도 답이 나오지 않을까? 물신화는 이런 질문 자체를 없앤다.
대통령제와 비교하면 사소한 정책이나 제도 같지만, 의과대학 입학정원 문제나 지역사회 통합돌봄 같은 경우도 총론 중심의 논란,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물신화가 비슷한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이들 제도나 정책을 논의할 때의 문제의식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보기 어렵다.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벌써 그렇다. 지역의 의료와 돌봄이 이런 '총론'으로 다 해결된 듯이, 이제 제도 자체의 완결성이 최고, 최선의 목표이자 의미가 되었다. 본래 목표와 의미는 소외된 것이다.
여기서 총론의 상대는 '각론'이 아니라 '문제'이다. 이런 식으로 의대 입학정원을 늘리고 통합돌봄의 틀을 갖추면, 어디 사는 누구의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 현존하는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 '모델'은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강조하지만, 문제를 물어야 총론의 답을 정할 수 있다. 타협도 가능하다.
그러니, 방법은 다시 정책과 제도의 '대상'인 사람-주민-시민-인민, 국가 통치로 보면 '피치자'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논란을 벌이는 정책과 제도는 이들의 고통과 수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 아픔과 힘듦을 덜고 없애려면 무슨 정책과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그 문제들을 알고 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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