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소리 너머 들린 목소리, 코더 캐치풀의 양심

[김성수의 영국이야기] 상사의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한 남자

1916년, 영국 군사법정에 한 남자가 섰다. 레스터 출신 기계공 토마스 '코더' 페티포어 캐치풀(Thomas 'Corder' Pettifor Catchpool, 1883-1952). 그는 판사 앞에서 말했다. "저는 총소리 너머의 부름을 들었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2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캐치풀은 자원해서 퀘이커교 구급대에 들어가 1916년까지 서부전선에서 부상자를 치료했고, 프랑스 몽스 훈장까지 받았다. 전쟁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916년 징병제가 도입되자 그는 구급대를 사임하고 절대주의적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되었다. 자발적으로 전쟁터에서 사람을 구하는 건 괜찮았지만, 강제징병제에 편입되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조류를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다. 그 대가는? 영국 감옥의 차갑고 습한 독방이었다.

적국 어린이를 먹인 승전국 남자

1919년 석방 후 캐치풀은 바로 베를린으로 향했다. 패전국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배상금에 짓눌린 독일 어린이들에게로. 퀘이커교 구호위원회와 함께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영국인, 그것도 방금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국민이 독일 거리에서 굶주린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준다. 이게 바로 '절대주의자'의 실천이다. 민족주의의 경계선을 넘어, 아이는 아이일 뿐이라는 단순하지만 급진적인 진리.

간디와 면직공, 불가능한 대화

이즈음 캐치풀은 영국으로 돌아와 랭커셔지역 공장 복지담당자로 일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주선했다. 1931년 9월,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 1869-1948)를 공장으로 초청한 것이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간디의 면직물 불매운동으로 랭커셔에서 수천 명이 실업자가 된 상황이었다. 경찰은 간디에게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분노한 군중에게 습격당할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 기자 윌리엄 샤이러는 노동자들이 간디를 보고 본능적으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바친 사람"을 알아봤다고 보도했다. 주로 여성노동자들이 간디의 양팔을 잡고 환호했다.

물론 간디는 불매운동을 철회하지 않았다. 늙은 직조공이 형편이 어렵다고 말하자 간디는 단순히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빈곤이 뭔지 모릅니다."(대영제국이 착취한 식민지 인도인들이 겪고 있는 최악의 빈곤을 암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제국주의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노동계급) 사이에 연대의 순간이 있었다. 캐치풀이 만든 기적이었다.

게슈타포 앞에 선 퀘이커

1931년 캐치풀은 베를린 퀘이커센터 대표로 임명되어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사했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집권했다.

1933년 4월 1일, 독일인들은 유대인 소유 상점을 모두 보이콧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캐치풀과 아내는 다른 독일 퀘이커들과 함께 명령을 거부하고 유대인 상점들을 방문했다. 이틀 후 가족 전체가 체포되었다. 캐치풀은 게슈타포 본부에서 심문받고 36시간 후 석방되었다.

게슈타포 지하실에서 석방된 사람이 독일에 남아서 뭘 했을까? 더 위험한 일을. 그는 유대인 수감자들의 가족을 방문하고 이민을 도왔다. 집단수용소를 방문하여 목격한 상황에 깊이 충격 받았다.

여기서 캐치풀은 불가능한 줄타기를 했다. 발견한 사실을 영국에 공개적으로 보고해서 방문을 중단당할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고위 나치들과의 대화를 유지할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침묵하는 대신 은밀하게 행동했다. 순수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적 평화주의자의 선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캐치풀은 리투아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한 소수 독일인들을 위해서도 캠페인을 벌였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돕던 사람이 이번엔 독일계 소수민족의 인권을 옹호한 것이다. 그는 체코 백선 훈장 4등급을 받았다.

폭격의 광기에 맞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캐치풀은 작가 베라 브리튼(Vera Brittain, 1893-1970)과 함께 1942년 폭격제한위원회를 설립했다. 브리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약혼자와 오빠, 친구들을 모두 잃은 전직 간호사였다.

1942년, 영국은 독일 도시들을 융단폭격하고 있었다. 드레스덴, 함부르크, 쾰른. 민간인 수만 명이 불바다에서 죽었다. 위원회는 외쳤다. "우리가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어선 안 된다!" 당연히 매국노로 몰렸다. 하지만 역사는 이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전쟁이 끝나자 캐치풀은 다시 독일로 돌아가 구호활동을 했다. 1차 대전 후 독일 어린이들을 먹였던 그가, 나치시대에 유대인을 도왔던 그가, 2차 대전 후 다시 폐허 속 독일인들을 돌봤다. 원수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산에서 부른 자유

코더 캐치풀은 1952년 스위스 두푸어슈피체(해발 4634미터) 등산 중 사고로 사망했다. 평생 제도의 경계를 넘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산봉우리를 넘다가 간 것이다. 감옥의 벽, 국경선, 이념의 장벽을 넘었던 사람이 하늘의 경계를 넘으려다 간 것이다.

영국이 잊어버린 예언자

캐치풀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솔직히 말하면 대중적으로는 거의 없다.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처럼 동상이 서 있지도 않고,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는다. 왜? 그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반대했던 두 차례 세계대전은 모두 끝까지 치러졌고, 그가 경고했던 비극들은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치풀의 진정한 유산은 가시적 성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원칙이다. "국가가 총을 들라고 명령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적국의 어린이도 내 나라 어린이만큼 소중하다." "악의 체제 안에서도 선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영국 역사는 제국의 영광과 전쟁의 승리로 쓰였다. 그 서사에서 캐치풀은 불편한 목소리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개인의 양심이 왕의 명령보다 우선한다는 가장 영국적인 전통의 계승자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재혼을 승인하지 않아 참수당한 그 전통 말이다.

캐치풀의 진짜 기여는 대안적 남성성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20세기 초중반 영국의 지배적 남성성은 군인, 제국건설자였다. 캐치풀은 다른 종류의 용기를 보여줬다. 감옥에 갈 용기, 적을 돌볼 용기, 혼자 서 있을 용기.

총소리 너머의 부름

2025년 오늘, 캐치풀의 이야기는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총소리 너머의 부름"을 들을 수 있는가? 소셜 미디어의 증오 발언, 민족주의의 함성 너머에서?

캐치풀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산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오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도 완벽할 필요는 없다. 단지 오르면 된다. 한 걸음씩. 양심을 따라서.

그는 조류를 거슬렀다. 우리도 거스를 수 있다.

▲코더 캐치풀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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