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의 '이상한 실패', 무엇을 남겼나?

[세계의 공론장] 500명 시민의 결정이 정권 교체 뒤 폐기, 되짚어야 할 '현재사'다

하나의 실험, 엇갈린 기대와 우려

2017년 여름과 가을, 한국 사회는 하나의 색다른 실험을 감행했다. 신고리 5·6호기 원전의 건설 중단 여부를 정부도 국회도 전문가도 아닌 500명의 시민에게 맡겼다. 2017년 5월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원전 건설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공론화위원회는 2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와 500명의 시민참여단 선발, 한 달여의 자료 학습, 2박 3일의 합숙 종합토론회를 거쳐 10월 20일 ‘건설 재개, 원전 축소’라는 권고안을 내놓았고 문재인 정부는 곧바로 수용했다. 국가적 갈등 현안을 시민의 숙의에 기반해 결정하고 정부가 그 결과가 나오기도 전부터 조건 없이 따르겠다고 약속한 공론화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문재인 정부는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이자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자평했다. 시민사회의 평가는 엇갈렸다. 먼저 소수 전문가와 관료가 독점해 온 에너지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이 실질적 결정 주체로 참여한 점에 주목하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광장의 촛불이 제도화된 원탁의 시민 주권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첨예하게 맞서던 사안을 정보의 공유와 학습, 토론을 통해 다수가 승복할 수 있는 결론으로 끌어냄으로써 사회갈등 해결의 새로운 경로를 열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반면 대통령 후보 당시 탈원전 공약을 이행할 정치적 부담을 숙의민주주의를 내세워 시민에게 떠안겼다는 비판적 평가도 나왔다. 선출 권력과 의회가 결정해야 할 사안을 법적 근거도 불분명한 공론화위원회에 위임하는 것은 책임정치의 후퇴라는 것이다. 의제 설정 단계에서 시민을 배제하고 정부가 물음의 틀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또한 원전 마피아와 막 발언권을 얻기 시작한 탈핵 운동 진영 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공론화 과정에서 은폐되면서 결과적으로 기존 권력관계를 추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당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가운데 많은 평가와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공론장의 실천에서는 선례로서 본격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왜 일회성 행사 혹은 일시적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촛불, 공약, 그리고 사회적 합의의 선택

1978년 고리 1호기 가동 이후 40여 년간 원자력 정책은 정부·학계·업계로 구성된 이른바 원전 마피아가 독점해 왔다. 이들은 원자력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라며 전문가주의를 내세워 시민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상황이 달라졌다. 2003년 부안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문제를 둘러싼 지방 정부와 주민 간의 충돌 사태는 정부의 일방적 정책 추진이 언제든 시민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2008년 광우병 논란이 촉발한 촛불시위는 위험을 판정할 권한이 전문가와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했다. 여기에 2011년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원자력이 결코 완전히 제어 가능하지 않은 위험 기술이며 이제 과학기술 자체가 재난의 원천이 되는 위험사회가 도래했음을 절감케 했다. 또한 기술 선진국 일본에서 일어난 파국은 한국 원전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2016년 10월 말부터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시위는 탈원전 담론을 정치 의제로 끌어올렸다. 광장 시민들은 이제 에너지 정책이라는 성역에도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치러진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홍준표를 제외한 주요 후보 대부분이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문재인 후보는 신규 원전 백지화, 노후 원전 폐쇄와 더불어 신고리 5·6호기 건설 백지화를 약속했다. 신고리 5·6호기는 완공되면 원전 10기를 둘러싼 반경 30킬로미터 이내 인구가 약 382만 명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의 원전 밀집 지역이 되는 만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는 당선 후 백지화 공약의 이행과 현실의 비용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시점에 신고리 5·6호기의 종합공정률은 약 29퍼센트에 달했다. 여기에 1조 6천억 원에 달하는 매몰 비용, 건설 노동자의 일터, 지역 경제 문제까지 얽혀 있어 건설 중단은 곧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한 달여 후인 2017년 6월 19일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행사에서 “원전 정책의 주인은 국민”이므로 핵발전소의 운영과 사고에 대해 투명하게 알리는 것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탈원전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기에 핵발전소를 장기간에 걸쳐 줄여가는 탈핵 로드맵을 수립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리고 신고리 5·6호기 건설 백지화는 사회적 합의와 절차, 즉 공론화를 거쳐 결정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공약 후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공론과 숙의의 절차를 통해 완화하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3개월간의 공론화 설계와 추진

2017년 6월 27일에 열린 국무회의는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백지화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부가 시민의 의견을 참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공론화 결론에 따를 것임을 분명히 했다. 즉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시민에게 사실상의 결정권을 위임한 것으로 국내외적으로 거의 전례가 없는 권한 부여였다.

한 달 후인 7월 24일 김지형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하고 인문사회·과학기술·조사통계·갈등관리 4개 분야 각 2인으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했다. 공론화위원회는 공론화의 규칙을 만들고 시민참여단 구성 방안을 수립하며 전 과정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운영기구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결정하는 자와 절차를 관리하는 자를 분리함으로써 공정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공론화위원회 구성의 핵심 원칙은 중립성과 대표성이었다. 이에 따라 분야별 전문 기관·단체로부터 3인씩 후보를 추천받아 1차 후보군을 구성한 후 원전에 대해 찬반 입장을 가진 기관과 단체에서 제척한 후보를 제외한 17인 중에서 최종 8인의 위원이 선정되었다. 위원은 남녀 비율의 균형을 맞췄고 미래세대를 대표하는 20~30대를 포함하도록 했다.

공론화위원회는 안으로는 분과를, 밖으로는 건설 재개와 중단 양측과의 소통과 검증 장치를 두었다. 먼저 위원회 내에는 법률분과, 조사분과, 숙의분과, 소통분과를 설치했다. 분과위원회는 공론화 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분야별 주요 의제를 설정·검토해 시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위원회는 건설 재개와 건설 중단을 주장하는 대표 단체와의 소통협의회를 운영했다. 건설 재개 측으로는 한국원자력산업회의, 한국원자력학회, 한국수력원자력이 참여했다. 건설 중단 측으로는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참여했다. 건설 재개 측과 건설 중단 측이 작성한 자료의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자료검증 전문가그룹과 공론화 과정 자체를 검증하는 공론화 검증위원회도 운영했다. 8월 24일에는 한국리서치-월드리서치-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로 구성된 한국리서치컨소시엄을 공론화 수행업체로 선정했다.

공론화위원회는 공론화 절차를 두 단계의 조사와 학습·숙의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수립하고 시행했다. 먼저 8월 말부터 공론화위원회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 국민 2만여 명을 대상으로 1차 전화조사를 실시한 후 그 응답자 가운데서 500명의 시민참여단을 뽑았다. 시민참여단은 지역·성별·연령, 나아가 1차 조사에서 나타난 찬반 의견의 비율까지 그대로 재현하도록 설계되었다. 선발된 시민참여단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와 중단 관련 쟁점을 양측이 마련한 자료집과 이러닝으로 학습한 후 최종적으로 2박 3일의 합숙 토론을 거쳐 의견을 마련했다.

공론화위원회는 공론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각종 토론회와 이러닝 자료 등 공론화 과정에서 생산된 자료들을 홈페이지와 사회관계망(SNS) 계정에 지속적으로 공개해 정보 접근성을 높였다. 시민참여단만이 아니라 관심 있는 일반 국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제언방도 운영했다. 숙의 프로그램 또한 시민참여단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기본 프로그램과 일반 국민에게 의제를 확산하는 보강 프로그램으로 이원화해 7회의 지역 순회 토론회, 5회의 TV 토론회, 1회의 미래세대 토론회를 병행했다.

9월 16일 천안에서 열린 오리엔테이션에는 시민참여단 500명 중 478명이 참석해 95.6퍼센트의 참석률을 보였다. 이후 시민참여단은 자료집과 이러닝을 통해 쟁점을 학습했고 학습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가 단계별로 이어졌다. 10월 13일부터는 2박 3일간 종합토론회가 열렸는데 선발인원 500명 중 471명이 참석했다. 종합토론회는 건설 중단 및 재개 이유에 관한 총론 토의(제1세션), 안전성과 환경성을 다룬 쟁점 토의(제2세션), 전력 수급 등 경제성을 다룬 쟁점 토의(제3세션), 최종 선택과 사회적 수용성을 논의한 종합 토의(제4세션) 순으로 진행되었다. 각 세션은 찬반 양측 전문가의 발표 청취, 분임 토의, 질의응답으로 운영되었다. 발표 청취와 분임 토의, 질의응답에 할애된 시간은 모두 675분, 즉 11시간 15분이었다.

이러한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민참여단 각자의 판단이 분명해지면서 판단 유보의 비율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한 1차 조사에서는 건설 재개 36.6퍼센트, 중단 27.6퍼센트, 판단 유보 35.8퍼센트의 의견 분포가 나타났다. 이 중 선발된 500명의 시민참여단의 최종 숙의 결과에 따르면 59.5퍼센트가 건설 재개를, 40.5퍼센트가 중단을 선택했다. 향후 원전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축소가 53.2퍼센트, 유지가 35.5퍼센트, 확대가 9.7퍼센트로 나타났다. 원전 건설을 ‘재개하되 축소한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었다.

10월 20일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참여단의 숙의 결과를 담은 세 가지 정책 권고안을 제출했다. 첫째 일시 중단 중인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할 것, 둘째 원자력발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할 것, 셋째 시민참여단이 건설 재개의 보완책으로 제안한 사항들에 대해 세부 실행계획을 조속히 마련할 것 등이 그것이다. 10월 24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는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을 수용해 건설 재개를 의결하는 동시에 탈원전 에너지 정책의 방향과 세부 실행계획 추진을 공표했다. 같은 날 국무조정실이 후속 조치를 발표하면서 3개월에 걸친 공론화가 마무리되었다. 첨예하게 맞서던 건설 재개와 건설 중단 양측 진영도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와 정부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면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성공한 공론화의 이상한 실패

숙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거둔 성과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시민에게 국가 중요 정책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이 부여된 점을 가장 큰 의의로 꼽을 수 있다. 광장에서 시작된 시민의 촛불시위가 원탁에서의 시민 주권 획득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폐쇄적인 전문가주의의 신화를 깨뜨렸다. 보수 언론과 원자력계는 비전문가인 시민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사안을 결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시민참여단은 학습과 숙의를 통해 원전과 같이 기술적·경제적·사회적으로 복잡한 정책 결정에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즉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소수 전문가와 관료가 독점하던 에너지 정책 결정 방식을 민주화하고 시민을 수동적 에너지 소비자에서 능동적 주체로 전환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나아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숙의민주주의의 현실적 가능성을 열었다. 시민참여단이 보여준 열의와 진지함, 최종 결론이 자신의 의견과 다를지라도 존중하겠다는 태도는 시민의식의 성숙을 보여주었다. 공론화 과정 전반에 대한 만족도가 4점 척도에 평균 3.24점에 이를 만큼 참가자들은 숙의 과정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며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표현했다. 또한 물리적 충돌로 치달았던 부안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사태와 비교할 때 패배한 쪽이 결과에 승복함으로써 증폭될 수 있었던 사회갈등이 절차에 대한 신뢰를 매개로 완화되었다는 점은 갈등 관리의 측면에서 중요한 성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갖고 있는 한계도 분명하다. 가장 근본적인 제약은 숙의에 할애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데 있다. 3개월의 공론화 기간 중 실제 학습과 토론에 투입된 기간은 한 달 남짓에 불과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매몰 비용의 경제적 계산을 넘어 주변 공동체의 재생산, 노동자의 고용과 정의로운 전환, 대체 에너지 산업의 전망, 나아가 수만 년을 이어질 방사성폐기물 관리 등 시간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복합적 쟁점과 맞물려 있어 단기간에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종합토론회 마지막 날 시민참여단도 분임 토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시간의 압박은 자료집과 동영상을 준비해야 했던 재개·중단 양측에도 똑같이 작동해 균형 잡힌 정보의 충분한 제공이라는 숙의의 전제를 위태롭게 했다.

대표성의 측면에서도 보완할 점이 드러났다. 시민참여단은 국민 전체의 축소판이 되도록 정교하게 구성되었지만 500명의 판단이 국민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공론화 검증위원회도 이 한계를 인정하며 조사 결과를 곧바로 결정의 근거로 삼기보다 참고자료로 쓸 것을 권고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구통계적 대표성이 곧 사회적 대표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었다. 건설 지역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주민처럼 부담의 정점에 선 당사자나 미래세대의 목소리는 비례 배분의 논리만으로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웠다. 별도로 열린 미래세대 토론회의 결과가 시민참여단에 그대로 전달되지 않은 점은 이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는 토론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미래세대의 몫은 참여 인원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의제를 정하고 자료를 만드는 단계부터 그들의 이해를 대신 헤아려 반영하는 방식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다.

애초에 물음의 틀을 누가 정했는가 하는 문제도 남는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중단할 것인가, 재개할 것인가’라는 물음의 틀 자체는 시민이 아닌 정부가 정했다. 탈원전이라는 큰 방향과 개별 원전의 건설 여부를 분리한 이 프레임 안에서 시민참여단은 주어진 양자택일에 답해야 하는 위치에 섰다.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이 여전히 정부에 있었다는 점에서 공론화의 온전한 민주성이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 공약의 이행 여부를 시민에게 되묻는 것이 과연 공론화에 적합한 의제였는가, 혹은 대의정치가 책임져야 할 결정을 떠넘긴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비판은 이 지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지난 40여 년간 형성된 원자력계의 기득권과 탈원전 운동 진영 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단기간의 공론화로 달라질 리 없었다. 겉으로는 대등해 보였던 공론장이 실제로는 양측의 힘의 격차를 가릴 수 있다는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오늘의 공론장에 주는 함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로부터 어느덧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연금개혁 공론화 등 그 후속 실험들이 이어졌으나 원형이 보여준 성취에 값하는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후속 공론화들이 정치적 부담이 큰 사안의 출구로 소비되는 사이 원형의 경험 자체는 제대로 성찰되지 못했고 뒤에서 살펴보듯이 그 핵심 권고마저 조용히 철회되었다. 신고리 공론화는 그렇게 하나의 사건으로 잊혀 갔다. 더구나 오늘의 공론장은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 알고리즘이 증폭하는 혐오와 가짜뉴스로 인해 2017년보다 한층 파편화되어 있다. 바로 그렇기에 신고리 공론화의 경험은 지나간 사례 연구가 아니라 현재적 물음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먼저 신고리 공론화는 지금 여기의 공론장이 잃어가고 있는 것, 곧 ‘듣고 배우고 생각을 바꾸는 시민’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다. 앞서 보았듯이 판단을 미루던 시민들은 학습과 토론을 거치며 자신의 견해를 마련했고 최종 결론이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존중하겠다고 답했다. 오늘의 공론장에서 이런 시민의 모습은 낯설다. 상대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섬멸의 대상이 되었고 생각을 바꾸는 일은 성찰이 아니라 변절로 취급된다. 신고리 공론화의 시민참여단은 이 진영화된 공론장에 대한 실증적 반례다.

신고리 공론화는 시민의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성찰도 제공한다. 제한적이나마 학습과 토론의 조건이 마련되자 시민은 상당한 숙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조건이 더 충실히 갖추어진다면 그 역량은 한층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공론장의 위기를 두고 시민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라고 탓하기 쉽다. 그러나 신고리 공론화의 경험은 공론화의 성공 여부가 시민이 제대로 배우고 토론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에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신고리 공론화의 경험은 숙의를 만능의 해법으로 격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일깨운다. 공론화는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장치이며 모든 의제가 공론화에 적합한 것도 아니다. 선출된 권력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결정을 공론화의 이름으로 시민에게 이전할 때 숙의는 책임정치를 외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신고리 이후의 공론화들이 번번이 정치적 난제의 우회로로 활용되어 온 현실은 이 우려가 이미 현실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어떤 의제를, 누가, 어떤 권한을 걸고 공론에 부칠 것인가 자체가 먼저 공적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즉 의제 설정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야말로 공론화의 선결 과제라 할 수 있다.

공론화와 정치권력의 관계에서 신고리가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은 결론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시민참여단이 건설 재개와 함께 내놓은 원전 축소 권고는 2017년 10월 국무회의가 확정한 에너지전환 로드맵에 담겼다. 그러나 2022년 7월 윤석열 정부에 의해 공식 폐기되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책 방향이 바뀌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이다. 문제는 500명의 시민이 한 달 넘게 배우고 토론해 세운 방향이 거두어지는 과정에 어떠한 공론의 절차도 없었다는 데 있다. 국무총리 훈령에 근거한 한시적 위원회의 권고와 국무회의 의결만으로는 다음 정부를 구속할 수는 없었다. 구속력과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일회성 공론화는 결론이 아무리 정당한 절차를 거쳤더라도 정치적 의지가 바뀌면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의제를 정하는 권력과 결론을 지키는 제도, 이 둘이 갖추어지지 않은 공론화는 시작도 끝도 정부의 재량에 맡겨진 행사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신고리의 경험은 공론장의 평등이 형식적 절차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앞서 살펴본 대로 발언 기회를 똑같이 나눈다고 40여 년간 쌓인 힘의 격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교훈은 오늘의 공론장에서 오히려 더 절실하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온라인 공론장은 역사상 가장 평등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과 조직, 알고리즘을 동원해 여론을 증폭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가 자리 잡고 있다. 조회 수와 추천 수로 측정되는 다수는 시민의 축소판이기는커녕 동원된 목소리의 확성기일 수 있다. 신고리 공론화가 참여단 구성과 검증에 공을 들여 공정성을 지키려 했듯이 오늘의 공론장에도 기울어진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성찰이 요구된다. 발언의 기회를 나누는 것은 공론의 조건이지 공론 그 자체가 아니다. 진정한 공론은 양측이 지닌 정보와 자원의 비대칭성을 교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신고리 공론화가 자료검증 전문가그룹을 두어 양측 자료의 사실관계를 대등하게 검증하려 했던 것도 그러한 시도의 하나였다. 특히 지역 주민이나 미래세대처럼 숫자로는 담기지 않는 목소리를 어떻게 공론장에 들일 것인가는 앞서 지적한 대로 참여의 규모가 아니라 논의의 출발점에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실험은 완전하지 않았고 그 의의와 한계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공론화는 사안마다 결론을 내리고 잊히는 단편적 ‘사건’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량을 배양하며 끊임없이 되짚어야 할 ‘현재사’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 참여한 시민들. ⓒ연합뉴스

참고문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검증위원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검증위원회 검증보고서』, 2017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형조사 보고서』, 2017

김민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탈핵 운동의 과제」, 『뉴래디컬리뷰』74, 2018

이광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모델’, 민주주의를 담보할 갈등 해결의 보도인가」, 『황해문화』 2018년 봄호

윤순진, 「원자력 발전 정책을 둘러싼 사회갈등 해결을 위한 쟁점과 과제-신고리5·6호기 공론화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118, 2018

이영희, 「신고리 5·6호기 원전 공론화와 민주주의」, 『동향과 전망』102, 2018

하승수, 「민주주의는 진전되고 있는가-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 평가」, 『창작과 비평』17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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