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과 내란 사태로부터 1년이 지났다. 지난 4월 윤석열 파면이 선고된 이후 현재 강력한 사회적 요구는 바로 '내란 청산'이다.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이재명 대통령은 친위 쿠데타 가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통해 '정의로운 통합'을 이루고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했고, 민주당 또한 내란 청산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국민주권정부'를 내걸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새 정부의 국정기조 역시 비상계엄과 내란을 멈춰 세운 시민들의 '내란 청산' 요구를 수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부 여당의 내란 청산은 민주주의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과정이 되고 있는가.
어떤 '내란 청산'이어야 하는가
비상계엄은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리인의 독단적·폭력적인 선포로 시민들의 권력을 탈취해 민주주의를 무효화하려는 직접적인 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란 청산은 '힘에 의한 지배'를 자행한 정치권력자와 가담자를 단죄함으로써 정치권력과 시민권력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또한 12.3 비상계엄과 4.4 윤석열 파면, 6.3 조기 대선을 거치며 급부상한 극우대중운동은 민주주의 위기가 정치적․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방치하고 진영화된 적대 정치를 용인해 온 시간 위에서 다가왔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했다. 그렇기에 이념이나 사상의 차이로 다른 집단에 대한 배제를 선동하지 않는 정치, 시민들이 삶에서 공통적으로 직면한 불평등과 불안의 문제를 사회 집단 간 갈등으로 회피하거나 경쟁으로 격화시키지 않으면서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로 나아가는 것이 내란 청산의 과제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세력 간의 동상이몽도, 시민들 사이의 인식 격차도 줄여나가면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두텁게 만들겠다는 정치적 약속인 것이다.
내란을 모의·기획·실행·가담·은폐한 정치권력자들의 행위를 규명하고 처벌하는 것, 내란을 종식시킨 시민들의 민주적 힘을 활성화하면서 내란이 가능했던 위기 구조를 넓고 깊게 진단·성찰하며 개혁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은 병행되어야 할 절실한 과제다.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정의로운 통합'은 바로 이러한 민주적 실천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단호함과 강경함은 전자만이 아니라 통합적인 '내란 청산'의 목표, 즉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지도 위를 걷기 위해 필요한 원칙이자 태도다. 하지만 현재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속도전과 강경 일변도의 내란 청산은 이 모든 것을 비껴가고 있다.
우리는 다르다? 민주당식 정치가 민주주의인가
민주당은 내란 청산을 가장 많이 말하고 있지만 "예외적 사태를 일상적 질서의 틀에서 단죄하는 것 자체가 12·3 내란이 현행 질서에 반하는 반국가적·반사회적 중죄라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경향신문>, 9월 3일자)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민주적 수단과 절차를 통해 국가권력을 모범적으로 행사하고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내란 청산을 위한 검찰·언론·사법 개혁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증진시킬 수 있으며 어떤 공공적 가치가 있는지, 시민들의 삶에 어떤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설득하고 시민들의 동의를 획득하는 과정은 쉽게 생략된다. 이러한 행보를 정당화하는 것은 '우리는 다르다'는 멘탈리티, 토론과 숙의보다 "선출된 권력"의 결단이 우선이라는 민주당만의 '국가 정상화'다.
정부가 추진 중인 '헌법존중 정부혁신 TF'와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내란전담재판부'가 대표적이다. 공직사회 내에서 내란에 참여·협조하거나 가담한 주요 책임자를 인사조치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내란 행위 제보센터'를 설치하고 내부 제보를 하게 하겠다거나 본인 동의 하에 휴대폰 등 디지털 장비를 확인하겠다는 TF의 조사 방식은 의문을 갖게 한다. 이는 공직자 줄세우기 혹은 완장․색출 정치라는 비판을 넘어설 만큼 '민주적 수단'인가? "꼭 필요한 범위에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라는 자의적인 기준을 견제할 수단이 있는가? 이미 문재인 정권에 대한 윤석열의 대대적 감사를 '정치 사냥'이자 '위헌 감사'로, 공무원들에 대한 핸드폰 조사 방식을 영장주의 형해화로 비판했던 민주당이다.
민주당 주도로 법사위를 통과한 '내란전담재판부' 또한 시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전형적인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사법부가 내란 청산을 가로막는다는 공분이 일자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선에 사전 개입했다는 '4인 회동설' 의혹을 근거 없이 제기해 비판받고, 실체 확인은 수사기관의 판단으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그토록 강조했던 사법부 개혁의 의미를 스스로 격하시킨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본회의 상정만 남은 상태에서 민주당 정책 의원총회를 열어 내란전담재판부를 다시 논의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쟁점이 많은 데다가 내부 우려 또한 적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적 불신을 자초해 온 사법부에 '독립성 침해'로 맞설 명분, 국민의힘의 온갖 위헌 공세에 힘을 실어줄 만큼 결단과 신속함이 필요한 일이었나.
집권 여당의 '내로남불' 정치라고 손쉽게 진단하기엔 깊은 우려를 거두기 어렵다. 민주적 수단과 절차에 대한 책임과 헌신을 대체하는 것이 '위헌이 아니다, 합법적이다, 절차상 하자가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선출권력의 법적 정당성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윤석열 정권 하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더 나은 민주주의, 더 좋은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를 '민주당식 민주주의'로 환원하고, 민주주의를 다시금 권한의 문제로 축소하고 있다.
우리는 예외다? 민주당이 민주주의 위기의 심판자인가
지난 3일 이재명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과 현재의 내란 청산을 구분하며 내란 청산은 "이미 끝난 일을 헤집는 파묘"가 아니라, 진행 중인 내란을 진압하는 과정이라 말한 바 있다. 적폐 청산과 내란 청산은 국정농단이냐 내란 사태냐의 차이는 있지만, 양자 모두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향했기에 광범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국정농단·내란이라는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가능했는가'라는 공통의 질문을 끊임없이 소환했다. 이 질문에 대한 사회적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내란 청산의 핵심 축이다.
그런데 내란 청산을 최대한 빠르게 추진하고 매듭짓겠다는 정부 여당의 방향에 대해 일부 언론은 실용주의적 선택으로 보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 5년 내내 추진된 적폐 청산에 대해 '사회적 피로감'이 컸고, 현 정부의 속도전은 이를 상쇄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미완'으로 평가받는 것은 지난한 과정의 피로감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목표에서 부유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사법적 수사 및 인적 청산에 집중하면서 되려 검찰의 힘을 키웠고, 권력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스스로 무력화했다. 또한 정부 스스로 국정농단의 핵심이자 국정과제이기도 했던 '반부패 개혁'에 대한 전망을 희석시켰다. 정치개혁, 노동권과 성평등 민주주의 등 박근혜를 끌어내린 시민들의 요구를 적폐 청산 과제와 분리된 것으로, 그래서 민주주의 회복과는 무관한 요구로 격하시켰다. 정책 방향에 대한 비판을 적폐 청산이라는 대의를 해치거나 공동체 내부 갈등을 획책하는 '또 다른 적폐'로 간주하며 정당한 시민들의 요구를 공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정권'의 집권․재창출을 위해서라면 일부 민주주의 규범이나 제도를 훼손해도 된다거나 시민들의 기본권을 잠시 미뤄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민주당의 '자기 정치'가 확산되었다.
2022년 민주당이 20대 대선과 제8회 지방선거를 연달아 패한 이후, 비대위 체제에서 출범시킨 쇄신기구 '새로고침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는 한국사회 민주주의 위기와 더불어민주당 위기의 전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보수 VS 진보' 구도는 붕괴되어 있었고, 다층화된 유권자 집단은 민주당이 지지집단을 아무리 결집시켜도 40%의 득표율을 넘기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보수․권위주의 정치와 가치 경쟁을 통해 민주 정치의 정당성을 입증할 과제, 정치개혁에 대한 과격주의를 주장하는 강성 지지층에 끌려다니거나 이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층을 설득하고 새로운 진보적 의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혁신할 과제, 기후위기 등에 적극 대응하며 새로운 성장-복지의 균형을 이루어낼 과제,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집단에게 민주 정치의 사회경제적 전망을 제시할 과제 등도 함께 제시되었던 바다.
게다가 많은 이는 민주당이 한국사회 민주화에 기여했지만 실제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것은 '국민 전체'라고 생각했고, 향후 다른 혁신 없이는 민주당이 더 이상 '민주화 세력'이라는 상징체계를 독점하기 불가능할 것이라 진단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민주당은 '독재 VS 반독재'와 마찬가지로 '보수 VS 반보수' 구도 속에서 민주주의 상징을 독점한 채 탄압받는 피해자의 지위를 고수했다. 비상계엄과 내란 이후에는 이를 '극우 VS 반극우' 구도로 갱신하며, 다수 의석을 차지했던 야당 시절과 집권 여당이 된 지금까지 민주당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민주주의 위기'를 함께 만들어온 책임에서 스스로를 사면하고 있다.
민주당이 윤석열 파면과 '빛의 혁명'을 민주주의 승리라 상찬하며 민주주의 주체에 시민들의 자리를 삭제한 채 '내란 청산'의 심판자를 자처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87년 체제 이후 '민주주의 공고화'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노동의 권리,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불러온 신자유주의적 불평등과 불안, 이명박근혜 정권이 가속화한 경제의 탈정치화, 문재인 정권이 왜곡한 성평등 민주주의는 바로 한국사회 민주주의 역사적 경로이자 위기의 토대다. 어디까지나 시장질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일정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엘리트 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키면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외면하는 대의 정치권력에 의해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어온 과정이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다.
민주당은 이러한 경로에서 유리된 세력이 아니라, 권위주의 보수 정권을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개혁하지 못한 시간의 한 가운데 있었던 정치권력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민주주의 위기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러한 자기폐쇄적 인식이 다원주의, 평등, 인권과 같은 민주주의의 보편적 전제를 경멸하고 공격하는 극우의 부상과 세력화의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이가 수없이 지적했듯 현재의 위기는 민주주의 체제를 공격하는 일탈적 권위주의·극우 정권의 동력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내란 청산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적 경쟁·능력주의를 국가와 사회 전체의 원리로 확장해 온 민주주의 체제 내부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내란책임자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 재발 방지 대안을 향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주의 위기가 주조되어온 역사적 과정 위에 자리매김해야 한다. 퇴진 광장에서 4개월 동안 목 놓아 외쳤던 윤석열 퇴진․내란 청산․사회대개혁은 바로 내란을 가능하게 했던 민주주의 위기를 넘어서자는 적극적·통합적 요구였으며, 내란 청산이 내란책임자와 가담자의 처벌에 국한될 수 없는 이유다.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힘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는 정치라면 바로 권력을 위임한 시민들에 대한 설득과 정치 공동체의 동의를 획득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개혁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민주적인 경쟁이 가능한 정치구조․문화를 만들고 불필요한 적대적 진영 논리를 최소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시민성을 한시적 광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속적으로 추동하고 활성화하고 안정화할 민주주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극우화의 토대를 약화시키려면, 내란 청산은 광장에서 분출된 시민들의 존엄과 평등, 연대와 돌봄, 인간다운 삶에 대한 다층적인 요구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우회할 수 없다. 내란 책임자를 처벌하고 난 이후에야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할 수 있다거나 검찰·언론·사법 카르텔을 깨부수고 난 후에야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단계론적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한 민주주의 위기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파면과 내란 청산, 사회대개혁 과제는 '어떻게 내란이 가능했는가',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환기시켰다. 더불어 기나긴 적폐 청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적폐가 사라지기는커녕, 어떻게 보수 정치의 귀환과 극우 세력화라는 심화된 위기가 당도할 수 있었는지 또한 환가시킨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역사적 과정을 돌아보며 위기의 구조를 더듬어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해석이 경합․통합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내란을 저지시켰던 것만큼이나 시민들의 집단적인 힘이 필수적이다. 내란이 가능했던 정치·제도·문화·규범 등에 대한 사회적 지식이 활발하게 생성되고 제도와 문화로서 자리해야 할 할 민주주의 가치와 원칙이 광범위하게 공유될 때, 내란을 사회적으로 저지하는 것도 "두 번 다시 내란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퇴진 광장에 섰던 많은 이가 예상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위기가 한순간에 오지 않았듯 새로운 민주주의 역시 한순간에 당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민주주의 위기를 넘어서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앞당기려는 시도 속에서 당도할 것이다. 비상계엄 1년, 세계인권선언일을 앞두고 여러 운동들이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 행진'을 이어가자고 나선 이유다.
내란 청산을 명목으로 무수한 입법 과제를 추진하면서도 광장을 메웠던 시민동력을 우회해 독주하는 정치와 달리, 우리에게는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나라"까지 바꾸자며 함께 싸웠던 기억이 있다. 청산해야 할 체제가 무엇인지, 어떤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실천을 외면하는 정치에 앞서 우리가 먼저 평등을 말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자고 약속했던 이들이 있다. 자신들만의 민주화 프로젝트를 연장시키는 것에 급급한 정치가 민주주의의 지도를 그려줄 리 만무하기에, 서로가 광장에서 외쳤던 평등의 요구들을 참조점 삼아 함께 걸어야 할 길을 찾아간다. 불신과 냉소와 환멸이 민주주의를 잠식하지 않도록, 평등과 연대가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시작하자.
[참고자료]
경향신문, "내란특별재판부 설치, 과유불급 아닌가" 사설, 2025. 9. 2.
더불어민주당 새로고침위원회, <이기는 민주당 어떻게 가능한가> 새로고침위원회 미래비전 리포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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