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윤 식품전문기자의 식품이야기] ⑪발효의 건강, 김장의 유산

소금·시간·온도, 그리고 공동체가 만든 한국적 저장법

▲ 김장은 우리의 발효 지식, 상부상조의 문화, 계절을 보여주는 우리나라만의 전통 식문화다. ⓒ프레시안(문상윤)

우리 생활에 첫 추위가 닿기 시작하면 김장을 위한 시장의 배추 더미가 먼저 겨울을 알린다.

김장은 냉장고가 없던 시대의 저장 기술에서 출발했지만 오늘의 생활에서는 발효식품을 ‘연중 전략’으로 들이는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남았다.

마을마다 소금을 장만하고 젓갈을 준비해 늦가을에 한꺼번에 김치를 담그던 일의 기억은 공동체의 노동과 나눔, 계절의 리듬을 함께 품는다.

유네스코가 김장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근거도 여기에 있다. 발효의 지식, 상호부조의 문화, 계절에 맞춰 반복되는 생활기술이 한 덩어리로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언어로 보아도 김장은 설득력이 있다. 발효 초반 무게를 잡는 류코노스톡과 바이셀라, 숙성이 길어질수록 우세해지는 라틸락토바실러스 계열이 차례로 산도를 조절하고 향을 다듬는다.

초반의 만니톨 생성은 단맛과 상큼함을 끌어올리고 중·후반의 유기산 축적은 거친 냄새를 해결해준다.

저온에서 천천히 익힌 김치가 “산미는 선명하고 마감은 깨끗한” 맛을 내는 까닭이 이 흐름에 있다.

임상과 관찰연구에서 반복 보고돼 온 장내미생물군 개선, 체지방·혈중 지질 지표의 소폭 개선도 이 발효 생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김치 한 접시가 질환을 치료하진 않지만 일상적인 반복 섭취가 몸의 균형에 개입하는 방식은 분명하다.

문제는 언제나 소금이다. 김치의 맛과 안전을 지키는 핵심이자 현대 식생활에서 조절해야 할 변수이기도 하다.

다행히 해법은 있다. 배추 절임 농도를 관행보다 낮춰 완성 염도를 줄이되, 그로 인해 생기는 밋밋함과 쓴맛은 국물의 감칠맛으로 보완할 수 있다.

배·사과·무·양파에 다시마·멸치를 더해 천천히 우린 ‘저염 베이스’를 절임 후 양념에 활용하면 염도는 낮추고 기호도는 지키는 길이 열린다.

요지는 간단하다. 절임은 목표 염도에서 멈추고 맛은 국물로 채운다. 이 두 줄의 원칙이 서면 저염 김장의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다.

발효는 온도와 시간의 예술이기도 하다. 0~4℃의 저온 숙성은 잡내를 눌러 주고 좋은 균의 활성을 길게 가져간다.

집에서는 소량을 나눠 담가 초반만 짧게 실온에 두고 곧바로 저온으로 내려보내는 편이 안정적이다.

도마와 칼, 작업대의 순서를 정해두고 원재료의 흙과 같은 이물질을 먼저 정리하는 일, 젓갈의 원료와 상태를 미리 확인하는 일은 과장이 아니라 좋은 김치를 위한 기본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 과정이 지켜질수록 김치는 더 오래, 더 차분하게 익는다.

맛을 가르는 변수는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절임이 지나치면 배추 섬유가 쉽게 무르고 수분이 과도하게 빠져 식감이 처지고 절임이 약하면 발효 초기에 국물이 탁해지고 산패감이 거칠어진다.

배추의 크기와 온도, 소금물의 농도를 보고 절임 시간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집집의 노하우가 바로 관능의 차이를 만든다.

마늘·생강은 향의 골격을 세우는 재료이니 양을 줄이더라도 신선한 것을 쓰고 고춧가루는 수분이 낮고 향이 선명한 것을 고른다.

새우젓·멸치액젓·황석어젓은 한 가지만 크게 쓰는 방식보다 짧은 향과 긴 감칠맛을 섞어 맞추는 쪽이 전체 균형을 맞추기 쉽다.

절임 직후 물빼기를 충분히 해 주는 과정 또한 김치의 아삭함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김장의 풍경은 시대에 맞춰 달라졌다. 대가족의 대량 김장이 줄고, 1~2인 가구는 분할 김장으로 일 년을 채운다. 아니면 마트, 인터넷을 통해 소량의 김장 김치를 구매해 김치냉장고를 채우기도 한다.

절임배추와 양념을 조립하듯 마무리하는 세미 가정식 김장이 보편화했고 비건 김치를 위한 버섯·해초 베이스 레시피도 새로운 김장 트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지역의 김장 나눔 행사는 공동체적 의미를 이어 가면서 원재료 이력과 포장까지 위생관리의 기준을 현장에서 체험하는 체험의 장이 됐다.

수출 통계가 해마다 기록을 새로 쓰는 흐름 속에서 김장은 장터의 계절행사이자 세계 시장의 한국 발효식품으로 동시에 확장되는 중이다.

문화사적 의미를 잇는 장치도 여전히 살아 있다. ‘씨김치’처럼 전년도 김치의 맛있는 부분을 잘게 다져 소량 섞는 방식은 균총을 안정시켜 초반 발효를 부드럽게 이끈다. 반대로 전년 김치가 과산으로 흘렀다면 씨김치는 생략하고 초발효 온도를 더 낮춰 천천히 출발시키면 된다.

과거의 손맛이 경험의 언어로 남아 오늘의 생활기술과 만나는 지점이다.

건강을 염두에 둔다면 섭취 맥락까지 챙기면 좋다. 접시에 덜 때 국물보다 건더기를 위주로 담고, 단백질·잡곡·채소와 한 접시를 맞춰 전체 염도를 낮추는 식사의 구성이 실전에서 효과적이다.

고혈압이나 신장질환 등 염도 관리가 필요한 이들은 저염 김치를 선택하고 가능하면 염도 표시가 명확한 제품을 고르는 편이 안전하다.

발효식품의 장점은 결국 ‘얼마나, 어떻게 반복하느냐’에서 온다. 소량을 자주, 식사의 균형 속에서 먹을 때 발효의 이점이 천천히 쌓인다.

결국 김장은 과거의 의례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생활기술이다. 한겨울의 식탁을 설계하는 일, 발효의 시간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끌어오는 일, 가족과 이웃의 노동을 한데 모으는 일 등. 올해도 배추 더미 앞에 서면 질문은 비슷하다. 어떻게 담그고, 어떻게 먹을 것인가?

답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절임 염도를 정하고, 저온 숙성을 지키고, 위생과 동선을 단정히 세우는 것.

그 위에 각자의 입맛과 이야기를 얹으면 된다. 김장은 그렇게, 매년의 겨울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그 방식이야말로 건강과 문화가 만나는 한국적 해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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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윤

세종충청취재본부 문상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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