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 중인 내란 재판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고 변명하는 모습과는 달리,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의대정원 2000명 일괄 증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단호하고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드러났다.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여 증원 규모를 확정하기 위해 의료현안협의체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 제도화된 협의∙의결 기구를 사실상 무력화했다.
이렇게 시작된 의료대란으로 더욱 심화된 지역∙필수∙공공의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재명 정부는 지역의사제, 비대면진료, 공공의료 사관학교 신설, 국립대병원 부처 이관을 의료개혁 과제로 추진 중이다. 이들 과제를 포함하여 의료체계의 공공성과 지속가능성 확보를 논의할 '국민참여 의료혁신위원회'(이하 위원회)도 이달 안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지필공'의 핵심인 의사인력 확보 외에도 의료전달체계 개선, 초고령 사회의 의료∙돌봄 연계, 건강보험제도와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 등 난제를 풀어야 한다. 우리는 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실효를 발휘하기 위하여 짚어야 할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국민참여 의료혁신위원회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크기에 부합하는 조직적 위상과 장기 비전을 갖추고 있는가.
위원회는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국민참여형 의료개혁 공론화위원회'의 연장선으로 애초 9월 출범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10월에 총리 직속으로 소관이 변경되고 11월에 의료혁신위원회 설치∙운영에 관한 대통령 훈령이 제정되면서 이달 중으로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그 몇 달 동안 위원회의 소관이 총리 직속으로 변경되고, 훈령 시행일 직전인 11월 13일에 대통령이 밝힌 구조개혁 6대 핵심분야(규제·금융·공공·연금·교육·노동)에서 의료 부문이 빠졌다는 사실은 이 위원회에 맡겨진 일이 대통령 의제로 내세울 만큼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대한민국 행정부에서 국무총리가 갖는 현실적인 지위와 역할을 떠올려보면 위원회의 정치적 동력 약화에 대한 의심은 합리적이기도 하다. 현직 국무총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차기 당 대표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인지가 계속 뉴스거리이고, 내란 재판을 받고 있는 전직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불법계엄 명령을 따르는 임무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가담했다. 우리는 전직 국무총리들이 잘해봐야 집권자의 정치적 실패를 대신 사과하고 물러나는 것 외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 정치로 대통령의 빛을 가려서는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장 12월 2일 국회를 통과한 지역의사제나 비대면진료 관련 법안들은 시민사회나 의료계로부터 각각 의료공백 해소의 실효성이 낮고, 약물 오남용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남은 입법과제인 공공의료 사관학교 신설이나 국립대병원 부처 이관은 의료계 당사자들의 반발이 더욱 큰 상황이다.
위원회는 이런 사회적 갈등 사안에 대하여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의료혁신 시민패널(이하 시민패널)을 구성하여 숙의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처를 넘어서' '국민의 여론을 듣는다'는 공론화 접근방식은 꽤 익숙한 포맷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열렸던 국회 주도 연금개혁공론화(2024)만 해도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둔 시점에 촉박하게 열리면서 공론화의 결과가 제도적으로 연계되지도 못하고, 국회나 행정부가 서로 책임을 지지 않는 한편의 '이벤트'로 종료된 바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의료혁신 시민패널 운영 계획에서는 앞선 공론화 모델들과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 정부는 조정하기 어려운 의료개혁 의제를 공론화 절차에 상정함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면피할 요량이 아니라면, 위원회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다음 사항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하나는 시민 숙의의 결과를 정책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구체적 절차를 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 숙의 현안들을 아우르는 보건의료개혁의 장기 목표와 원칙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둘째, 국민참여 의료혁신위원회 내의 전문가 정치와 시민 숙의를 어떻게 균형있게 운영할 것인가.
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정부위원으로 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여하고(제3조), 분야별 전문위원회를 두거나 관계 전문가 자문단을 운영할 수 있으며(제8조), 시민패널도 구성할 수 있다(제10조). 참여자 구성으로만 보면 전문성의 정치(politics of expertise)와 시민 숙의(citizen deliberation) 모두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윤석열 정부의 의대증원 사태는 국정 최고책임자의 정치적 오판일 뿐만 아니라, 불합리하고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견제하지 못한 관료주의와 전문가주의의 실패이기도 했다. 공적 의사결정과정에서의 그와 같은 전횡과 오작동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평가와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대통령의 결정에 힘을 실었던 고위관료나 전문가집단의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를 우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문성의 정치가 사회적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전문가의 독립성과 투명성, 책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번에 도입하는 시민패널은 그동안 보건의료 영역을 지배해왔던, 기술적 전문가들에게만 국한하는 '기술적 공론화'를 넘어 이해당사자와 일반 시민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사회적 공론화'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논평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시민들의 참여와 통제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다.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학습하고 토론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판단과 선호∙관점을 변화시켜 가는 숙의 민주주의적 공론화는 '강한 민주주의' (B.Barber)의 든든한 토대가 된다(이영희, <전문가주의를 넘어서>).
이론적 분류상 시민패널은 대의제 정치를 쇄신하려는 민주적 혁신의 유형 중 숙의적 미니 공중(mini-public)의 사례에 해당한다. 숙의적 미니공중에 대한 쟁점 중 하나는 시민적 통제의 정치적 효과를 어느 정도 부여할 것인가이다. 숙의적 미니공중이 대중의 정치참여의 질을 높인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선출된 권력도 아니며 전체 인구에서의 다양성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정당성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참고문헌 바로가기). 이것이 시민들이 애써 얻은 공론화의 결과를 행정부나 의회가 거부하거나 방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적 의사결정에 부합하는 자격 논란은 전문가 위원이나 시민패널 모두에게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시민패널을 통한 의료혁신 공론화가 배제되는 사람 없이, 민주주의 회복에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의 광범위한 학습의 장이 되는 시민숙의의 장이 되기 위하여 공론화의 제도화와 관련된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에 대한 정교한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국민참여 의료혁신위원회가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건강 및 의료이용을 위한 것이라면, 시민들을 보건의료개혁의 대상으로만 배치하거나 정부의 공식 책임을 이관하는 조직이 아니라, 많은 시민이 민주적 결정과 참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기회로 운영되길 바란다.
의료혁신은 기존의 의료체제가 더 이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제도 개선을 넘어 그 결과는 체제전환과 연결되어 있다. 그 혁신의 과정과 결과는 공공성이 담보된 새로운 규범과 질서, 권력관계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부나 전문가가 정해둔 좁은 합의를 넘어, 스스로의 관점에서 필요한 문제를 설정하고 국가권력과 전문가권력을 견제하며 보다 급진적인 민주정치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이영희(2021), <전문가주의를 넘어>. 한울아카데미
김주형, 이시영(2023). 한국의 공론화 사례 분석과 개선 방향. 현대정치연구 제16권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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