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깃발 물결이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총리공관 앞 대로를 물들인 지난 12일 저녁, 집회에 나서던 비사르 마르티나이(25) 씨가 단호히 말했다. '플라밍고 혁명'이라 불리는 알바니아 시민들의 반정부 대중 집회가 열린 지 105일째였다.
마르티나이 씨는 지난 6월 1일부터 매일 열린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집회에서 만나 친구가 된 요니다 바치(20대) 씨도 마찬가지다. 둘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실제적인 변화를 확인하기 전까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집회가 열린지 넉 달째지만, 현장 열기는 뜨거웠다. 이날은 이탈리아, 독일, 영국, 코소보 등에서 알바니아 디아스포라 수백 명이 국경을 넘어 합류했다. 어떤 이들은 자동차 본닛에 알바니아 국기를 꽉 차게 붙이고 수백 킬로미터를 달렸다. "연기 속으로 사라질 체제", "너희의 끝이 왔다" 등의 피켓으로 가득 찬 집회 현장에서, <프레시안>은 20대 청년 마르티나이, 바치, 이리스 콜라(20) 씨를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트럼프 사위'의 호화 리조트, 멸종·마을 파괴 가속
플라밍고 혁명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트럼프 사위' 덕분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의 배우자 재러드 쿠슈너다. 미국 대규모 부동산 개발업자인 그가 알바니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휴양지 '사잔 섬' 일대에 고급 리조트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지역에서 시작된 개발 반대 운동이 거대한 반정부 운동으로 번졌다.
쿠슈너의 리조트 프로젝트가 지난 30여 년간 누적된 알바니아 내 정치사회적 문제를 모두 노출했기 때문이다. 생태 파괴, 주민 수용성 말살, 민주적 절차 무시, 불투명성, 기득권층 부패, 민간 자본 특혜 등의 문제다.
이곳 일대는 분홍 플라밍고, 바다거북 등 멸종위기종의 주요 서식지다. 철새 200여 종의 중요 기착지면서 2500여 종 생물이 서식하는 보호구역이다. 어업 등으로 마을 주민이 삶을 의지해 온 오랜 공유지기도 하다. 주민들은 해당 국유지가 투자자에 매각된 사실을 기사 보도로 처음 알았고, 리조트 개발이 추진된 사실조차 그제야 알았다. 2024년 쿠슈너가 개발 구상을 밝힌 뒤 즉각 관련 법이 개정돼 '5성급 이상' 등 고급 숙박시설의 보호 지역 내 건설이 허가된 사실도 이후 드러났다.
분노한 주민과 환경운동단체가 저항운동에 나섰고, 지난 5월 30일 '트리거'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개발 업체의 민간 경비원들이 시위대의 목을 조르고, 질질 끌어 내동댕이치는 등 폭력을 행사했는데, 경찰은 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르티나이 씨도 "그날 나도 중심가를 지나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합류했다"며 "그 사건은 올리가르히(부유층·기득권층)들이 경찰조차 자신을 제지하지 못하도록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정부는 올리가르히만을 보호한다는 것을 전국에 보여줬다"고 말했다.
국토 헐값 임대와 30년 정치 부패…"깃발 색만 바꾼 기득권층"
이미 지난 2월부터 알바니아 북부 '박스-르욜' 지역 주민과 '5성급 리조트' 개발업자 간 분쟁이 시작돼 왔다. 플라밍고 혁명의 '첫 번째 전선'이라 불리는 현장이다. 이들 또한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토지가 매각되거나 개발사업이 추진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토지를 업체가 강탈해 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토지 소유권 증서를 가슴에 품고 공사장을 점거하는 등 불복종 행동을 이어갔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콜라 씨는 두 사건 모두 표면적인 현상일 뿐, 문제는 30년 넘게 쌓여 왔다고 강조했다. 먼저 비민주적 정치 체제와 기득권 부패다. 그는 "우리가 민주공화국이라고요? 페이퍼상이죠"라며 "과거 독재 공산주의 시절 기득권의 후계자들과 그들 친구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라고 일갈했다. "에디 라마(현 총리)와 친구가 아니라면,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알바니아는 1940년대부터 1991년경까지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철권통치 등 서슬 퍼런 독재 권위주의 정부의 오랜 치하에 있었다. 국경도 폐쇄돼, 국경을 넘는 시도조차 반역죄나 총살로 다스려졌다. 1991년 민주화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부정선거 의혹이 지속되는 등 그 잔재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게 청년 세대의 생각이다.
그 예가 인적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알바니아는 사실상 양당체제다. 집권당인 사회당은 옛 노동당의 후신이고, 야당은 민주당이다. 사회당 대표는 에디 라마 현 총리이고, 민주당 대표는 살리 베리샤 전 총리다. 살리 베리샤는 2005~2013년 총리를 역임했고, 에디 라마는 그 이후부터 13년 간 총리직을 유지한다. 무려 '4선 재임'이다.
콜라 씨는 "이 나라에 야당은 없다. 우린 '베리샤도 감옥으로, 에디 라마를 감옥으로'를 같이 외친다"며 "깃발(당기) 색깔만 바꿨지, 같은 얼굴을 한 이들이다. 베리샤도 전 노동당의 일원이고 독재자들의 주치의였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분노하는 '전략적 투자' 정책은 베리샤가 만들었고, 에디 라마가 이행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삶과 국토를 올리가르히에게 파는 건 매한가지"라고 강조했다.
알바니아가 10여 년 전부터 시작한 '전략적 투자' 정책은 일반 시민에겐 "소수 부유층·기득권에 알바니아 재산을 갖다 바치는 행위"로 비친다. 정부는 민간 투자금 유치를 위해 리조트 건설 등 개발 사업의 대가로 광활한 국유지를 '1유로'에 임대하는 정책을 폈다. 10년 간 세금 면제, 중앙은행 자금 지원 및 정부 담보 제공, 수도·전력망 인프라 건설 등은 덤이다. 지난 10년 사이에만 최소 1130만 제곱미터의 해안·산림 공공 토지가 팔렸다. 공공 해변이 사라지고, 호텔이 관리하는 유료 해변이 늘었다. 정부는 투자금 수익을 99년간 보장해 준다.
"Albania is not for sale(알바니아는 팔 수 없다)"는 구호가 등장한 이유다. 마르티나이 씨는 "언론이 잘 보도하진 않지만, 특히 이스라엘 투자자의 비중이 높다는 게 시민들의 또 다른 분노 지점이다. 쿠슈너도 유대계 미국인"이라며 "이 좁은 땅을 왜 유독 이스라엘 투자자들이 장악하게 만드느냐? 제2의 팔레스타인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에디 라마 총리는 쿠슈너의 투자 계획에 대해 "이것은 국가를 위한 축복"이라며 "GDP가 270억 유로를 조금 넘는 국가에 40억 유로를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말해 왔다. 이에 '자본이 유입되면 알바니아가 발전하지 않느냐'고 묻자, 마르티나이 씨가 말했다.
셋은 "기득권 뒤엔 망가진 알바니아의 삶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콜라 씨는 "이곳 평균 임금은 한 달 600유로인데, (수도 티라나) 집세는 400유로 미만을 찾을 수 없다"며 "단지 살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들은 더 살 수 없다"며 "그나마 덜 비싼 기숙사는 끔찍하다. 물이 안 나오거나, 전기가 안 들어오고, 지붕에서 물이 샌다"고 덧붙였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전략적 투자를 통해 "돈을 뽑아가는" 부유층, 기득권층, 엘리트층을 계속 향하고 있다. 최근엔 해외 유명 건축가들도 '도덕적 해이'로 비난 대상에 올랐다. 바치 씨는 이들이 쓴 책 <알바니아 파일(the Albanian files)>을 말하며 "알바니아 전체 땅이 건설 프로젝트로 가득 차 있다는 내용의 책인데, 전부 외국 건축가들이 맡는다"며 "국내 건축가라면 누군가 이런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보호구역인데? 이건 불공평한데? 이건 쿠슈너에게 팔 수 없는데?'"라고 말했다.
이방카의 '사치스러운' 실언도 조롱 대상이 됐다. 길이만 60미터가 넘는 '메가요트'를 타고 알바니아 바다를 항해하던 중 자신이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사잔) 섬을 우연히 발견했고, 섬으로 수영해 가 맨발로 정상까지 등산했다"며 리조트 구상을 밝힌 인터뷰다. 알바니아 시민들은 SNS에서 이를 공유하며 '우리의 오랜 섬인데 무슨 발견이냐', '오랜 군사기지인 험준한 화강암 섬에 지뢰가 제거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맨발로 올랐느냐'고 비판했다.
"부모 세대가 남긴 미완의 민주주의, 우리가 끝내야"
집회 현장은 한국 촛불집회 현장과 흡사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 손을 잡고 나온 연인들 등 남녀노소가 뒤섞였다. 전략적 투자자를 위한 법 개정안 폐지 서명운동 부스가 곳곳에 설치됐고, 집회 가장자리엔 아이들을 위한 그림 그리기 공간도 마련됐다. 학생 연합 단체는 대형 현수막을 펼치고 행진했다. 단상도 설치돼, 자유 발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조경학을 공부하는 유학생인 콜라 씨는 알바니아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집회에 참여했다. 티라나에 인파가 처음 집결한 5월 31일 광경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발만 동동 굴리며 지켜보다, 6월 1일 귀국해 4일간 내리 집회에 참여했다. 시험이 있어 이탈리아에 돌아갔다 1주일 후 다시 귀국했고, 지금도 이탈리아를 오가며 집회에 나간다.
마르티나이는 씨는 한 달 전 해고됐다. IT업계 종사자인 그는 집회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회사 인사팀에 불려 가 비난을 들었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고됐다. 그는 "한 달째 비상금으로 지내고 있다. 이런 불이익을 얻은 시민이 한둘이 아니다"라 말하며 웃었다.
플라밍고 혁명 시위대의 요구는 5개다. △총리 및 내각 전체 사임 △1년 임기 과도 정부 수립 △총리 최대 임기(8년) 단축, 선거법 개정, 정당·정치단체 자금 조달 개정 등을 골자로 한 개헌 △보호구역 법률·문화유산법 개정안 폐지 △시민과 국가 간 새로운 사회계약 수립 등이다.
콜라 씨는 "시위를 주도하는 중앙 기구는 없다. 우리는 하나의 전체 군중으로 요구한다"며 "우리는 5대 요구안을 두고 협상하지 않는다. 협상하면 조종당할 뿐이란 걸 과거에서 배웠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정부의 전략은 '관망하며 버티기'다. 그러나 세 청년은 두렵지 않다. 바치 씨는 "과거엔 (집권층이) 직장, 학교, 부모 직장 등을 가지고 모든 협박을 동원했을지라도, 우리 세대는 조금 다르다"며 "국가 통제를 벗어난 민영 기업에 일하는 이들도 많아졌고, 나도 이탈리아 업체 소속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마르티나이씨는 "1990년대 노동당의 집권이 끝나고 대규모 민주화 바람이 불었을 때 우리의 부모 세대가 저항했지만, 그들은 이를 미완성으로 남겨뒀다"며 "이들이 시작했던 일을 우리가 마무리하는 게 우리의 의무 같다. 시위대의 상당수가 청년층"이라고 말했다.
콜라 씨는 "우리는 국민의 힘이 권력을 잡은 자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시위는 5개 요구 사항 이행이 모두 완료되면 끝날 것이다. 그 전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