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아들과 딸에게는 반려견이 한 마리 씩 있다. 아들과 딸이 모두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 그런지 그들이 기르는 개들이 모두 훌륭하게(?)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손 줘!”는 기본이고, “하지 마!”, “기다려.” 등의 말도 잘 알아들어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엽기도 하다. 필자가 가면 귀여워하는 것을 알고 바짝 붙어서 고기 한 점 달라고 앞발로 필자의 무릎을 툭툭 치기도 한다. 마치 그놈들은 스스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 보니 필자와 작은 갈등을 겪게 된다. 아이들을 반려견을 부르고 지칭할 때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빠”나, “누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화가 나서 대뜸 욕을 한다. “이 xx야! 넌 어쩌다가 개를 낳았니?”, “내가 개 아범이라는 말이냐?” 등과 같이 험악한 말을 하면 그제야 조금 뒤로 물러서서 말을 조심한다.
손주들도 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6번이다. 그들이 기르는 개보다 서열이 낮다. 아이들은 반려견은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같이 살지 않는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가끔 해외 여행을 갈라치면 개를 맡겨놓고 각종 주의사항이 빼곡한 종이를 한 장 내밀고 간다. ‘개 목욕시키는 법, 사료와 함께 먹여야 하는 영양제나 캔에 든 고기 섞는 법, 산책시키기, 소변포(이름을 몰라 이렇게 적었다)는 어디다 깔아 놓으면 알아서 소변을 본다’는 등등의 잔소리를 적어놓고 여행을 간다. 여행가서 아버지가 그리워서 SNS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고 문자를 한다. 도대체 주객이 전도돼도 분수가 있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개들이 노견이라 백내장에 살이 쪄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무튼 언제부터인지 개는 가족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가족복지론>이라는 책에 의하면 가족이란 ‘친애의 정으로서 접근하기 쉽게 되어 있는 일정한 범위의 혈통관계의 집단으로서, 한 집에 거주하며, 의식과 기타 일상 생활을 공동으로 하고 재산을 공동으로 수용하는 집단(김용환 외, 가족복지론)’리고 정의되어 있다. 현대적인 가족의 개념으로는 ‘둘 이상의 사람들이 친숙한 한 가족이라 여기고 밀접한 감정적 유대와 가정이라는 생활공간 그리고 생물학적·사회적·심리학적 요구의 충족에 필요한 역할과 과제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하였다.
국어사전에는 ‘1.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자, 손녀 등으로 구성된 집단 2. 동일한 가족 관계 등록부 내에 있는 친족 3. 같은 조직체에 속하여 있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예전에는 동고조팔촌(同高祖八寸)이라고 하여 고조할아버지가 같으면 ‘친족’이라고 하였다.
한편 ‘식구(食口)’라는 말도 있다. 필자의 후배는 자기의 아내를 지칭할 때 꼭 ‘식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식구는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전적으로는 ‘1. 같은 집에서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 2. 한 단체나 기관에 속해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이 그들을 ‘식구’라고 표현한 것에서 ‘조직원’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음이 확실하다.
과거에는 가족이나 식구를 같은 의미로 사용해 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의미의 분화가 생겼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족이라는 의미는 친가보다는 외가 쪽 사람들을 더 가족으로 느끼고 있고,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면 식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처가 식구도 한 가정에 살면 배우자의 직계존비속을 모두 가족이라 한다.
언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게 마련이다.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반려견만도 못한 대우를 받거나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의미로 전락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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