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만 보면, 지금 한국 정치는 '뜨겁고 시끄럽다'. 집권당 지도부 경선 소식이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여당을 지지하든 안 하든 많은 시민의 관심이 친명과 친청 중 어느 쪽이 당권을 쥘지에 쏠려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편 당의 현 대표가 언제 물러날 것인지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치가 "죽었다"고 말한다면, "제 정신이냐"는 반문만 들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에 정말로 '정치'가 있는가?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교과서에는 시민사회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논란과 이해 충돌, 갈등을 시의적절하게 부각시키고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 나와 있다. 가령 흉폭한 살인범죄를 수사해야 할 국가기관의 일부가 불의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짓을 벌였을 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고, 반도체 대기업에 갑자기 쌓인 부를 산업 전체, 사회 전체에 유익하도록 분배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정치가 맡아야 할 몫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 바로 이런 의미의 '정치'가 과연 작동하고 있는가? 검찰의 보완수사권을 둘러싼 논란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진 것은 범죄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특정 정파의 외침이었다. 반면 반도체산업 수익 분배 문제를 놓고 그나마 목소리를 낸 것은 두 거대 정당이 아니라 언론이나 노동조합, 시민사회 단체들이었다.
정당 내 권력 투쟁은 치열하게 벌어지지만, 막상 정치가 작동해야 할 곳에서는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 대의제도에 두 발을 내딛고 이익과 특권, 명예를 누리는 이들이 뉴스의 주인공이 되지만, 정작 민심은 '대의'되지 못한다. 그나마 정책을 갖고 뭐라도 하는 기관은 청와대 정도이며, 실제 한국 정치는 '정당'이 아닌 '정파'들(두 거대 정당 내부의)의 당권 투쟁으로 채워진다.
이게 지금 한국 정치다. 정치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제도 위에서 움직이는 기관들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왕성히 움직이지만, 실제로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2026년 여름 한국은 '정치'가 실종된 사회다.
친위쿠데타는 실패했지만, 그 목표는 관철되고 있다
사실 '정치가 사라진 세상'은 윤석열이 일으킨 친위쿠데타의 핵심 목표였다. 윤석열이 어쩌다 이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는지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겠지만, 내란의 목표가 이것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비상계엄 포고령 1호의 첫 항이 이를 노골적으로 밝히기 때문이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국회, 지방의회 같은 대의기관이 움직이지 않으면 대의민주주의는 중단된다. 정당이 활동을 못하면 헌법상의 다른 기관이 있어봐야 민주 정치는 끝난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시민들에게 남는 유일한 '정치'의 통로는 집회나 시위인데 이마저 금지한다고 한다. 이것이 비상계엄 포고령 1호 1항이 만들려 한 세상이다. 윤석열은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영구히 종식시키려 했다.
하지만 친위쿠데타는 어쨌든 진압되지 않았는가? 윤석열은 수감돼 있고, '내란범'임을 분명히 한 1심 판결을 받지 않았는가? 비상계엄 포고령 1호는 역사 속의 사문서가 되어 버렸고, 우리는 지금 제6공화국 헌법이 온전히 작동하는 일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당연한 반문이다.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면, 이런 반문이 정말 겉보기처럼 '당연'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이렇게 되묻고 싶어진다. "친위쿠데타는 진압됐고 윤석열은 감옥에 있지만, 친위쿠데타의 핵심 목표는 윤석열의 뜻대로 관철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응원봉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의 결의 덕분에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이 사라지고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치' 자체는 실종되고 있다. 마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듯이, 옥중의 윤석열이 감옥 밖의 한국 정치를 조종하는 격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어리석은 윤석열이 '공명'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떤 마법을 부리기에, 친위쿠데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 포고령 1호가 의연히 관철되고 있는가? 여기에서 의외의 사실은 전혀 없다.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 제도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윤석열의 내란 시도로 인해 양대 정당 중 한 쪽이 정상적 정당 기능을 상실했다. 윤석열은 2024년 12월 3일부터 몇 달 동안 정치적 기동전과 농성전을 펼치며 국민의힘을 극우 이념-운동의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진영의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뉘어 다양성과 역동성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윤석열의 지휘 아래 국민의힘 전체가 회복력과 유연성을 상실했다. 윤석열은 양당 독점 정치의 한 쪽 절반에서 '정치'가 작동을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 전체가 사라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기성 정치권의 다른 쪽 절반이 내란을 진압하며 당당히 살아남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한 쪽'만이 살아남았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정당 간판으로만 따지면 이 공간에는 더불어민주당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정당들(조국혁신당, 진보당 등등)이 있다. 그러나 굳이 '파생정당'이나 '위성정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이 정당들이 진정한 다당 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2024년 4월의 정치적 상황에서 오로지 반윤석열 투쟁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된 비슷한 색깔의 정당, 정파들일 따름이다. 말하자면 사실상의 '일당' 구도다.
물론 원치 않은 일당 구도다. 하지만 어쨌거나 윤석열의 선택으로 이런 구도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내 과반수 정당이자 동시에 집권당이 됐고, 국민의힘은 국회에서 대화를 해봤자 말이 통하지 않을 만큼 극우화했으며, 한때의 우당(友黨)들은 우당들일 뿐이다.
그러면 남게 되는 것은 오직 같은 당 내 정파들 간의 경쟁, 대립이다. 정당들이 채워야 할 무대를 더불어민주당 내 정파들(그리고 사실상 민주당 내 정파 역할을 하는 일부 우당)이 채운다. 당 내 정파들 간의 이런 대립은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정당 간의 투쟁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은 '정치'가 계속 이어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시민들은 선거에서 '정당'을 선택하지 '정파'를 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의활동의 거리라는 측면에서 당 내 정파는 당 자체에 비해 유권자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만큼 유권자들을 바라보며 행동할 이유가 줄어든다. 일당 구도를 지배하는 정당 내부의 정파 간 경쟁이 대의민주주의의 '정치'에 미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다.
이게 지금 여당 대표 경선이 진행 중인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양대 정당이 반분하던 정당 정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국회, 지방의회"는 거의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고, "정당의 활동"이란 곧 집권당이자 사실상 원내 유일당인 정당의 내부 활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3대 메가 프로젝트' 같은 정책 의제를 던지는 주체는 청와대-행정부 뿐이며,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는 이런 의제에 끌려다니기만 한다. 시민사회 내의 진정한 이견을 대변할 정당들이 제도정치 안에 부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상계엄 포고령 1호 1항이 '뒷문으로' 다시 입장한 꼴이다. '정치'를 폐지하려 한 내란은 진압됐으나, 그 목표 자체는 '평화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윤석열의 저주다. 현재 한국 정치는 이 저주 속에서 헤매고 있다.
우리가 지켜낸 '제6공화국 체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물론 윤석열은 '제갈공명'이 아니다. 잡다한 유사종교 세력과 얽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도 아니다. 그렇다면 옥중에서조차 친위쿠데타의 목표를 의연히 관철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비로울 게 전혀 없다. 그 힘은 우리가 내란 세력에 맞서 지켜냈다고 믿는 바로 그 민주 정체, 즉 제6공화국 체제에서 나온다.
제6공화국 체제란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를 기반으로 '양당 독점 정치'가 유지되는 정치 체제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도메니코 로수르도가 '연성 보나파르트주의'라고 규정한 정치 질서의 전형이다(<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 장석준 옮김, 산현글방, 2026). 이 질서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는 늘 양대 엘리트 집단 중 한 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최소화된다.
윤석열의 부상과 집권, 난동은 이 체제를 순수하게 대변한다. 윤석열은 박근혜 탄핵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비해 대선 승리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 국민의힘에 의해 2022년 대선 주자로 선택받았다. 어떻게든 양당 독점 정치를 지속시키는 것이 국민의힘이 그에게 맡긴 임무였고, 그는 이를 해냈다. 하지만 5년간의 국정 운영을 통해 국민의힘을 재건할 역량까지는 없었다. 윤석열 스스로 이를 자각했을 때 그가 선택한 카드는 제6공화국 체제를 '자폭'시키는 것이었다. '정치'는 없고 '통치'만 있는 세계(박정희, 전두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자폭'은 실패했다. 그러나 윤석열의 불발된 공격은 '자폭'보다는 덜 극적이지만 결과는 크게 다를 것 없는 과정, 제6공화국의 '자멸'이 시작되게 만들었다. 양당 독점 정치의 한 쪽 축이 기능 부전 상태가 되자 다른 한 쪽 축이 체제 전체를 지탱하는 처지가 됐고, 그러자 그간 제6공화국 체제에서 자라온 온갖 모순과 긴장, 불만과 대립이 정권 내부(청와대와 여당)의 알력, 여당 내부(친명과 친청)의 항쟁으로 우회하여 나타나기 시작됐다. '정치'가 닫힌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홀로 '통치'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제 이 체제를 향한 모든 불만과 불신, 반감은 이 유일정당으로 향할 운명이다. 이게 다음 전국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제 + 소선거구제 + 양당 정치' 조합에서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은 늘 극적인 심판 선거로 이어지곤 했다. 윤석열이 국민의힘과 그 주변에 뿌려놓은 극우의 씨앗이 차기 정권이라는 울창한 숲으로 급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평화적 방식을 통한 제6공화국 '자멸'의 완성이고, '정치'의 붕괴의 최종 승인이다.
이런 역사적 국면에서, 지난 40여 년간 해오던 대로 기존 게임 규칙에 따라 차기 총선이나 대선을 준비하는 관성(가령 '○○○ 대권 도전론' 따위)이야말로 '예정된 파국'의 길이나 닦아주는 짓이다. 헌법개정과 선거제도 개혁의 압박이 됐든, 새로운 정당운동이 됐든, 역사의 '정해진 경로'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면 무엇이든 감행해야 한다.
연성 보나파르트주의 체제의 관성('지도자 숭배') 탓에 '현직 대통령 연임 허용 개헌'론이 불거져 개헌 논의조차 발목이 잡히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경로 이탈의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절박한 도전이 없다면, 옥중의 윤석열은 끝내 자신이 열어놓은 역사 과정의 승리를 목격하고 말 것이다. 다수 시민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의 종식이 최종 승인되는 광경을 보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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