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민주화 성취한 국민지성의 제도화, 가능할까

[복지국가SOCIETY] 국민주권정부가 되려면

이재명 정부의 국정지지율이 처음으로 40%대를 기록하며,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서는 데드크로스를 기록했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는 "선거관리 부실 사태로 촉발된 책임론 확산과 여당 내 당권 갈등이 정국 전반의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며 국정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분석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앞에 촛불혁명의 힘으로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문재인 정부는 제대로 된 개혁과 사회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다시 3년 동안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한밤중 내란사태까지 겪은 끝에 빛의 혁명으로 이재명 정부를 만들었다. 집권 1년을 넘기고 있는 시점에서 기대와 희망보다는 우려와 불안이 앞서는 최근 흐름이다. 국민 입장에서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 기득권들의 힘은 강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정치권력을 겨우 바꾸었을 뿐이지, 사법·언론·교육·관료 등의 기득권 권력은 한번도 제대로 개혁되지 않았다. 이번 선관위 사태를 통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쉽게,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검찰, 사법, 언론 등 다른 분야도 실상을 파헤치면 점입가관일 것이다.

몇 번의 시민혁명을 통해서 제대로 된 개혁과 혁신을 해보라고 국민들은 정치권력을 위임해 주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가 사반세기 이상 세계 최고의 자살률 국가, 인류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1.0 이하의 출생율 국가다. 자살률과 출생율 통계는 현재와 미래의 희망을 찾기 힘들다는 국민들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고, 이 상태로 가면 2100년 대한민국의 인구는 현재에 절반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재명 정부에 새로운 희망을 걸었던 것은, 험난했던 청소년기를 경험하고 극복한 대통령의 모습,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 정부 출범을 앞두고는 '국민주권정부'로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보였기 때문이다. 희망과 기대는 아직 있지만, 과연 국민주권정부를 통해 국민주권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1조에 국민주권을 명시하고 있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지난 내란과 탄핵 과정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국민들은 대의된 권력의 선의에만 기댈 수밖에 없다.

"영국 국민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자마자 국민은 다시 노예가 된다."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1762)에 쓴 이 문장은 300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언어다. 이재명 정부가 스스로 '국민주권정부'라 명명한 것은 이런 이름 뿐인 국민주권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실질적인 국민주권시대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에서도 국민에게 실질적인 주권을 부여하면서 국민과 함께 사회적 난제를 풀어가겠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이해는 간다. 지난 1년, 윤석열 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고 내란세력을 정리해가는 비정상의 정상화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사회혁신의 시간이다. 시간이 많지도 않다. 내년 총선까지 대략 2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사회대전환의 의지와 성과, 희망의 근거를 보여주지 못하면 문재인 정부 시즌2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민주권이 가져오는 위대한 변화들

국민주권시대를 위해서는 말 뿐인 '헌법 제1조'를 실질화해야 한다. 실질화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국민발의권과 국민투표권 등만 제대로 작동하도록 해도 큰 사회혁신과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스위스는 유권자 5만 명이 발의하면 법률 제·개정을, 10만 명이 발의하면 헌법까지 수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고 있고, 이웃 대만은 유권자 1.5%가 발의하면 사회적 중대 현안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 덕분에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부강한 국가로 자리잡은 지 오래 됐다. 2018년 현재의 국민투표법을 개정한 대만은 세계 민주주의 10위권 안팎을 기록하며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대'로 등장했다. 국민투표법 개정 전만 하더라도 30위권 초중반의 불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에 불과 했다.

국민에게 입법권과 국민투표 발의권을 주는 것은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항이다. 지난 지방선거와 동시개헌 과정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보수야당이 이미 합의했던 사항까지도 헌법 개정으로 제도화하자고 하면 부정과 무시로 돌아서는 현실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때문에 정치권 합의에만 기댄다면 할 수 있는 개혁은 별로 없다. 이미 정치세력 자체가 기득권화되어 버렸고, 양당 독과점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는 민주당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정부'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확산하고 싶다면, 국민을 믿고 국민에게 실질적인 주권을 부여하면서 사회혁신의 길을 가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주권을 위한 유력한 방안 중의 하나는 '시민의회'를 도입하는 일이다. 정치권이 권력의 이해관계 때문에 제대로 된 혁신을 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중대 현안은 시민의회를 통해 실마리를 풀자는 것이다. 개헌도, 정치개혁도, 선거법 개정도 현재의 정치권에 맡겨두어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으로 보인다.

다행히 정부가 기후시민의회를 도입했다는 소식이다. 선출직 국회·지방의원의 문제 제기를 고려해서 '기후시민회의'라 이름 붙이고, 25억 원의 예산을 책정하고, 200명의 시민의원을 사회계층별로 무작위 추출하고, 워크숍을 하면서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미 기후 문제는 정치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인식하고, 유럽에서도 이미 10여 국가에서 기후시민의회를 가동했고, 국민과 함께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고 있다. 프랑스는 100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전 국가적으로 1만 회의 지역별·영역별 토론회를 하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실천을 만들어가려 했는데, 우리 사회는 너무 소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첫 발이 중요한만큼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시민의회를 통해 국민주권 제도화로 나가야

총체적 무능과 부실에 빠진 정치권의 혁신을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국민주권·시민주권을 도입하고 시민의회를 통한 문제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정치개혁, 교육개혁, 기후위기, 지역소멸, 돌봄 등 한국 사회가 신속하게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혁신해나가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세비를 받는 정치인과 정치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의 행태를 볼 때 큰 기대는 하기 힘들어 보인다. 대신 권력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의회를 통해 새로운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고 정치권을 긴장시킬 수 있는 메기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축소판, 소우주로 구성될 시민의회는 무엇보다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해결해야 할 특정한 현안 과제에 대해 1~2년의 임기로 진행될 시민의회에 세대·성별·지역·정치성향 등이 다른 이들이 모여 숙의를 통해 지혜로운 대안을 찾고 만들고자 할 테니 말이다. 제대로 된 정보 없이 정치꾼들의 선전선동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 제공과 숙의 토론을 한다면 오늘날 갈등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 남과 여, 청년과 노년 세대들이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 수 있으리라 본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심각한 갈등에 직면한 것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공론장을 제도화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대한민국 국민의 집단지성의 힘은 확인됐다. 구한말부터 위기는 항상 소수 기득권층이 불러왔지만, 다수 국민의 집단지성으로 독립운동·산업화·민주화 등을 성공적으로 성취하면서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진입한 거의 유일한 국가가 됐다. 최근 빛의 혁명과 이를 통한 내란극복은 다시 국민지성의 위대함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제도화의 단계로는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지방선거를 계기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시민의회전국포럼 등 뜻 있는 사회단체들이 주민주권, 시민주권을 만들어갈 지역과 후보를 물색했고 작지만 의미있는 성과들도 만들어가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민형배 초대 시장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시민주권정부를 만들고 시민의회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며, 3선의 광명시장이 된 박승원 당선자는 전국 최초로 시민의회 조례를 제정하겠다고 지역사회와 정책협약을 했다. 지역모델을 만들기 위해 관악기후시민의회도 추진했고, 대전에서 돌봄시민의회도 모색한다. 오는 7월 22일, 지역시민의회의 경과와 성과, 앞으로의 과제를 논의하는 국회토론회를 개최한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기원한다. 내란을 극복하고 국민들과 함께 만든 정부이기에 이재명 정부의 실패는 국민들의 실패와 좌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경험했기에 불안과 두려움이 적지 않다. 지난 지방선거를 통해 그런 불안감이 일부 표출됐다. 최근 국정지지율 하락이 또 다른 증거라 볼 수 있다. 시간도 많지 않다. 앞으로 2년 내에 희망의 근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격이 본격화될 것이다. 국민주권정부라는 명칭처럼, 국민을 믿고 국민과 함께 짐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지 못하면, 빛의 혁명이 만든 천재일우의 기회는 날아갈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 1주년인 지난해 12월 3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빛의 혁명 1주년 대국민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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