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6월 3일 실시될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다.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후보부터 각급 지방의원 후보, 교육감 후보까지,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후보까지 정말 수십 명의 후보들이 매일 동네를 훑고 지나간다. 그러나 유권자들 가운데 시의원이나 구의원 후보 이름을 하나라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지역정치'는 지역 유지들에게나 중요한 행사이고, 정작 많은 풀뿌리 시민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남의 잔치'다.
이렇게만 보면, 영락없는 '탈정치' 시대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의 절반일 뿐이다. 몇몇 광역단체장 선거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치학자들에게 손쉬운 연구주제가 되어온 '진영정치'니 '팬덤정치'니 하는 모습이 그대로, 아니 더욱 증폭된 채로 나타난다.
평택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대표적 사례다. 각 후보 지지자들 사이의 격앙된 대립은 이제 진영과 진영 사이를 넘어 같은 진영 내부에서까지 치열하게 벌어진다. '탈정치'이기는커녕 정치의 '과잉'을 이야기해야 할 지경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편에는, 민주정을 시민에게 더욱 밀착시키기 위해 설계된 지방자치제도가 실제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를 넓히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국회 내 각 정파의 최상부에서 펼쳐지는 난해한 권력 싸움에 수많은 시민들이 직접 참전해 시간과 정열을 쏟아붓는 정반대 현실이 있다. 정치는 지극히 '결핍'되어 있기도 하고, 너무나 '과잉'된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모순은 최근 삼성전자 노사의 성과급 협상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마치 대한민국 모든 시민이 삼성전자 종업원이거나 주주이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식탁이나 술자리에서 '삼성전자'를 입에 올렸다. 누구는 회사를 편들고 누구는 노동조합을 변호하는가 하면, 하청업체라는 가려진 주역을 부각시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들 중 어느 쪽도 국회 내 특정 정파의 당론과 연결되지 않았다. 어느 정당도 이 진지한 논쟁의 한 쪽을 대변하지 않았다. 원내정당들이 매일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는데, 그 싸움이란 게 정작 한국 사회의 가장 절박한 논쟁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만 이런 게 아니다. 나라마다 양상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 대다수 민주정에서 유사한 모순이 눈에 띈다. 어느 나라든 과거보다 정당 간 대립이 더 심해지고 거리에서 정치 성향이 서로 다른 시민들 간에 충돌까지 벌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정치의 과격화를 통해 먹고사는 문제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하루하루의 삶은 10년 전,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하이퍼 정치', '과잉 정치'라는 진단
2023년에 독일어판이 처음 나오고 올해 2월에 영어판이 나온(우리말로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안톤 예거(Anton Jäger)의 <하이퍼 정치: 정치적 결실 없는 극단적 정치화(Hyperpolitics: Extreme Politicization Without Political Consequences)>(Verso, 2026)는 바로 이런 모순된 현실을 진단하는 저작이다.
저자 예거는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로, 아르투르 보리엘로와 함께 2010년대의 새로운 정치 흐름을 분석한 공저 <포풀리즘 국면: 대공황 이후의 삶(The Populist Moment: The Left After the Great Recession)>(Verso, 2023. 국내 미출간)을 발표한 바 있다.
<하이퍼 정치> 또한 최근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는 정치의 급격한 변화를 포착하고 분석하려는 이런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한데 영어판 표지를 보면, 좀 당황스럽다. 황홀경에 빠진 것 같은 한 여성의 얼굴을 두 손(아마도 남성?)이 감싸고 있는 야릇한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독일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의 연작 '사랑'의 일부라는 이 사진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막 시작되고 현실사회주의권이 흔들리던 1980년대에 유럽의 나이트클럽들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이 표지 사진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모순을 규명하는 작업과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이 사진이 실린 이유는 아마도 책 제목이기도 한, 21세기 정치에 대한 예거의 진단명 '하이퍼 정치(hyperpolitics)' 때문일 것이다. 영어 접두어 hyper는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지만, 한국어 대응어를 찾기 까다로운 말이기도 하다. 줄기를 이루는 뜻은 '지나치다', '과도하다'이고, 한자성어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의 '과(過)'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하이퍼 정치'란 '과잉 정치'다. 부제에 담긴 '극단적 정치화(extreme politicization)'라는 문구를 통해 저자의 신조어 '하이퍼 정치'가 정치의 '과잉'을 뜻하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hyper의 이런 뜻 때문에 영어에서 이 접두어는 hype라는, 어원이 같은 또 다른 단어를 쉽게 연상시킨다. 사전을 찾아보면 hype는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일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달변과 과장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물건을 팔아먹는 '과대 광고'나 '사기'를 뜻하기도 하고, 마약, 특히 각성제를 복용해 도달한 절정의 흥분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하이퍼 정치>의 표지 사진은 예거가 '하이퍼 정치'라 규정한 21세기 정치를 통해 증오든 열광이든 감정이 고조된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고, 그런 감정의 고양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어떠한 실질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기막힌 사태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이퍼 정치'에서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정치화되어 있다. 수백년에 이르는 노예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역사를 이참에 뒤집겠다며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에 대거 결집하기도 하고, 남북전쟁 이후 백인국가 미국이 자신을 배반해온 과정을 되돌리겠다는 일념으로 트럼프 선거운동에 뛰어들기도 한다. '친문'의 음모에 맞서려고 분연히 나서는가 하면, '뉴이재명'의 또 다른 음모를 폭로하기 위해 안절부절한다. 하루종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뒤적이다 참다못해 거리로 뛰쳐나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열띤 참여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리 삶을 규정하는 제도가 그만큼 크게 바뀐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방향이 무엇이든, 좌든 우든, 기존 정책이 경로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소식을 거의 접할 수 없다. 정보화 시대라는데, 정작 100여 년 전에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몇 개월만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치달았다거나 이탈리아에서 창당한 지 1년밖에 안 된 정당(파시스트당)이 바람을 일으켜 집권당이 됐다는 이야기는 지금은 '신화'일 뿐이다. 심지어는 1930년대 미국 뉴딜 정도의 개혁조차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바이든 정부는 이런 체념이 지극히 현실적임을 증명해주었다.
결사체 문화라는 토대가 사라진 21세기 '민주주의'
예거는 '하이퍼 정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하이퍼 정치'가 등장하기 전까지 자본주의-민주주의의 각 시대마다 나타났던 정치 유형을 훑는다. 출발점은, 1인 1표 원칙의 보통-평등선거 실현이 쟁점이 됐던 19세기-20세기 전환기부터 20세기 중반 복지국가 전성기에 이르는 시기의 '대중 정치(mass politics)'다. 이 시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전쟁과 대공황, 고전 파시즘의 대두 같은 대위기도 있었지만, 지금과 달리 정치 참여가 체제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그래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등장했고, 식민지들이 해방됐으며, 복지국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기에는 대중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되, 그 형태가 지금과 크게 달랐다. '하이퍼 정치'에서는,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든 거리나 광장에서든, 시민이 한 명의 개인으로 참여한다. 반면에 '대중 정치'에서는 다수 대중이 자기 계급과 연관된 결사체에 가입했고, 대개 이 결사체를 통해 정치에 참여했다. 좌나 우나 다르지 않았다. 좌파는 주로 노동조합을 통해, 우파는 주로 교회나 중간계급 사교모임을 통해 참여했고, 좌파가 처음 발전시킨 조직 형태인 대중정당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의 보편적 정치 참여 통로로 진화했다.
이 시기는 196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렀다 급격히 쇠퇴했다. '대중 정치'의 성채를 공략하기 위해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공세 때문이었다. '정치' 전반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를 둘러싼 책임 공방이 오가면서 정치를 통해 경제적 결과를 결정하거나 교정한다는 사고 자체가 공격받았고, 대중이 선거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든 국가가 건드릴 수 없는 경제적 성역이 있다는 철칙이 자리잡았다.
정치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결실의 폭이 지극히 협소해짐에 따라 시민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사실상 정치가 사라진 시대, '포스트 정치(postpolitics)'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 시기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포스트 정치'의 단단한 지형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일상이 무너지고 생활수준이 후퇴하는데도 기존 시스템이 뾰족한 처방을 내놓지 못하자, 상당수 대중이 다시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8년 이후에 전개된 새로운 정치 참여는 역설적인 형태를 띠었다. 신자유주의 시기의 '포스트 정치'를 '정치'라 호명하며 그런 정치를 통째로 거부하는 '반정치(antipolitics)' 입장을 표방했던 것이다. 예거는 이때 승승장구하던 좌우 포퓰리즘 흐름을 이렇게 '반정치'라 규정한다. 아직도 그 여진이 감지되는 대중 정치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치'의 전성기는 불과 10여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예거의 진단에 따르면, '반정치'는 곧바로 '하이퍼 정치'에 자리를 내주었다. 혹은 '반정치'는 쉽게 '하이퍼 정치'로 전화했다. 그 이유는 대중의 참여가 활발히 전개됐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대중 정치'와 '반정치'의 정치 참여 형태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듯 '대중 정치’에서는 시민들이 결사체를 통해 정치에 참여한 반면 '반정치'에서 '하이퍼 정치'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시민들이 개인으로서 참여한다.
무엇보다도 '포스트 정치' 시기를 거치며 시민사회 안에서 결사체 전통과 문화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세력이 약해졌고, 대중정당은 엘리트정당, 미디어정당으로 변질됐다. 이것은 곧 좌파의 구조적 약화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좌파 쪽에서만 결사체의 토대가 약해진 것은 아니다. 우파 쪽에서도 교회나 자본가 클럽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감퇴했다. 물론 '반정치' 시기에 우파에서는 타운미팅 전통에 바탕을 둔 티파티 운동 같은 사례가 있었고, 좌파에서는 당 내 엘리트에 맞서 대중정당을 되찾으려는 버니 샌더스나 제러미 코빈 등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결사체의 전반적 쇠퇴라는 장기 추세를 단기간에 뒤집지는 못했다.
이 실패와 함께 '하이퍼 정치' 시대가 열렸다. 결사체의 일상 활동이라는 요소가 희박한 이 시대에는 시민들을 공동의 장기적 목표에 따라 응집시키기도 힘들고, 결사체들 간의 갈등과 협상, 타협을 통해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힘들며, 시장 제도에 바탕을 둔 경쟁의 가치와 그 파생 현상인 고립화 흐름에 맞서 연대의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도 힘들다. 이런 시대에 과연 민주주의가 생명력 있게 지속될 수 있을까?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한국 사회의 '장기 2010년대'에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광장이 있었고, 윤석열 친위쿠데타 진압 응원봉 광장이 있었다(한국판 '반정치'). 그러나 이런 시민 개인들의 간헐적인 열광적 참여는 일상에서 강고하게 지속된 한국 사회의 반-결사체 문화(반-노동조합, 반-정당)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광장'이 닫히자마자, 매번 '진영 정치', '팬덤 정치'의 울타리에 갇힌다('하이퍼 정치'의 승리). 결실 없는 정치적 열정의 낭비라는 운명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21세기에 결사체 쇠퇴 경향의 역전은 과연 가능할까?
<하이퍼 정치>의 진단은, 사회적 커뮤니티의 쇠퇴가 미국 민주주의를 밑에서부터 허물고 있다는 로버트 퍼트넘의 유명한 주장(<나 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 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2016)을 좌파 입장에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예거는 책의 한 챕터를 퍼트넘의 주장을 검토하는 데 할애한다. 또한 예거의 접근법은, 노동계급의 일상에서 결사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명철하게 파악했던 길드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21세기 맥락에서 부활시키려는 시도라 볼 수도 있다.
예거는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어쩌면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대안을 타진한다. 되든 안되든 결사체 문화라는 요소를 되살리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하이퍼 정치'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좌파 정치'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런 '시대착오적 시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거는 모든 나라에서 예외없이 나타나는 돌봄 결핍 문제나 지대 추구 경제 탓에 발생하는 주거 문제 같은 영역에서 대중적 결사체의 르네상스를 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렵더라도 생산과 유통의 영역에서도 결사체를 재건하려는 '미련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려운 요청이다. 거의 불가능해 뵈는 요청이라고까지 하겠다. 오랜 반-결사체 풍토 속에서 노동조합이든 좌파정당이든 성장의 벽에 부딪혀 있는 한국 사회의 시각에서 보면,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좌파-사회운동이 성공의 기대나 보장 없이 도전해온 과제가 '하이퍼 정치' 시대에 온 인류의 과제가 된 것인가, 라는 감상마저 든다. 능력주의 문제도 그렇고 노동계급의 분열과 해체 문제도 그렇지만, 역시 21세기 세계는 대한민국이라는 궁극의 궁지를 닮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머지않아 범용인공지능(AGI), 초인공지능(ASI)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런 시대에 인간이 호모사피엔스 등장 이후 잠시도 쉬지 않았던 친교와 유대와 협동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어떻게 불가능한 과제일 수 있을까. '하이퍼 정치'는 분명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다. 지금이 정말 '발명의 시대'라면, '하이퍼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 형태 역시 발명될 수 있고 또한 발명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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