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엔 시커멓게 탄 소나무와 잿빛 흙만 남아 있던 곳에 초록색 풀과 나무가 듬성듬성 돋아났다. 껍질과 기둥 아래만 그을린 활엽수들이 나무 머리에 초록색 잎을 회복했고, 탄 기둥만 앙상하게 남았던 소나무림 바닥에선 잡초와 활엽수 맹아가 싹을 틔웠다.
지난 29일 오전,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1리에서 만난 주민 김아무개(60대) 씨는 "푸른색을 영영 못 볼 줄 알았다"면서 "저기 초록색들 보면 다 참나무, 활엽수들이다. 활엽수가 참 고마운 존재란 걸 이번에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 4월 같은 산불 현장에서 <프레시안>과 만났던 그는 그땐 "마음이 아파 고사리 하나 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방이 까만 숯과 재만 가득해 풀 한 포기 하나 볼 수 없어, 마을 뒷산에 난 고사리를 캐려다 죄스러운 마음에 그만뒀다"고 했다.
구계리는 안망천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김 씨는 "큰비가 3번 정도 와서 천이 3번 정도 불어났는데, 첫 번째 물은 탄광의 물인 듯 잿물 그 자체였다"며 "두 번째도 잿물에 가까웠고, 최근 장마 때인 세 번째 물에만 황톳빛이 섞여 있었다"고 말했다.
구계리는 의성에서도 지난 3월 경북 산불 피해를 극심하게 입은 지역이다. 마을 90여 가구 중 절반 이상이 자택 전소 피해를 봤다. 전소된 집터는 아직 공터로 남아 있어, 마을 곳곳엔 구멍이 뻥뻥 뚫려 있듯 휑했다.
이재민들은 현재 마을에 설치된 임시 컨테이너 주택에 입주해 산다. 5월 20일경 이주했다. 구계2리 마을 입구 근처엔 임시 주택 14개 동이 밀집해 있다. 집마다 '온기나눔' 등의 봉사단 스티커가 붙은 꽃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이재민 박아무개(60대) 씨는 임시 주택 뒤 밭에서 들깨를 심고 있었다. 박 씨는 "(임시주택) 문틈에 바람이 엄청나게 샌다. 창틀로 파리가 어찌나 들어오던지"라며 "겨울엔 어쩌나 싶다"며 걱정했다.
박 씨는 하천 바로 옆에 지어진 임시주택을 보며 "폭우도 걱정이다. 높은 자리로 가자 했다는데, 저 위에 땅 주인들이 허락을 안 해줬단다"라며 "산사태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군에서 돌망태 옹벽을 해준다고 하는데 아직 말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1차로 전소 주택에 대한 지원금은 지급된 상태"라며 "전소된 집 평수 별로 2000~3200만 원이 차등 측정됐고 여기에 6000만 원이 일괄 추가됐다. 70% 정도 지원이 완료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받긴 받았는데 어떻게 책정된 것인지 내용은 모른다"는 주민들이 많았다.
박 씨는 "지원금이 들어오긴 했는데 왜 그렇게 나왔는진 모른다"고 했다. 농사를 짓는 그는 불에 탄 경운기 4대, 관리기, 살포기, 약차, 창고 등을 더 걱정했다. 농기계는 일부 종류에 한해 종류당 1대까지만 70% 금전 지원이 나왔다. 창고, 하우스, 과수원 등에 대한 피해지원은 아직 들은 것이 없다.
구계2리에서 만난 김아무개(70대) 씨도 "150만 원씩 두 번 돈이 들어왔던데 뭐 때문인진 모른다"고 말했다. 하우스 아홉 동에 각종 농기계, 집까지 모두 전소된 김 씨는 "팔자가 뒤바뀌었다"고 허탈해하며 말했다. 김 씨는 80대인 남편이 암에 걸려 치료를 받는 중이라며 "한 푼 두 푼 생활비를 계속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처음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손을 놓고 있었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기가 하루이틀 지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다시 농사일을 시작했다. 비교적 빨리 수확을 걷을 수 있는 팥, 애호박, 열무 등을 심었다고 했다.
어제는 들깨씨를 사러 시장에 갔는데 "한 되에 1만6000원인데 비싸서 못 사 왔다"며 "(이후) 내가 팔아도 1만 원에 못 파는데"라고 했다. 그러면서 "씨앗이 진짜 중요한 건데, 다 타버렸다. 이런 걸 지원을 해주면 안되느냐"며 "어떤 마을은 어디서 씨앗을 분배받아 와서 주민들이 각자 필요한 만큼 받아 갔다는데, 그런 게 참 도움이 되겠다"라고 아쉬워했다.
구계 마을 뒤엔 고운사 사찰이 있다. 고운사는 이번 산불로 전소됐다. 아직 복구 작업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고운사 경내는 잘게 부서진 건물 벽과 기왓장, 숯 기둥이 바닥에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산불 열에 의해 깨진 범종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계1리 주민 김 씨는 고운사로 들어가는 1.5킬로미터(km) 정도의 진입로를 가리키며 "원래 이 길은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울창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앙상한 나무 기둥만 남아 햇빛이 그대로 내리꽂고 있었다. 고운사 뒤의 소나무로 꽉 찼던 등운산 자락은 아직 초록색 잎을 찾기 어려웠다.
고운사 주지 등운스님은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소나무림을 인공적으로 다시 조성하지 않고 자연에 맡기겠다"고 밝히고 있다. 김 씨도 "이제 소나무는 마을에 심으면 안되겠더라. 자연복원에 맡기는 게 방법이겠더라"며 "신기하게도 싹이 계속 올라온다. 그런데 이걸 밟아서 죽이고 하면 되느냐"고 산림청의 숲가꾸기 방식을 비판했다.
행사 도중 산불 트라우마로 쓰러진 주민
구계리에서 약 8km 떨어진 옆 동네 점곡면도 새카맣기만 했던 산 능선에 초록색 잎이 하나둘씩 보이고 있었다. 점곡면도 사촌리, 구암리, 동변리 등 산불 피해 주민이 밀집한 곳이다.
9개 가구가 전소된 사촌1리는 박기 사촌1리 이장이 자신의 파밭을 임시주택 건립지로 내놓았다. 밭엔 임시주택 5개 동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은 주택을 둘러싼 흙바닥에 꽃을 심어 화단을 조성했다. 색색깔의 바람개비도 여러 개 꽂고 낮은 관목도 식수해 마을을 더 푸르게 꾸몄다.
이날 오후 사촌리 점곡문화체육회관에선 주민집담회가 열렸다. 지난 28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의성 그리고 너=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의성에 사는 청년들을 비롯해 피해 지역 주민, 연대 활동가와 시민단체들이 주최한 행사로, 지역 주민들이 산불 피해 실태를 공유하고 마을 지원 활동을 하며 이후 회복 과정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28일엔 점곡면 주민의 안내로 피해 현장을 걷거나 피해 농가 농사일을 도왔고, 피해지역 회복을 위해 각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간담회도 가졌다.
점곡면에선 지난 5월 9일 점곡면산불피해주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총무로 활동하는 주민 김경희 씨는 집담회 발표 자리에서 재난 피해자들의 알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김 씨는 "산불이 어떻게 어디로 오는지, 언제 어떻게 대피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가, 또 집, 재산, 일터, 공장이 다 타고 막막한 상황인 우리가 보상과 복구가 어떻게 이뤄질 것이지 당연히 설명을 듣고 알아야 하는데도 누구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대책'이란 말을 꺼내면 (군·면에선) '우리가 알아서 다 해줄 텐데 무슨 대책이냐'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며 "'가만히 있으라'는 건 맞지 않다. 우리에겐 알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민들은 이날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과 이규송 강릉원주대 교수를 초청해 향후 민가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산불 대응 방안과 정의로운 산림 복원 방안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강연 도중 지난 산불 피해 자료 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주민이 휘청거리며 의자에서 낙상했다. 행사는 5분가량 중단됐고, 이 주민은 안정을 취하기 위해 곧 자리를 떴다. 앞에 앉아 있던 한 주민 참가자가 "산불 영상을 봐서, 지난 산불 트라우마 때문에 잠시 쓰러진 것"이라며 "나도 아직 영상을 보는게 힘들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서 전문위원은 강연에서 "이번 일이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재난 원인 조사는 반드시 철저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어떤 이유에서건 더 이상 숲가꾸기 등으로 소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 피해를 겪은 지역은 특히 그렇다. 이 또한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런 자리가 (주민 권리를 요구하고 재발방지책을 세울) 시작이라 생각한다."며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서 30~40대가 됐을 때 또 재난이 올 수 있다. 그럴 때 다시는 이런 큰 피해가 없도록, 그런 의성이 되도록, 대한민국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기 이장의 "먼 걸음 해주시고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행사는 끝났다. 박 이장은 왼쪽 가슴에 '다시 봄은 온다'는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의성산불피해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그는 곧 있을 첫 '상경투쟁'을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안동, 청송, 영양, 영덕, 의성 등 경북 5개 시군에서 모인 주민 1000여 명은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2시간가량 산불재난특별법 제정과 온전한 피해 회복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는 "간첩이네, 빨갱이네, 너무나 많은 욕과 조롱, 비하를 들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괜찮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며 "특별법을 만들어 지원 사각지대에 처한 우리 주민들이 제대로 된 배상을 받고 다시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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