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비극이 묻는 기후정의와 기후시민의회

[복지국가SOCIETY] 기후재난의 시대, 기후시민의회가 만드는 정의로운 전환

최근 히말라야의 영봉을 품은 네팔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참담하다. 기습적인 폭우와 급격한 융설로 발생한 대규모 산사태와 홍수는 마을 전체를 삼키며 수많은 이재민과 인명 피해를 낳고 있다. 히말라야 빙하의 감소와 이상기후는 이제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니라, 네팔 민중의 생존을 실시간으로 위협하는 잔혹한 현실이 되었다.

네팔의 비극이 묻는 기후정의

그러나 네팔의 비극을 단순한 '자연재해'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는 명백한 '인재'이자, '기후 불평등'의 결과다. 네팔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 세계 배출량의 0.05%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지구온난화를 주도하며 성장과 번영을 누려온 선진국들의 책임은 절대적이다.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은 가난한 국가가 재난의 가장 가혹한 피해를 짊어지고, 막대한 원인을 제공한 선진국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본질적으로 국가 간, 계층 간의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사회적 정의'의 문제다. 그럼에도 기후재난이 정치·사회적 시급 과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피해가 주로 정치·경제적 목소리가 작은 지구 남반구(Global South)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둘째,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와 일상화된 재난 담론이 기후위기를 개인의 운명이나 일회성 구호 대상으로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재난 뒤에 숨은 구조적 불평등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적 침묵'이 작동하고 있다.

유럽 기후시민의회의 성과와 한계

기후문제의 구조적 불평등과 대의제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혁신적 대안이 바로 '기후시민의회(Climate Citizens' Assembly)'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합의를 기득권 정치인이나 자본의 손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성찰에서 출발한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재다.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10여 개 나라는 무작위 추첨(추첨민주주의)을 통해 성별, 연령, 지역, 사회경제적 배경을 반영한 시민 대표들을 모았다. 이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숙의와 토론을 거쳐 탄소 배출 감축, 에너지 전환, 소비 구조 변화 등 과감하고 혁신적인 정책 권고안을 도출해 냈다. 기후위기 상황에서 시민들이 정책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어 미래를 결정하는 '숙의적 공론장과 제도화'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 가장 큰 성과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시민의회가 도출한 혁신적 권고안들이 행정부와 의회의 법제화 과정에서 축소되거나 무산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시민의회의 과감한 환경 제안들이 정부 검토 단계에서 대폭 수정되거나 거부권을 당하며 '시민의회의 권한 부재'라는 한계를 노출했다. 시민의회가 단순한 자문기구나 정치적 포장지에 그치지 않으려면, 합의안에 법적·정치적 구속력을 부여하거나 의회가 이를 반드시 안건으로 다루도록 강제하는 제도화가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기후시민회의의 현재와 도전

유럽의 시도에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기후시민회의'가 가동 중이다. 정치권의 반발로 '의회' 대신 '회의'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 형식과 내용의 지향점은 유럽과 궤를 같이한다. 오히려 법정 상설기구로 제도화했다는 점에서는 유럽보다 진일보한 측면도 존재한다.

기존 유럽의 기후시민의회가 한시적으로 운영되거나 지자체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한국은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제19조의2) 개정을 통해 국가 차원의 상설 법정 기구로 명시하며 지속가능한 거버넌스의 틀을 마련했다. 또한 정부나 전문가가 미리 정해놓은 안건에 찬반 표결만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민참여단 내 '기획참여단'이 대국민 제안을 바탕으로 의제를 직접 발굴·선정하는 상향식 구조를 취하고 있다.

구성 측면에서도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통계에 기반한 무작위 추출(RDD) 방식으로 200명의 시민참여단을 선발하되, 청소년(만 10세~17세)과 장애인,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취약계층 비중을 의무 반영하여 포용적 대의성을 확보했다. 아울러 참여단 절반의 임기를 교차시키는 '롤링(Rolling) 임기제'를 도입해 숙의의 노하우가 지속적으로 계승되도록 설계한 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 역시 높다. 기본법상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 행정부와 국회가 권고안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법적 구속력은 없다. 프랑스의 사례처럼, 핵심 권고안이 축소·폐기될 위험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복잡한 기술적·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기후 정책을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전 학습과 숙의 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나, 조급한 행정 문화 속에서 이를 담보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무엇보다 기후시민회의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사회적 홍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국민적 관심과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공들여 만든 대안이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

풀뿌리 기후시민의회로 여는 국민주권시대

기후위기와 같은 복잡한 사회적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국민이 직접 참여하고 합의하는 의지와 정책 틀이 요구된다. 국민은 스스로 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정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현대 대의제에 맞춰 변형한 무작위 추첨 방식의 시민의회는, 성별·연령·지역을 아우르는 보통 시민들이 모여 숙의를 통해 상식적인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제도적 대안이다.

저출생, 부동산, 지역소멸, 돌봄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난제에 대해 그간 기득권 엘리트와 전문가들의 고담준론과 막대한 예산 투입이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엘리트의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보통 시민들의 건강하고 상식적인 집단지성이다.

유럽보다 제도적으로 진일보한 모습으로 첫발을 뗀 한국의 기후시민회의를 안착시키는 일에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 기후위기가 이미 일상화된 재난으로 다가온 만큼, 이제는 중앙정부 단위를 넘어 전국 227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이러한 공론장을 확장해야 한다.

내년에는 전체 기초지자체의 5~10% 수준에서라도 '지역 기후시민의회'를 가동해볼 것을 제안한다. 기초 단위에서 진행되는 시민의회는 큰 예산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이 직접 지역의 기후 현안을 고민하는 훌륭한 민주시민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시민의 상식과 집단지성을 모아내는 이 과정이야말로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가장 가성비 높은 정책이자 진정한 국민주권의 길이다.

▲시민의회전국포럼 회원들이 지난 4~5일 워크숍을 통해 시민의회의 활성화, 제도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시민의회전국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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