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야구부의 부적절한 응원 행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어느 운동장 한구석에서 벌어진 일 하나로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역사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짚어볼 문제가 있다.
뉴스를 흘려듣던 중에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하나 나타났다.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상징성이 큰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배재고 야구팀의 징계를 비판하며 "5.18은 이 땅에 성역이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쏟아지는 비판에 이병태는 "표현의 자유"를 들먹였다고 한다. 성역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한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내놓는 식의 절제 없는 자유는 한낱 방종일 뿐이라는 비판이 당연히 쏟아졌는데, 내게는 "성역 없는" 세상을 꿈꾸는 그의 머릿속이 더 흥미롭다.
인간의 이성이 종교의 구속을 벗어남으로써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열었다고 하는 계몽주의 사상은 한 시대를 휩쓸고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많이 남아있다. 성역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병태도 계몽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계몽주의의 역할이 지나간 시대다.
계몽주의 사상에서 자유와 평등의 주체로 존중받던 "인간"은 자격조건이 꽤 까다로운 존재였다. 일단 "문명"을 가져야 했다. 근대유럽에서 인식되던 형태의 문명을 말한 것이다. 나름의 문명을 가진 사회들도 이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서 야만인-미개인으로 학대와 차별을 받았다. 메이지시대 일본인은 이 차별을 피면하기 위해 "탈아(脫亞)"를 주장했다.
2차대전 이후 인류 구성원 대부분이 자기 국가를 가지게 되면서 인간관의 표준도 바뀌기 시작했다. 기술 발전과 교통 증가도 변화에 큰 몫을 했다. 50년 전에는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을 우리가 찾아가서 보는 일도 많아졌고 우리 곁에 와서 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티브이 등 미디어를 통해 눈에 익숙해진 범위도 늘어났다.
이 변화에 따라 "똘레랑스"의 의미가 달라졌다. 계몽주의의 간판 구호 똘레랑스는 견뎌낸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싫어도 참아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뜻이다. 나와 다른 것은 불편하기 마련인데, 불편한 것도 참아주는 노력을 하면서 이 세상의 다양성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근대의 전개 과정에서 계몽주의의 공헌이다.
2백 년 전 사람들에 비해 지금 사람들은 엄청난 폭의 다양성에 익숙해져 있다. 억지로 참아줘야 할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새로운 현상 앞에서 계몽주의 정신을 불러올 필요가 이따금 있기는 하지만, 일상 속에서는 잊고 살아도 될 정도다. 오히려 불필요한 일에 뜬금없이 불러오는 사람들의 속셈이 궁금할 때가 있다.
이병태의 발언 중 "성역"이란 말에서 계몽주의를 떠올렸다. 초기 계몽주의의 주적(主敵)은 종교였다. 18세기 유럽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종교로부터 "이성"의 해방을 제창한 계몽주의는 모든 독단의 공격에 "성역"의 비유를 썼다. "독단(dogma)"도 종교의 비유였다.
인간의 이성이 지나치게 억눌려있던 18세기 유럽에서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성역의 파괴가 절실한 과제였다. 당시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중국의 비-종교적 분위기를 선망하는 "중국풍(Chinoiserie)"이 계몽주의 풍조 속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이성만으로 살 수 있는가? 이성에 너무나 굶주린 시대를 넘기고 나면 다른 수요가 제기된다. 이성 외의 정신세계를 "신앙"이란 말로 대표해 본다. 꼭 종교적 신앙이 아니라도 사람에게는 각자 합리적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믿음의 체계가 있다. 밥과 반찬이 어울려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는 것처럼 이성과 신앙이 어울려 풍성한 정신세계를 이룬다.
신앙 절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성 절대주의 경향의 계몽주의 시대가 지난 후로는 이성과 신앙의 동거(condominium) 방법이 모색되어 왔다. 노력의 초점은 신앙의 배타성을 억제-조절하는 데 있었다. 신앙은 배타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기 쉬운데, 신앙의 본질을 보호하는 한도 내에서 배타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기독교계에서 일어난 에큐메니즘(ecumenism)이 대표적인 예다. 교파 간에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갈등을 최소화하는 운동이다. 개신교계에서 시작했으나 20세기 후반에는 기독교계 전체로 확산되고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도 시도되기 시작했다. 종교 아닌 다른 사상체계 사이의 관계에도 비유적으로 쓰이는 말이 되었다.
에큐메니즘 참여자들에게는 각자의 성역이 있다. 이웃의 성역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에큐메니즘의 제1 규범이다. 그런데 운동이 확산하면서 똘레랑스 정신의 발전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억지로 "참아주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익숙해지는 데 따라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저절로 자라난 것이다.
5.18의 광주를 성역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 그런 마음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반감을 보이는 사람 중에 두 종류 태도가 보인다. 하나는 성역을 너무 절대화하는 분위기에 대한 반발이고, 또 하나는 사회의 대립과 혼란을 무조건 부추기는 책동이다.
이병태를 직접 자극한 것이 배재고 선수들의 가혹한 징계였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가혹한 편인 것 같고, 그보다도 너무 신속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고려할 것을 충분히 고려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언론의 질타에 아무 책임감 없이 부화뇌동한 느낌이 든다.
무책임한 부화뇌동은 성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위태롭게 만드는 짓이다. 중립적인 사람들에게까지 반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광주일고 측에서 징계 재검토를 청원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성역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은 내 성역을 나처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폭력을 쓰기보다 이해를 늘려주기 위해 애쓴다.
고대사회에서 신앙의 중심지가 피박해자의 피난처 역할을 하는 일이 많았다고 보는 인류학자들이 있다. "성역(sanctuary)"은 신성함과 안전의 두 가지 성격을 함께 가진 장소였다는 것이다. 삼한시대의 소도(蘇塗)도 그런 의미를 가진 곳으로 이해된다. 사회의 중심축이던 신앙이 현상 유지에 매몰되기보다 사상의 다양성을 보호함으로써 장래의 변화에 대비하는 역할도 맡은 것이 인간사회의 일반적 경향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성역의 이중적 성격이 기독교에도 널리 나타난 것을 <노트르담의 곱추>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종교재판의 시대에 이 전통이 위축된 것은 유럽사회의 중심축으로서 기독교의 역할이 퇴화한 결과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성역 파괴"는 중세 말기의 위축되고 경화된 성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대로, 편협해진 교회와 싸우는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 편협한 태도를 보였다. 대다수 계몽주의자가 일체의 신앙과 성역을 무조건 배척하는 이성 절대주의에 빠졌다. 다양성이 넘쳐나는 현대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계몽주의에서 다른 것은 배우더라도 그 편협성은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병태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그가 이번에 "성역"을 들먹인 이유를 적확히 알 수 없으나 이어지는 보도를 보면 지나치게 가혹한 (성역을 절대화하는) 징계에 대한 반발만은 아닌 것 같다. 계몽주의 시대의 성역 파괴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탕평책에 관한 생각이 이어진다. 우익을 표방해 온 이병태의 기용에는 진영 화합의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화합이 많이 필요하다. 군사독재 아래 만연했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불필요한 갈등이 너무 많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주의 화합 정책이 환영받는 것은 특히 정치 분야에 독재시대의 진영 논리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병태가 그 목적에 적합한 인물이었을까? 화합의 비유에 비빔밥이 많이 쓰이는데, 아무거나 마구 섞어서 맛좋은 비빔밥이 되지 않는다. 성격이 서로 맞는 재료들을 잘 골라야 한다. 화합물 아닌 혼합물은 위험식품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공개된 <정조어찰집>이 생각난다. 정조의 최대 반대자로 알려진 노론 벽파 영수 심환지에게 정조가 보낸 곡진한 편지들을 보면 탕평책의 깊은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좋은 정치를 펼치려 한 하나의 교향악이다.
구양수는 <붕당론>에서 도리를 함께하는 군자의 맺음을 붕(朋)으로, 이익을 함께하는 소인의 모임을 당(黨)으로 규정했다. 탕평의 뜻을 추구하는 인사에서는 능력의 검증보다 군자의 자세를 검증할 필요가 더 앞설 것이다. 모든 행동의 도덕성이 완벽한 도덕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시에는 시류에 맞추어 살다가도 때를 만나면 소인의 작은 생각을 넘어설 수 있는 그런 군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 중에도 바라는 성공의 내용은 다양하다.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기 바라는 사람도 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주기 바라는 사람도 있고,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한 민족사회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소망보다 꼭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도 꼭 앞서야 할 것이 사회의 화합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제가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충분히 확인되었다. 그 과제의 성공을 위한 길을 잘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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