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권, 대동단결 '임시정부'를 준비한 독립운동 선각자들
박인규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13년 중국 망명 이후 파리강화회의 참가와 삼일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자.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식은 곧바로 동제사라는 단체에 참여한다. 이번에 처음 제대로 알게 된 단체인데, 동제사가 우리 독립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동제사는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7월에 신규식, 박은식 등이 만들었고 신채호, 홍명희, 조소앙, 문일평, 정은보, 그리고 김규식에 이광수도 잠깐 있었다. 처음에는 중국, 미국 등으로의 유학을 원하는 청년들을 가르치고 보내주는 생활공동체, 학습공동체였으나 점차 3.1운동이나 임정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정치결사체 변모했다.
정병준
동제사는 '동주공제'(同舟共濟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간다)에서 나온 것이다. 신규식은 청주 산동 신씨다. 집성촌 출신이다. 신채호, 신백우 그리고 나중에 <조선일보>를 만든 신석우, 신흥우 등이 같은 집안이다.
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중국어학교)를 나왔고 위안스카이 시절 중국 군벌들과 친했다. 그가 이러한 인연으로 중국으로 갔는데 그 배경에는 1911년 신해혁명이 있었다.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박은식, 신채호 등이 중국행을 택한 것이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김규식의 중국행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처음에는 신규식이 난징이나 상하이 등지에서 유학을 하려는 사람들, 대부분 생계와 생활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하숙집이자 기숙학교, 기숙사 같은 걸 만들게 된다. 이 하숙집에서 정치적인 목표까지 추구하게 된 것이다.
두 가지 목표, 하나는 학습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 하나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을 추구한다. 어떤 게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결합됐다. 그러니까 온갖 사람들이 다 가게 된다. 어떻게 학교를 가고 유학을 할지 모르는데 여기에 가면 가르쳐줬다. 그러면서 학원도 하고, 조직도 만들고 하게 된다. 박달학원 같은 학원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게 되는 것이다. 김규식은 아마 1912년도 베이징 YMCA 대회 때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미 접촉했을 것이다. 김규식은 1913년 망명을 한 뒤 바로 동제사에 합류하고 지도급 인사가 된다.
신규식과 김규식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났다. 신규식이 2살 위다. 둘 다 자기 이름 '규식'을 영어로 KIUSIC로 특이하게 썼다. 그래서 신규식은 중국 쪽, 김규식은 미국 쪽 노하우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같이 비밀 조직도 하게 된다. 그러다가 1914년 8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세계 정세의 대전환이 예상됐다. 김규식은 무장투쟁을 위해 사관학교를 만들겠다고 유동열 등과 몽골까지 갔다가 실패하고, 1915년 이후 1918년까지는 장자커우, 톈진 등에서 유럽계 기업의 직원으로 생활을 이어간다.
박인규
동제사의 핵심이었던 예관 신규식은 중국 군벌과 가까웠다, 음독으로 눈이 멀었다, 1922년에 임정 문제로 자결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정병준
군인 출신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결기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전통적 지사형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때를 못 만나 뜻을 못 펴면 몸을 버린다', 이런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을사조약, 한일합방 시기를 거치며 독약을 마시기도 하고, 1922년에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군축회의 실패하고 임정이 와해될 지경에서 일설에는 자진했다고 하고 다른 일설에는 병들어 죽었다고 되어 있다.
박인규
40대에 돌아가셨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동제사는 중국에서의 초기 독립운동, 실력 자강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고 김규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차 대전 이후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중대한 진전이 이루어진다. 우선 1915년 신한혁명당이 출현해서 '독일이 이길 거다'라는 인식으로 고종을 망명시켜서 근왕주의적 독립운동을 추진한다. 그러다 1917년도에 <대동단결 선언>이 나온다. 이 문서가 발견된 게 1986년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3.1운동으로 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 운동적 전환점이라고 지적했다.
정병준
이 선언문은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됐다. 신한혁명당이 근왕주의라고 하지만, 유동열 같은 공화주의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방편적으로 볼 때 청나라가 위안스카이 전제정이고 독일도 전제정이니까 이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고 독일이 승리하면 우리는 고종이라는 왕을 끌어들여서 중국이나 독일하고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하고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거라고 생각을 한 거다.
하지만 이미 1908~1909년도에는 공화주의적인 사상이 국내에 들어왔다고 본다. 신한혁명당은 전쟁 정세와 관련해서 주관적으로 추진했던 거다. 1915년쯤에는 이상설, 유인석 등 근왕주의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거의 다 사망한 뒤에는 왕정 위주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소멸한다. 국민 위주의 공화주의적 독립 사상, 운동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대동단결 선언>의 원래 이름은 그냥 <선언>이다. 나중에 조동걸 선생이 '대동단결'을 붙였다. 상하이나 베이징에 흩어져 있는 해외 한인 대표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의 큰 조직, 대표성 있는 중심기관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실제로 임시정부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당시에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깃발을 공식적으로 든 것이다.
1919년에도 신규식이 똑같은 일을 또 한다. 그래서 그게 임시정부로 실현된 거 아니냐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해외 한인 독립운동 진영의 전반 의견은 '국왕이 주권을 넘겼다고 해서 주권이 소멸되는 게 아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였다. 국민주권, 국민주의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해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조직,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임시정부, 망명 정부는 보통 왕조나 국가가 망하면 그 직후에 왕족, 왕자, 왕이나 대신들이 만드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왕족, 대신은 아무도 안 나서고 왕조가 망한 후에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럼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른바 '법통'이다. 그것을 해외 한인들은 '주권은 불멸한다, 빼앗을 수 없다, 군주가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군주가 1907년에 정미조약으로 주권을 포기한 순간 국민한테 다시 주권이 왔다. 그걸 가지고 우리가 정부를 만든다'라고 했다.
박인규
사실 그것이 임시정부를 만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론적 근거다.
정병준
그렇다. 그래서 안창호가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신민회를 만든다. 원래 신민회라는 조직명이 하와이에 있고 리버사이드에도 있다. 안창호는 그 후에 국내에도 신민회를 만든다. 그런데 비밀조직이다. 기본적으로 공화주의니까. 왕에게 '공화'는 반역이다.
신민이라고 하는 명칭은 내 생각에는 양계초의 '신민설'에서 나온 것 같다. 근대 국민국가는 '국민 될 자격이 있는 신민'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백성은 스스로 일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가의 자격은 국민의 자각 위에 있다. 그래서 공부도 해야 된다. 이런 논리다. 박용만이 후에 <국민개병설>이라는 걸 쓰는데 이것도 양계초 신민설의 영향을 받았다.
1909년 미국의 친일파 외교관 스티븐스 암살 이후에 대한인국민회가 만들어진다. 대한인국민회가 대동보국회랑 합쳐서 국민회가 되고, 국민총회를 만드는데 이때 총회 장정을 쓰는 사람이 박용만, 안창호, 최정익이다. 이때 인식이 '국민주권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하고 국민회가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게 재미 한인 사회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1919년에 임시정부로 외화한다.
박인규
근대적 국민으로서의 자각은 이미 미주 국민회가 만들어진 1909년에 있었고, 1917년도가 되면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공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조직하자고 했으며, 그것이 3.1운동을 준비하게 되는 사상적 조류라고 볼 수 있겠다.
정병준
그렇다. 고종이 죽자(1919.1) 많은 사람들이 문상하고 슬퍼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3.1운동기에 독립선언서나 임시정부 전단 같은 걸 보면 단 한 건도 군주제 부활이나 근왕주의가 없다. 다 공화주의에 입각한 임시정부 각료 명단 및 헌법적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새로 건설할 나라는 공화주의에 입각한 헌법에 근거한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핵심 주장이었다.
3.1운동은 한국의 근대 민족을 만든 역사적 분기점
박인규
한국의 근대사에는 동학, 3.1운동, 4.19, 87년 6월이라는 흐름이 있다. 그 사이에 '광주'와 '여순'이 있지만 약간은 다른 느낌이다. 어쨌든 밑으로부터의 혁명인데, <김규식과 그의 시대> 2권은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을 촉발시킨 무명의 청년 여운형과 김규식으로 시작한다. 당시까지 독립운동에서 무명의 존재였던 여운형과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추진하면서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게 된다는 얘기다.
3.1운동의 의의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다. 3.1운동으로 시대가 전변되었으며 3.1운동은 이후 시대와 후예들이 추구해야 할 민족 에너지의 대폭발이었다."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이 의지할 수 있는 역사적 언덕이 되었고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활성화는 모두 3.1운동의 후기였다." 3.1운동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먼저 짚어줬으면 한다.
정병준
역사적 전환점, 분기점으로서 제일 중요한 건 200만 명이 참가했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의 자기 정체성, 자기 인식이 변화하고 스스로 각성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엔 1910년에 나라가 망할 때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하고 항의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905년에 을사조약부터, 아니면 그 이전 청일전쟁부터 이어진 좌절, 열패감, 체념, 절망의 연장선상에서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더 컸다.
국왕은 아무런 대처를 못 하고, 대신들은 정치적 이권 수탈에만 관심 있고, 지식인들도 책임을 안 진다. 도대체 의지할 데가 없고, 그래서 나라가 망했다는 거였다. 식민 지배가 난데없는 충격으로 다가 온 게 아니라 드디어 올 게 왔다, 어쩔 수가 없다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실 1919년 당시 일본도 몇몇 조선인들이 3.1운동 같은 무엇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본은 몰랐던 게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들이 시정 개선하고 문명 개선했으니까 대다수 조선인들은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만세 시위에 동참해서 스스로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자기 선언을 하며 자기 인식을 갖게 됐고, 그걸 일본과 세계를 향해서 표출했다. 그러니까 3.1운동의 우리 민족사의 일대 사건이다. 자기 부정적이고 공멸적인 정체성 인식에서, 미래를 지향하면서 우리에게는 독립할 자격이 있다고 하는 주체적 각성을 한국인들이 같은 시점에 같은 공간에서 공감각적으로 함께 경험한 사건이다. 극소수 몇몇을 제외하면 조선인들은 독립할 정신이나 의지가 없다고 하던 상황에서, 수십만 수백만이 참가하는 거대한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3.1운동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한국인들에게는 자기 인식의 일대 전환이었고, 이 전환은 물질화되었다. 3.1운동이라고 하는 거대한 에너지와 운동의 발현은 다시 생각해보기 어려운 일일 정도였다. 그 이후 독립운동은 3.1운동에 기댔다. '어게인 3.1운동' 하자는 거였다. 3.1운동에 기대서 국내 진공작전이나 무장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역사적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게 누가 기획해서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누가 의도해서 된 것이냐. 그런 게 아니었다. 사실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조선 독립 이야기하는 게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전쟁 참가국들이 승패와 자신들 정국 문제를 얘기하는데,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10년이 다 돼가는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일본의 내정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를,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을 하나의 기회로 생각하고 온몸을 던져서 활동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윌슨 대통령에 대한 독립 청원과 파리강화회의 참석으로 3.1운동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 했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결합하면서, 이들의 활동은 3.1운동의 단초를 열게 된다.
3.1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의 최상급인 이유는 과거의 신분, 계급이나 계층, 종교, 즉 천도교, 기독교, 불교, 그리고 청년 학생이 결합한 유사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 민족적 궐기이기 때문이다. 우연의 동시성이라고 하는 건 굉장한 것이다. 다시는 소환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3.1운동은 한국 근대 민족 혹은 근대 국민이라는 걸 만들어낸 결정적 계기였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항들에 관한 것과는 별개로 3.1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규식과 여운형, 3.1운동의 문을 열다
박인규
책에 따르면 여운형이 1918년 11월 27일 상해에 온 윌슨 미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나서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전달하는 한편, 벼락같이 신한청년당을 만들어서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 특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또 그 다음에 장덕수 등을 국내, 만주, 노령, 일본으로 보내서 2.8 독립선언을 촉발시켰다. 물론 국내에서도 3.1운동 준비가 있었을 것이다. 책에서 무명의 두 청년, 여운형과 김규식이 3.1운동 과정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썼다.
정병준
여운형은 기회를 포착해서 정말 명민하게 대응했다. 그리고 조직력이 뛰어났다. 2.8 독립선언에 이광수가 역할을 하고, 선우혁이 이승훈을 만나면서 기독교 조직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도교도 물론 만났다. 이런 조직력, 명민한 기회 포착 대응 능력이 여운형에게 있었다면, 김규식은 단기필마로 파리에 가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 조건, 능력을 갖춘 최적의 인재였다.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한국 대표라는 자격은 굉장히 모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파리에 있었다는 것이 3.1운동이 폭발에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인규
우리의 대표가 지금 파리에 가 있다는 뜻에서?
정병준
그렇다. 김규식이 파리에 간다는 이야기가 국내와 도쿄에 영향을 미쳤다. 만약 그런 물질적이고 직관적인 대표성이 없었다면, 3.1운동이 그렇게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한국 사람이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청원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촉발제가 될 수 있었다.
박인규
잠시 언급했던 신규식도 역할을 한 것 같다.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전한족대표위원회 소집 편지를 보낸다.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대표였지만, 또한 신규식과의 협조 속에서 동제사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병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당시 모두 직간접적으로 동제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여운형 그룹의 상당수가 동제사 회원이다. 여운형도 동제사와 기맥이 맞닿아 있는 청년그룹 출신이다. 실행력이 좋으니까 3.1운동기에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은 결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만들어졌을 때 실질적인 인력 풀을 제공하게 된다.
1918년에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만들고 크레인을 만난 후에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대했다. 김규식이 생각하기에 활동의 중심은 동제사, 신규식, 그리고 자신인데 들어보지 못한 젊은이들의 조직인 신한청년당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게다가 여운형은 김규식보다 다섯 살 아래로, 과거 서울에서 김규식이 교사로 있었던 흥화학교의 학생이었고, 그의 삼촌 여병현과 김규식이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나중에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가게 되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신한청년당이 아니라 동제사와 신규식과 함께했던 맥락을 계승하는 흐름 속에서 이해했다. 실제로 가서 그렇게 행동한다.
기회를 포착하고 일을 시작한 것은 여운형이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한 조직이나 인맥은 사실은 동제사 쪽에 더 많았다. 그러니까 장덕수가 체포됐을 때도 여운형과 신한청년단 얘기를 안 하고 신규식과 동제사 얘기를 한다. 신한청년당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동제사가 더 연륜도 깊고 오래된 조직이고 중심이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역사의 순간, 사회 지도층의 의무
박인규
여기서 윤치호라는 인물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윤치호는 일찍이 미국 유학을 했고 영어로 일기를 쓸 만큼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당시 국내에서도 3.1운동을 준비했고 최남선, 이상재, 송진우 등이 윤치호를 파리에 대표로 보내려고 했는데 그가 대단히 '현실적인' 판단으로 '이거 택도 없는 소리야'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 대목을 보면서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한 면모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윤치호를 어떻게 봐야 하나?
정병준
그냥 장삼이사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사회적인 지위 또는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임을 져야 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윤치호는 책임회피형 인물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다. 역사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구름이 잔뜩 끼고 비바람 몰아치고 뭔가 내릴 게 분명한데, 거기에 대처하자는 것, 기회를 포착해서 뭔가 해보자는 게 시대의 소명인데 윤치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내세워서 아무 일도 안 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어도 잘하고 명망도 있고 국제적인 커넥션도 있으니까 윤치호가 한국을 대표해서 파리에 가서 독립을 호소해야 된다는 요구가 있었다.
그런데 윤치호는 그걸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는 양기탁은 나쁜 놈이다, 라고 한다. 도둑놈이라고 했다. 하와이나 미주나 중국에 있는 한인 노동자나 이런 사람들 돈을 뜯어내서 해외여행 가려고 하는 놈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이러면서 비난한다. 그러고 자기는 아무 일도 안 한다.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뭔가를 시작해야 하는 건데, 그는 아무 일도 안 했다. 그 결과 역사의 순간에 윤치호는 3.1운동을 부정하거나 3.1운동과 무관한 사람이 됐다.
윤치호는 흥업구락부 사건 때 잡히게 되는데 그때도 마찬가지다. 책임을 전혀 지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당연히 그에 맞는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부정했다. 윤치호가 친일이냐, 근대 계몽운동의 선구자냐, 이런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그보다도 한 사람의 지식인 혹은 관료 출신으로서 사회 지도자로서의 책임이나 소명 의식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본다.
사회 지도자라면 어떻든 간에 책임을 지고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최근에 독립기념관장이 8.15기념사에서 한국 독립은 연합국의 승전이 준 선물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노력을 완전히 폄하한 발언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더 중요한 점은, 그게 학술토론회 자리의 의견이 아니라 독립기념관장의 8.15 경축사였다는 것이다. 자리에 걸맞지 않은 인식과 언행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탐하는 경우가 아직도 우리나라에 너무 많다.
(④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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